협성해운 입사와 라스코해운 재직시절

선원선박관리회사인 JSM인터내셔날의 변재철 회장 회고록 ‘소동 주해기(昭東 舟海記)’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本誌 발간사)에서 발간됐다. JSM인터내셔날은 1968년 설립돼 해외선원의 관리사업을 영위한 라스코해운이 전신이다. 변재철 회장은 65년 협성해운에 입사해 라스코과 인연을 맺었고 94년 동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으며, 이듬해 사명을 JSM인터내셔날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다.
‘소동 주해기’에는 우리나라 선원의 해외취업 역사의 一面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도 실려있다. 이에 관련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수회에 걸쳐 편집,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선원의 해외취업
우리나라 선원의 해외취업은 1960년부터 이루어졌다. 1960년 6월 그리스선적의 리버티형 선박인 라미레프스(Lamylefs, 8900총톤) 호의 통신장이 발병으로 하선하는 바람에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김강웅(1925~2003) 통신장이 승선하였다. 이것이 한국 해기사 최초의 해외취업이었다. 1944년 일본 관립메구로(目黑)무선전신강습소(1949년 전기통신대학으로 개편)를 수료한 김강웅 통신장의 월급은 120파운드였는데, 당시 대한해운공사 보수의 3배였다. 본래 계약은 부산에서 미국까지 1항차만 하는 것으로 체결했으나, 항해 중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2년 6개월 동안 승선하여 1963년 초에야 귀국했다.


협성해운(대표 왕상은)은 1963년 홍콩 선사 풍씽선무(豊誠船務, Fong Shing Shipping)의 한국대리점을 맡고 있었다. 협성해운은 해외취업 1차선으로 풍성선무의 룽화Loong Hwa호(2,700총톤)에 선장 김기현(N4)과 기관장 이강래(E4) 등 28명을 1년간 승선계약을 체결해 1964년 2월 10일 승선시켰다.
해양대 교수로 있던 김기현 선장의 급료는 280달러(약 7만 1,680원)였는데, 당시 대한해운 공사의 선장의 급료는 1만 9천원선이어서 3.5배 가량 많았다. 한국 선원의 성실성에 만족한 퐁씽선무는 1964년 6월 2차선 룽깡龍 岡Loong Kang호(5,140총톤), 7월 26일 3차선 룽안Loong An호(2,800총톤)에 한국 선원을 승선시켰다.
이렇게 한국 선원의 해외 송출이 속속 소정의 성과를 거두자 홍콩 선사인 테후윤선공사(德和輪船公司, Teh Hu Steam Shipping)가 자사선 빌리(Billy호, 1만 3,500총톤)에 한국선원의 승선을 요청해왔다. 빌리 호에는 김용석 선장 등 34명이 1964년 8월 12일, 2년 계약으로 승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선원의 해외취업은 대한해기원협회(1957~1966.5.9, 한국해기사협회 전신)가 주관했다는 점이다. 1964년 홍콩선사인 월드와이드쉬핑(World Wide Shipping, 대표 YK Pao)이 해기원협회에 한국 해기사들의 추천을 요청해왔다.
이에 따라 협회에서는 1964년 9월 백웅기(N7), 김진한(N13), 이명섭(N14), 박용섭(N15) 등 15명의 해기사를 추천했다. 이들은 월드와이드쉬핑과 개별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2등항해사 또는 3등항해사로 기존의 외국인 선원들과 혼승했다.
그러나 해외진출 개척기였던 이 시기에 한국 선원을 고용한 외국선주들은 영세한 선주들이어서 노후선을 싸게 구입해 수리도 하지 않은 채 운항하다가 폐선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에 따라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1965년 일본 다이와(大和)해운은 파나마선적의 다이에이(Daiei)호에 승선하고 있던 영국인 선장을 비롯한 혼승선원을 해고하고, 한국해대 교수직을 사직(1964.11.11)한 서병기(N2) 선장과 송형조 기관장(E2) 등 30명의 한국선원을 승선시켰다. 그러나 승선한 지 한 달 만에 다이와해운의 홍콩법인이 도산해버려 정기 도크수리 중 폐선되어 버렸다.

 
 

서병기 선장 등 한국 선원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서병기 선장은 선원들의 질서를 엄정하게 유지하는 한편, 다이에이호의 폐선작업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선주와 일본 해운업계에 한국 선원의 우수성에 대해 재인식시켰다.
이를 눈여겨본 차이나유니언라인즈의 우(C.C. WU)감독이 서병기 선장을 비롯한 한국 선원 전부를 유니언 라인즈의 리버티형 선박인 그레타(Greta)호에 승선시키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다이와해운의 오히라(大平) 해무감독은 한국 선원의 고용을 추진하던 산코기선에 서병기 선장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서병기 선장은 1966년 가을 한상용 기관장과 함께 한국 선원을 대표하여 산코기선과 한국선원 고용계약을 체결했다. 산코기선은 1934년 설립된 일본 해운회사로 세계 5대 해운선사로 손꼽히던 부정기 전문선사다. 창업자는 훗날 일본 운수대신과 부수상을 지낸 고모토 도시오(河本敏夫(1911-2001)였다. 이때 서병기 선장이 승선한 배는 8만톤급 광물겸용선 시그후지(Sigfuji)호다. 시그후지호는 1966년 3월에 진수한 신조선이자 한국 선원이 처음으로 승선한 대형선이었다.


이를 계기로 산코기선은 한국 선원을 더 많이 채용하게 되자, 일선 선장으로 승선 중이던 서병기로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서병기는 한국 선원 고용을 전담할 회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윤상송과 의논한 끝에 천경해운을 소개받았다.
얼마 뒤 서병기는 선장에서 내려 산코기선의 해무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 선원들의 해외취업은 1965년 월남전이 확대됨에 따라 해군 출신 해기사들이 미 해군극동해상수송단(MSTS)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한국 선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1965년 말까지 선원의 해외취업은 선박 21척, 선원 700여명으로 증가했다.
1965년 10월 6일, 잉여인력을 해외에 진출시킴으로써 실업자 감소·인구증가 억제·외화획득·교역증진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세계 속에 한국을 심자’는 기치를 내걸고 해외개발공사가 설립되었다. 선원해외송출 업무는 1966년부터 한국선원해외진출진흥회가 도맡아 취급하다가 해외개발공사 설립 뒤인 1966년 12월 15일에는 공사로 업무가 이양되었다.

 

 
 

협성해운 입사
1965년을 전후로 한국선원의 해외취업이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자 육상직에서 선원과 선박관리직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당시 선원 해외취업의 선두주자는 협성해운이었다.
마침 협성해운 해사부에 근무하고 있던 김병수(E6)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배를 타러 오라고 소동(昭東)에게 권유하였다. 김병수는 고향이 장수로, 남원이 고향인 昭東과는 해양대학 재학시부터 잘 알고 지내던 선배였다. 그렇게 해서 배정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1965년 6월 협성해운에 입사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협성해운에 입사한 것이 아니라 협성해운에서 선원공급을 한 대만의 차이나유니언라인즈(China Union Lines) 소속선박인 유니언 프로스퍼(SS Union Prosper, 7,243총톤)호에 1기사로 승선하게 된 것이다.


‘유니언 프로스퍼’호에는 1965년 6월 4일부터 1967년 1월 10일까지 1년 6개월을 탔다. 대만의 차이나유니언라인즈와 한국 해운업계와는 이미 1963년 서울해운이 ‘유니언 스타’(Union Star호, 4,500총톤)를 나용선했을 때부터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서울해운은 한국해양대 교수였던 김수금(N2)을 선장, 박순석(E2)을 기관장으로 초빙해 ‘유니언 스타’호를 운항하도록 했던 것이다.
유니언 프로스퍼호에는 김익환 선장(N5)과 조병락 기관장(E4) (뒤에 이창성 기관장이 교대 승선)이 함께 승선했는데, 낡은 배여서 기계의 고장도 잦았고 배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특히 일본에서 홍콩으로 항해하던 중 보일러 튜브(boiler tube)가 터져 고치느라 고생했는데, 결국 배를 폐선하게 되어 하선하였다. 당시 1 기사의 월급이 205달러(약 5만 2,200원)였는데, 환전했을 경우 교사 월급(1만 2,000원 내외)의 4배 정도 많았다.
昭東은 ‘유니언 프로스퍼’호를 1년 반 정도 타고 67년 1월에 내려서 협성해운 해사부의 공무감독으로 일했다. 昭東이 육상근무를 하는 동안 협성해운 해사부에는 김동화 부장, 김병수 공무감독, 최영근 공무감독(E11) 등이 함께 근무했다. 그러나 육상근무도 1967년 8월까지 7개월 정도 밖에 하지 못하고, 다시 협성해운 소속의 안동호에 1기사로 승선했다.

 

협성해운과 Lasco Shipping
협성해운의 왕상은 회장이 미국의 라스코쉬핑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64년 재팬라인의 1만톤급 침몰 선박에 대한 국제입찰에 라스코쉬핑의 레오나드 슈니처(Leonard Schnitzer, 1924~2003) 회장과 함께 참여한 것이었다.
재팬라인 소속선인 코코쿠 마루(Kokoku Maru)가 샌프란시스코항 인근에서 침몰했고, 최종적으로 선박보험가입회사가 소재지인 오사카법원에서 공매하기로 결정했다. 로이즈(Lloyd’s) 보험 업무를 맡고 있어서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왕상은 회장도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마침 국제입찰에 참여한 슈니처 회장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국제입찰 과정에서 왕 회장의 양보로 선박을 확보한 슈니처 회장은 왕 회장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에 한국 선원 해외취업 업무를 본격화하고 있던 왕 회장은 1964년 말 슈니처 회장에게 한국 선원을 배승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즉 노후한 리버티형 선박이라도 편의치적선 형태로 한국의 해기사와 선원을 승선시켜 운항하면 채산성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라스코쉬핑(Lasco Shipping)은 1963년 사무엘 에스(Samuel S)호와 로즈 에스 22호 등 2척의 중고선으로 모그룹인 슈니처철강(Schnitzer Steel)의 원료인 고철을 수송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슈니처 스틸을 설립한 사람이 사무엘 슈니처(Samuel Schnitzer, 1880-1952)였고, 그 부인이 로즈 슈니처(RoseSchnitzer)였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5남 2녀가 있었으나, 5남 2녀의 자녀 가운 데 삼남인 길버트(Gilbert, 1918-2012)에게 태어난 Gary 외에는 모두 손녀들뿐이었다. 라스코쉬핑은 막내인 레오나드가 대표를 맡아 설립된 회사로서 라스코(Lasco)라는 사명은 사무엘 슈니처의 셋째이자 장남인 Manuel의 장녀 캐롤 Carol과 사위인 케니스 루이스(Kenneth Lewis) 사이에 태어난 두 손자 Larry와 Scott의 두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설립 당시 라스코쉬핑은 국제적으로 임금이 저렴한 필리핀 선원을 배승하여 선박을 운항하고 있었다. 이런 경과를 통해 1965년 협성해운이 라스코쉬핑에 한국 선원을 공급하게 된 제1호선이 사무엘 에스호였다.
제1호선인 사무엘 에스호에는 구완섭 선장(N2)과 조정제 기관장(E1)이 1965년 2월 15일에 승선하였다. 1965년 당시 라스코쉬핑은 사무엘 에스, 로즈 에스, 브라더 에스, 오션 로거, 모니크, 치프 아오시카호 등 총 6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필리핀 선원이 승선 중이던 로즈 에스호는 필리핀 선원이 승선 중 폐선되었다.
라스코쉬핑의 선박에 승선한 한국 선원들은 선령이 20년이 지난 리버티형 터빈선인 사무엘 에스호와 브라더 에스호를 일본에서 승선해 태평양을 건너 항해하는 동안 녹을 제거하고, 페인트를 칠하고, 기계를 정비해 거의 새배로 만들어 놓았다.


라스코쉬핑 본사가 있는 포틀랜드에 입항하는 사무엘 에스호를 기다리고 있던 본사의 감독들이 자기 회사 선박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외관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에 반해 필리핀 선원들이 승선한 배 가운데 한 척에서 선내 분란이 일어나 주갑판 선실에서 갑판으로 통하는 주출입로의 목재 출입문이 도끼에 찍혀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라스코쉬핑은  필리핀  선원이  승선하던  2척을 1966년에 한국 선원으로 교체하였고, 순차적으로 선대를 확대하면서 전 선단을 한국 선원을 승선시켰다. 1965년 당시 협성해운의 송출업무는 해사부에서 담당했는데, 김동화 부장과 김병수 공무감독 등이 근무하고 있었다.
협성해운의 왕상은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선원 송출업을 처음으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 분야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선원송출과 관련된 다양한 대외 활동도 병행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국제운수노련(ITF)이 편의치적선에 승선한 한국인을 비롯한 저개발국의 선원들의 노동 조건에 문제를 제기하며 하역을 거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ITF 활동이 특히 활발했던 호주에서 하역 거부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 때 왕 회장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약했다. 우리나라 선원들의 임금은 국제적으로는 낮은 수준이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에서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협성해운 외의 다른 송출업체가 배승했던 일부 외국선박에서 발생했던 임금 체불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하자 왕 회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ITF와 직접 교섭에 나섰던 것이다. 그 결과 왕 회장은 우리 선원들의 임금 수준을 상향 조정하는 등의 성과를 이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선원 복지를 위해 노조 지원에 나서 인천에 선원 숙소 건물을 건립해 기증하는가 하면, UN 산하 기구를 통해 방콕에 선원양성소를 설립하는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왕상은 회장은 1969년 10월 선원송출업무를 분사해 주었다.


라스코쉬핑의 로즈 에스호 승선
1965년부터 시작된 협성해운의 라스코쉬핑에의 한국선원 공급은 이후 라스코쉬핑의 선대가 확대됨에 따라 큰 폭으로 증가했다. 1965년 당시 한국 선원이 승선한 라스코쉬핑 소속선은 5척이 었으나, 1966년 필리핀 선원이 승선하던 선박 1척마저 한국 선원으로 교체함에 따라 6척으로 늘어났고, 1967년에는 8척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협성해운에서 라스코쉬핑에서 공급해야 하는 선원 수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자, 해사부에 육상근무하던 김병수 공무감독도 승선하러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에 따라 협성해운 해사부에는 김동화 부장, 이영종(E6) 공무감독, 최영근(E11) 공무감독이 근무하게 되었다.
1967년 8월 25일 안동호에 승선한 昭東은 라스코쉬핑의 선박에 우수한 해기사를 공급할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승선한지 11일만인 9월 6일 하선해 9월 26일 로즈 에스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일본의 히다치제작소(日立製作所), 가사도조선소(笠戶造船所)에서 신조 중이던 로즈 에스호는 도크에서 약 석달 가량 작업을 마무리하고 실제 운항은 1968년 초에나 이루어졌다.
로즈 에스호에는 성철득 선장과 김병수 기관장이 승선해 있었고, 전체 선원 수는 35명이었다. 昭東은 1기사로 승선하였는데, 월급여는 330달러였다. 昭東의 선원수첩에 따르면, 로즈 에스호에는 1967년 9월 26일부터 1970년 9월 7일까지 거의 3년이나 승선하였다. 승선시에는 1기사로 승선했지만, 1968년 12월 4일 기관장으로 승진하였는데, 기관장의 월급여는 570달러였다.


昭東이 로즈 에스호에 기관장으로 승선했을 때의 일화다. 배가 타코마에 입항했을 때인데, 레오나르 슈니처 회장이 포틀랜드에서 2시간 가량 손수 운전을 해서 타코마항에 정박해있던 배를 찾아왔다. 단순히 방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원들의 편지를 갖고 온 것이다. 청바지를 입은 채 편지 가방을 든 레오나르 회장이 선박의 현문에 올라온 것을 본 당직 조타수가 ‘선장에게 보고하려고 하니 명함을 주고 잠시 기다리라’고 얘기했다. 이를 목격하게 된 성철득 선장이 맨발로 뛰어내려와 사장도 알아보지 못 한다고 당직조타수의 뺨을 올려붙였다.
성철득 선장이 레오나드 사장을 모시고 올라가는 길에 기관부원 네다섯명이 신문지를 들고 윗도리도 벗은 채 바다에서 기름띠를 건져내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레오나드 사장이 성철득 선장에게 ‘빌지 오일이 바다로 샜나 본데, 선원들이 수고한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성철득 선장은 ‘선원들이 저렇게 통상 근무 외에 일을 할 경우 선주가 방선하면 엑스트라 보너스(extra bonus)를 준다’고 넌지시 속을 떠보았다.
레오나드 슈니처 사장이 방선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전 선원들에게 엑스트라 보너스라고 1달러씩을 나누어주었다. 성철득 선장이 ‘금액이 얼마인지 얘기를 하지 않고 줘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이렇게 활용했던 것이다. 유태인인 레오나드 사장을 비롯한 슈니처 가문의 사람들이 아주 검약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로즈 에스호에 타고 있는 동안 해양충돌사고를 경험하기도 했다. 1기사로 승선하고 있을 때였으니 1967~1968년 사이였을 것이다. 1기사 당직을 끝내고 올라와서 아침 8시 반쯤 옷을 갈아입는데 ‘쿵’하는 소리가 났다. 당시 로즈 에스호는 미대륙 서부의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환드퓨카(Juan de Fuca) 해협을 항해해 일본 쪽으로 항해 중이었는데 우현에서 상대선이 들이받은 것이다. 그런데 충돌상태에서 상대선이 후진을 하는 바람에 사이드톱 탱크 밸러스트가 로즈 에스호의 우현에 생긴 파공으로 빠져나가 배가 3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바다로 뛰어들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모든 선원 들은 매우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성철득 선장이 퇴선 조치를 내리지 않아 그대로 선박에 머물러있었다. 다행히 충돌해 역이 육상과 가까운 해역이었고, 파공부에서 더 이상 밸러스트수가 새어나가지 않아서 다시 시애틀 쪽으로 배가 기운 채 회항하여 수리소로 향했다. 이 충돌사고 이후에도 2년 가까이 더 로즈 에스호에 승선했다. 昭東은 로즈 에스호에 타는 동안 모은 돈으로 대연동에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昭東이  로즈  에스호에  승선하고 있는  동안  협성해운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당초  협성해운의 해사부에서 담당했던 라스코에의 선원 취업 업무가 1968년에는, 11척으로 늘어나자 왕상은 회장은 이 업무를 분사해주어 1969년 10월 라스코해운이  설립되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왕상은 회장은 협성해운의 해사부의 업무를 분사해 계열사로 라스코해운을 설립한 것이 아니었다. 해사부의 부장을 맡고 있던 김동화에게 회사를 분사해 독립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라스코 해운은 첫 사무실을 중앙대로 29번길 2-3, 현 부산데파트 옆 옛 부산전매청 건물 맞은편 산길다방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왕상은 회장이 김동화 선장을 알게 된 것은 1958년 12월 20일 김동화 선장이 대한해운공사의 군산호(3,800톤) 선장으로 승선 중 묵호 남방 1마일에서 폭풍으로 선박을 좌초시킨 사건 때문이었다.
김동화 선장으로서는 인력으로서는 역부족인 폭풍으로 인한 좌초였다. 군산호는 1953년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현 AID의 전신)자금으로 도입한 선박이었다. 좌초 후 미 해군이 구조를 시도했으나 실패해 좌초 현장에 2년 반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로이즈 대리점을 맡고 있던 협성해운의 왕상은 회장이 김동화 선장의 권리를 보호하는 입장에서 사후 처리를 했고, 김동화 선장을 협성해운 소속 선박에 승선시켰던 것이다.


1959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국제해상보험회사에서는 선체보험금으로 60여만달러를 해운공사에 지급하기로 함과 동시에 해운공사는 군산호의 포기 선체를 보험회사로부터 5만여 달러에 불하받았다. 군산호는 1961년 4월 30일 미극동해상구조대에 의해 이초되어 1억 6,500만환을 들여 대선조선에서 수리를 마치고 1962년 10월 20일 대포리호로 명명되어 재취항하였다.

 

라스코해운의 설립
昭東은 3년 가까이 로즈 에스호에 승선하고 1970년 9월 7일 하선하자마자 새로 설립된 라스코해운의 공무감독으로 육상근무를 시작하였다. 라스코해운은 김동화 사장, 황병도(E5) 공무감독, 昭東, 박해진 감독 그리고 선원과 직원 2명과 여직원 3명 등이 근무하였다.
라스코해운은 1년여간 사업자등록만으로 사업을 영위하던 중 해외개발공사의 선원 해외송출업무를 진행하는 데 법원등기가 필수적이어서 1970년 11월 6일에야 등기를 완료하였다. 이 등기업무를 마무리한 사람이 昭東이었다. 법원 등기 업무를 맡게 된 昭東이 동기생인 김정웅(E8)에게 상의하니 주주명부와 주주총회 회의록만 만들어 신고하면 된다고 해서 김동화 사장이 내어준 미제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며칠만에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였다. 등기업무를 마친 김동화 사장이 미국 라스코쉬핑 본사에 자본금을 청구하게 되었고, 미국 본사에서 이를 지불해 ‘라스코해운’을 독점대리점(exclusive agency)이 아닌 ‘라스코(부산)’이라는 지사(branch office)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경해운이나 대한해운이 산꼬기선이나 재팬 라인에 한국 선원 취업을 알선해주고 수수료를 받은 데 비해, 라스코해운은 해상직원의 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육상직원의 임금과 사무실의 운영비 일체를 라스코쉬핑 본사에서 부담했다.
라스코해운, 즉 라스코(부산)은 라스코(도쿄)처럼 라스코쉬핑의 부산 지사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 라스코쉬핑 본사 차원에서는 용선 등 영업 업무는 라스코(도쿄)에서 하고, 선원 및 선박관리 업무는 라스코(부산)에서 하는 형식으로 운용했다. 따라서 라스코해운은 라스코쉬핑의 부산지사로서 선원 모집, 선원관리, 선용품, 선식, 수리 등 라스코쉬핑의 해사본부 역할을 했다.


라스코해운으로 분사한 1969년 10월부터 1988년까지 라스코쉬핑의 모든 선대에는 한국 선원이 승선하였다. 따라서 라스코해운은 라스코쉬핑의 선대가 이 기간에 9척에서 최대 23척까지 늘어남에 따라 호황을 구가했다. 昭東은 육상의 공무감독으로 일하면서 라스코 선대의 드라이도크와 선박관리를 주로 담당했다.
 그러다 라스코에서 신조선을 인수하게 되었을 때는 기관장으로 직접 승선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1972년 8월부터 11월까지 인수선인 갤럭시MT Galaxy호(2만 8,319총톤)의 기관장으로 정인현 선장과 함께 승선했다. 당시 기관장 월급여는 630달러였다. 갤럭시호는 잔고장이 많아서 막 설립된 현대중공업에서 수리를 받았다. 당시 백충기씨가 부사장으로 있었는데, 해양대학 선배여서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미국 라스코 본사의 공무감독인 보만(Cammirre.E. Baumann)이 선주사 측의 감독으로 와 수리를 감독하며 현대중공업의 영빈관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보먼 씨가 기름때가 묻은 안전화를 신고 영빈관을 출입해 카펫을 더럽혔다. 그러니 청소하시는 분들이 매번 기름때를 닦아내느라 여간 고생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昭東이 보먼 씨에게 실내에 들어올 때는 안전화를 벗고 들어오라고 얘기해 주었다. 보먼 씨가 ‘I’m sorry’를 연발하며 그 다음부터는 신발을 벗고 출입을 했다.
이때가 현대중공업이 막 설립된 초창기였다. 그 뒤인 1975년에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현대미포조선이 설립되면서 라스코 선대의 정기검사나 수리 등은 현대미포조선에서 했다. 정기검사를 위한 드라이도킹을 대체로 3~4일이면 끝이 나지만, 라스코 선대의 선박은 1년에 5척 가까이 입거를 하기 때문에 조선소 측으로부터 VIP 대우를 받았다. 도크 기간에는 외판 샌딩(sanding), 페인팅, 선급검사 등을 하고, 갑판과 기관수리는 선원들이 직접함으로써 선주의 선박정비 비용을 크게 절감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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