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2)

 

들어가며
필자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로서, 기업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회초년생인 필자로서는 ‘자본주의’ 경제라는 용어의 영향이었는지 기업 성패의 첫 단추는 그 기업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 후 50여년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생각은 코페르닉스적인 전환이 불가피하였다. 지금은 기업의 성패는 사람, 특히 그 기업의 최고의사결정권자의 능력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연재에 있어서도 이 점을 항상 고려하고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기 어려웠을 일, 그리고 그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어떻게 풀릴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는 자세를 갖고자 한다. 그 첫 번째 글이 이번에 게재되는 ‘김용주와 대한해운공사의 창립이다.’


김용주는 우리나라 1세대 기업인중 특히 돋보이는 인물로 여러 가지 큰 업적을 남긴분이다. 필자는 한국해운 60년사를 정리하면서 김용주 씨가 한국경제인으로 우뚝 서기 이전의 해방정국에서 한국해운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로서 비교적 탄탄한 국영기업체였던 대한해운공사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해운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조선우선의 인수와 사장에 취임
포항에서 해운업에 종사
김용주는 해방이전의 일제강점기에 포항에서 해운업에 종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대해운회사인 오사카 쇼센(大阪商船)의 포항대리점과 항만하역업, 그리고 포항항에 연계된 창고업과 연안 해운업에 종사하였다고 그의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고, 제법 사업이 잘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8. 15 해방은 김용주에게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포항에서 영위하던 사업을 지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새로운 해방정국에서 할 일을 찾아서 상경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가 상경한 것은 1945년 8월 25일경이었다고 한다.

 

조선우선의 사장 취임
그가 상경하여 우선 착수한 것이 자기가 직접 경영하였기 때문에 잘 아는 사업인 해운업이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주로 일본인들의 자금에 의하여 운영되었던 조선우선에 주목하였다(김용주도 소액이기는 하지만 조선우선의 주주였다). 해방직후 미군정은 미군정법령에 의하여 종전당시 한국수역에 있던 선박과 일본인(개인과 법인포함)의 재산은 모두 국유화하기로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적산(敵産)에 눈독을 들여 서로 앞 다투어 인수하려고 활동하였다. 조선우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조선우선을 인수하려고 덤벼들었다.


한편 미군정에서는 당장 시급한 서울의 연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해안으로부터 무연탄을 운송해오기 위하여 조선우선에게 선박을 확보하여 무연탄을 운송하라면서 6명의 관리위원을 임명하여 조선우선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우선의 운영을 일임하였다. 이 6명의 위원 중 해기사 출신 한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이 얼마간의 돈을 출자하여 고장으로 인천항에 계선 중이던 부산호(조선우선 소속의 당시로서는 유일한 선박)를 수리하여 무연탄 운송에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돈을 출자하기로 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출자를 꺼리므로 결과적으로 필요한 자금 200만원을 김용주가 혼자 출자하였다. 그 결과 관리위원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어 김용주가 조선우선 사장에 취임했고,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이것이 1946년 3월의 일이다. 200만원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바, 혼자 주인도 없고 사실상 국유인 조선우선에 선뜻 출자한 것은 김용주의 경영자로서는 용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부산호의 수리 출항과 침몰
우여곡절 끝에 부산호를 긴급 수리하여 인천에서 출항식을 가졌다. 이때 이 부산호에 게양한 태극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해기사이자, 한말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광제(廣濟)호  함장이었다가 국권을 상실하여 광제호에서 하선하게 된 신순성 함장이 광제호의 함기였던 태극기를 몰래 가지고 나와 집에 가보로 보관하였다가, 그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장 뜻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게양하기 위하여 부산호 출항식에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태극기에 관련된 일화는 다음에 상술하기로 한다. 그러나 부산호는 출항하여 무연탄을 선적하기 위하여 동해안으로 운항하던 중 사고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우선은 사옥만 있고 운항선박은 한척도 없는 빈껍데기 회사가 되었다. 얼마 후에는 해사(海司)국 사무실로 사용한다고 하면서 사옥을 비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군정당국의 지시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좁은 방 하나를 겨우 마련하여 책상만 몇 개 놓고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선박확보에 총매진
우여곡절 끝에 사무실을 되찾았으나  더 시급한 것은 해운회사이므로 선박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방법은 막연하기 짝이 없었지만,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노력하면 불가능도 가능으로 전환할 수 있다. 다음은 선박 한척 없게 된 조선우선이 선박을 확보하여 경영을 정상화하는 과정에 관련된 자료의 요약이다.

(1)미 전표선의 임차
조선우선은 부산호가 침몰하기 전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겨우 배 한 척을 운항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느껴,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미국 정부로부터 1,800톤급 볼틱 형 선박 6척과 약 560톤급의 FS 형 선박 6척을 대여받아 점차 기반을 굳혀 나아갈 수 있었다.

(2)김천호와 이천호의 인수
한편 미 군정청은 당장 시급한 발전용 석탄의 수송을 연합군 사령부 측에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응하여 2차선으로 입항한 선박이 구 조선우선 소속의 김천(金泉)호였다. 김천호는 총톤수 3,082 톤, 재화톤수 4,880톤, 전장 96미터, 출력 2,037마력, 최대속력 13.66노트에 삼연식(三連式) 왕복기관 1기를 장착한 선박으로, 1937년 2월에 하리마(播磨) 조선소에서 진수된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선박이었다. 김천호는 군용으로 징발되어 남방전선의 군수품 운송에 투입되었다가 라바울 해역에서 화물창 1번과 2번 중앙부에 미군 어뢰를 맞아 대파되었으나, 선원들이 응급 처치하여 자력으로 요코스카항에 입항하여 입거(入渠) 수리를 마쳤다. 그러나 김천호는 일본군의 계속적인 패배로 다시 전선에 배선되지 않은 채 일본에서 종전을 맞았다.


김천호가 부산항에 입항하자 구 조선우선 소속이라는 이유로 한국인 선원들이 인도를 요구하였다. 물론 일본인 선장과 선원들은 인도를 거부하고 하선하지 않았지만, 석탄하역을 끝낸 뒤에 출항이 정지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 11월 28일 한국선원들의 요청을 받은 미 고문관 켈프(Kelp) 대위가 일본인 선원을 강제로 하선시키고 접수하였다. 이러한 경위로 인수된 김천호는 본격적으로 삼척 석탄 수송에 취항하였다.


한편 1944년 1월 13일 미쯔비시(三菱) 조선의 와카마쓰(若松) 조선소에서 건조된 2E형 전시표준선(내연기관 탑재)으로 총톤수 875톤급의 NYK(日本郵船株式會社) 소속의 이향보(伊香保)환도, 1945년 9월 25일 인천항에 입항하였다가 미군정 법령 제33호가 공포됨과 동시에 10월에 미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이 선박은 조선우선에 인계된 뒤 이천(伊川)호로 개명되었다.

(3) 구 조선우선 소속 선박의 반환
미군정 법령 제33호가 공포되었지만 전술하였듯 한국 수역에 남아 있던 선박은 부산호가 유일하였다. 구 조선우선 소속 선박의 대부분이 전쟁 중에 징발되어 파손되거나 손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우선은 일본 군부에 징발되었던 선박이 전부 손실되거나 파손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만약 어디엔가 이들 선박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찾아와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본과는 왕래가 두절되어 있던 상태였으나,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뛰어다닌 덕분으로 일본에 약 5∼6 척의 조선우선 선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에 조선우선은 1946년 3월 미 군정청과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선박의 목록과 함께 일본에 있는 잔류 선박의 반환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약 4∼5개월 후에 조선우선은 ‘함경’(咸鏡, 3,204총톤), ‘앵도’(櫻島, 1,281총톤), ‘천광’(天光, 2,221총톤) 및 ‘일진’(日進, 780총톤)호 등 5척이 일본의 어느 항구에 있다는 사실과, 이들 선박을 반환하겠으니 선원을 보내 인수해 가라는 답신을 받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우선 임직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인수단을 편성하고, 곧바로 그들을 일본으로 보내 이 배들을 인수하여 운항을 개시했다.

(4) 침몰선박의 인양
이밖에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 연근해에서 전화(戰禍)로 격침되거나 해난사고로 침몰한 상선을 인양하여 확보한 선박이 몇 척 있었다. 기록으로 전해오는 상선 수만도 215척에 이르고 있다. 이들 선박 가운데 실제로 인양하여 확보된 선박이 안성호(총톤수 883톤, 改E型), 서울호(前 船名 Annet, 총톤수 3039톤, 일본 帝國汽船 소속), 고려호(前 船名 和浦丸, 총톤수 6820톤, 1938년 10월 진수, 三菱汽船 소속) 등이었다.


서울호는 원래 일본 데이고쿠(帝國)기선이 소유하였던 아네트(Annet)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징발되어 군수품 수송에 투입되어 운항 중 전쟁말기인 1945년 8월 10일 군산항에서 기뢰에 부딪쳐 침몰한 선박이다. 이를 1947년 8월에 인양하여 대야(大冶)호로 명명했다가 다시 서울호로 개명한 선박이다. 이 선박은 인양 즉시 부산 대한조선공사로 예인되었으나 당시의 사회적 혼란과 기술 및 자금의 부족으로 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미국 프메로이 사의 기술지원으로 1951년 3월 15일에 수리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임석 하에 준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10). 수리 때 선창의 일부를 연장하여 총톤수는 3,039톤이 되었는데11), 수리비용은 정부 자금으로 이루어져 정부의 소유가 되었으나,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된 이후 대한해운공사에 운항이 위탁되었다. 이밖에 일제 강점기의 조선우선이 부산 조선중공업에서 건조 도중 종전으로 미완인 채 남아 있던 선박이 있었는데, 이 선박을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된 이후인 1951년 4월 11일에 미국원조로 준공하여 한양호로 명명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우선은 김용주가 200만원을 출자하여 부산호를 정상 가동시킬 때, 거의 선박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미군정의 대여선을 포함하여 거의 20여척의 선대를 운항하는 어엿한 해운회사가 되었다. 조선우선을 정상화 시켜 해운회사로 되살린것은 최고 경영자로서의 김용주의 경영능력과 판단, 그리고 끈질긴 추진력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김용주가 돋보이는 것은 일본과의 선박반환에 대한 교섭에서 일본의 외교팀을 압도하는 논리와 추진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일본에서 극동군사령부와 선박반환교섭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아니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 국무성과 직접 담판을 하는 용기와 추진력을 보여준바 있다. 성과는 거의 없었으나, 그 노력의 질과 양으로 볼 때,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위한 도미에 상응하는 정도의 대담하고 적극적인 외교 교섭이었고, 이 노력은 그 후 한일간의 국교정상화 논의시마다 항상 의제가 되어오다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할 때에 일괄타결 방식으로 협정차관 3,000만불을 제공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3,000만불의 차관은 한국해운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이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들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시기 등이 명확하지 아니하고, 기록이 남은 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석연치 않은 점이 있으나, 달리 고증할 자료가 없으므로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러므로 위의 사실들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1952년 정도의 어느 시기엔가 이루어진 것으로 넓게 해석하면 되고, 이 기간은 김용주가 가장 활발하게 선박확보에 나섰던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대한해운공사의 창사와 김용주
대한해운공사 설립의 배경
전술한 바와 같이 김용주가 관리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조선우선은 어려운 가운데 경영이 정상화되었다. 첫해에만 약간의 적자를 냈을 뿐 다음 회계연도부터는 흑자운영을 계속했다. 이에 비하여 부영선박(교통부가 미군으로부터 대여 받아 운영하는 선박 : 지난달 해양한국 참조)은 매년 거대한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고전을 거듭하였다. 그 이유를 설명한 자료가 없으니 알 수 없으나, 부영선박의 경우 ①국영의 특성상 관료적 비능률이 심하였을 것이고, ②국영의 특성상 채산성을 무시한 배선도 때로는 불가피하였을 것이며, ③운영선박이 LST 등 군용으로 적합한 선박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이다. 조선우선의 경우, ①철저한 기업원칙에 충실하였고, ②배선에서는 항상 채산성을 고려하여 운항하였을 것이며, ③전술한바와 같이 미군대여선 이외의 상선들도 확보하여 운영하였으므로 채산성이 높았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전제할 때 조선우선의 최고 경영자인 김용주의 경영능력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경영성과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설립논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모든 행정권이 우리 한국정부로 넘어왔다. 신설된 대한민국 교통부 해운국이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지난 호에 기술한 바와 같이 미군정체제 하에서 해운에 관한 규제 기능 중 핵심기능을 모두 해안경비대를 위시한 타 부처로 이관하였던 것을 다시 찾아와서 해운행정기능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군정시대 해안경비대를 창설할 때는 미국의 코스트 가드(Coast Guard : 해상보안청)를 모델로 하였었음으로 선박이나 선원과 관련된 행정을 해안경비대에서 담당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으나, 대한민국이 출범하면서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기능이 전면 전환되었으므로 행정기능을 다른 소관부처로 이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다른 하나는 해운행정기능을 되찾아오자 규제행정기능과 선박운영기능을 같은 행정 조직 안에 혼재시키기는 어려운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만년 적자로 허덕이는 부영선박을 그대로 운영한다는 것이 교통부장관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고심 끝에 당시 교통부장관이었던 허정은 조선우선의 김용주 사장을 불러 부영선박의 인수를 제안하였다.


이 제안을 받은 김용주는 약간 난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조선우선을 불하받아 운영할 계획을 면밀하게 추진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는 어느 정도 연고권을 가진 사람이면 적산(敵産 :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불하받는 것이 관례화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김용주는 조선우선 불하를 비롯한 운영전반에 관하여 조선우선의 간부들과 긴밀하게 협의해 왔다. 이 문제도 김용주는 사내간부들과 긴밀하게 협의한 후 보다 큰 공익을 위하여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는 결단을 내리고 반관반민의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의 설립제안을 수락하여 대한해운공사법을 제정한 후 1950년 1월 1일 대한해운공사가 창사되었다. 이 김용주의 결단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김용주가 이 문제를 자기 회사의 간부들과 긴밀하게 협의하였다는 것은 바로 그의 기업경영 자세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한 조선우선의 흑자경영도 사장이하 사원들의 일치단결된 경영 자세에서 비롯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해운공사 설립의 의의와 보유선박량
대한해운공사는 창립이후 해운인재 양성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한국해양대학이 교실에서 이론중심의 해운인력을 양성했다면, 대한해운공사는 대학에서 양성된 인재들을 실무에 적응시켜 유능한 해기인력으로 키워내는 동시에, 경영기법을 개발하여 해운경영 전문인으로 양성하였다.


회사의 창립과 함께 대한해운공사는 교통부 직영선박을 인수함으로써 보유선박은 27척에 총톤수 3만 7,496톤(중량톤수 4만 8,907톤)에 달했다. 이 가운데 사선은 5척에 총톤수 1만 645톤, 정부의 대여선박은 9척에 총톤수 1만 2,474톤, 그리고 조선우선이 미국으로부터 직접 대여받은 선박은 12척에 총톤수 1만 4,564톤이었다. 그리고 교통부 해운국의 운항과 직원을 일부 수용해서 종업원 수는 선원을 비롯한 해상직원이 1,912명, 육상직원이 460명으로, 기구개편과 함께 국영해운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즉 대한해운공사는 1949년 12월부터 교통부 직영선박을 운항하고 있었던 교통부 소속의 선원들을 인수했는데, 실제로 점검 해보니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선원들의 숫자가 수백 명에 달해 부영선박 운영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에 대하여 과거는 일체 불문에 붙이기로 하고 일부만을 정리하고 대부분을 대한해운공사가 수용하여 재배치하였다.

 

김용주 사장의 주일공사 겸임
이 글을 정리하면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대한해운공사의 초대 사장인 김용주가 1950년 3월에 주일(駐日)공사(公使)로 부임하여 해공사장과 겸임한 일이다. 대한해운공사가 출범한 지 불과 두어 달 후의 일이다. 그것도 주 업무가 주일공사 업무로 일본 주재가 원칙이었고, 공무상 귀국할 때에 회사에 한 번씩 둘러보는 식이었다. 이러한 정부인사는 전무후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해운관련 글들은 이 김용주의 주일 공사 겸임은 해운이외의 일로 보고, 사실만 한줄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주관하여 정리한 한국해운60년사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 글을 정리하면서 “왜 그랬을까?” 를 곰곰이 생각한 끝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해방 후 1950년대 말까지 해운계의 가장 큰 숙원과제의 하나는 해방을 전후하여 조선우선 소유선박을 위시한 한국 치적선들 중 상당수가 전쟁에 징발되었고 일부선박은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타고 가서 돌려주지 아니하였다. 이들 선박은 미 군정법령에 의하여 당연히 한국에 귀속되는 재산이므로 돌려주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돌려주지 아니하였고, 이것을 돌려받는 것이 해방 후 1950년대 초까지 한국해운계의 가장 큰 과제였다. 또 이 과제는 한국해운을 실질적으로 대표하고 가장 이해관계가 큰 조선우선과 이를 이은 대한해운공사의 과제이기도 하였다. 이 일은 또 정부일이기도 한 동시에 대한해운공사 설립 후에도 계속해서 추진해야할 중요한 과제였다.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면서 과거 조선우선 때와는 달리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일본이나 미 극동군 사령부를 상대로 선박반환 교섭을 추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선우선과는 달리 대한해운공사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추진해온 경과나 능력으로 보아 김용주 만한 새로운 사람을 선정하여 이 일을 전담시킬 형편도 못되는 상황이므로 김용주에게 주일공사라는 직함을 주어 선박반환교섭을 정부를 대표하여 계속하게 하는 동시에, 관련된 다른 일들도 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그를 주일공사로 임명한 것은 우리나라를 위하여 퍽 다행한 일이 되었다. 그가 주일공사로 부임한 얼마 후 한반도에서 6. 25가 발발하였고, 미국, 특히 일본에 주재하는 미 극동군 사령부, 그리고 일본정부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외교전의 전개가 불가피하였는데, 능력 있고 판단력이 확실한 김용주가 그 일을 능히 감당하였을 것이다. 그가 주일공사에 재임 중 공사(公使) 업무 수행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적을 나타냈지만 해운에 관련된 업적도 많다. 그 중의 하나가 극동해운의 남궁련이 인양하여, 수리 운영하게 된 고려호의 수리자금 조달에 이승만 대통령의 결재가 필요할 때 그에게 건의하여 성사시킨 사실이 그의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용주, 그리고 퇴임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과 김용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김용주가 경제 활동에 전념하였고, 정치에 발을 들여 놓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동지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업무상의 관계로 서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도 다름 아닌 선박반환 교섭과 관련된 것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대통령은 재임 중 대외업무와 외환관련 업무는 거의 직접 다 챙기다시피하였다. 선박반환교섭을 위해서는  외교교섭, 그것도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던 미 극동군 사령부와의 교섭이 주 업무였을 것인데, 이 대통령은 미 극동군 사령부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또 선박반환교섭과 일부성과를 거두어 반환받을 때 등에 귀중한 외화를 사용하여야 하는데 이것도 이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이대통령과 김용주 사장 간의 긴밀한 업무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김용주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승만대통령에 대하여 세간의 억측과는 달리 만나서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설명할 경우,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여 주는 아주 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중간에 낄 경우, 커뮤니케이션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오해를 살 소지도 많은 사람이었다. 바로 김용주 사장의 대한해운공사 사장직 퇴임도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것이다.


당시 경무대에는 ‘비노꼬’라는 프랑스 사람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해공 사장실을 찾아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미국전표선 2척이 있는데 샌프란시스코에 주재하는 주씨 성의 영사가 이 배를 120만불씩에 구입하기로 하였으니 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용주 사장은 이를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이유는 이와 같은 전표선은 일본에서도 많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척당 70만불이면 살 수 있었다. 스웨덴에서 살 경우, 한국까지 회항비용이 들어가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척당 140만불이 소요된다.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기업가라면 이것을 매입할 리가 없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용주는 다시는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얼마 후인 1952년 3월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을 퇴임하여야 하였다. 그리고 후임사장에 의하여 문제의 이 선박은 도입되었다. 합리적인 설명에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던 이승만대통령과도 중간에 이상한 사람이 낄 때 이렇게 허무한 결론으로 유도된다.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고개를 끄떡일 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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