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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의 제주인식과 그 문명사적 접촉
[566호] 2020년 11월 03일 (화) 13:54:22 오상학 (제주대학교 박물관장) komares@chol.com

이 원고는 10월 8일 국립제주박물관과 국립해양박물관이 공동으로 주최한 국내학술대회 ‘해양제주, 그 문명사적 성찰’에서 발표된 주제중 하나로 필자와 협의을 통해 발표내용을 전재한다.  -편집자-

 

미지의 세계: 도적섬
서양에서 제주의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세기 이후이다. 이 시기 서양과 동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인식하게 되고 지도에도 제주가 한반도의 끝 부분에 그려진다. 그런데 이 시기 제작된 몇몇 지도에는 남해안과 제주도에 해당하는 곳에 포르투갈어로 ‘도적섬(Ilhas dos Ladrones)’이라 표기되어 있다. 1595년 테이세라가 그린 일본 지도가 대표적이다. 원래 ‘도적섬’이라는 명칭은 마젤란이 1521년 필리핀 동쪽 해상에 있는 지금의 마리아나 제도를 발견하고 붙인 이름인데, 당시 동아시아 지역을 항해했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대마도 일대 해상에서 출몰하는 해적 이야기를 듣고 이를 경계하고자 ‘도적섬’이라는 지명을 붙였다.

 

   
그림 1. 테이세라의 일본도(1595년,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의 무대’ 제5판에 수록됨)
   
그림 2. 세부도

 

인식의 혼란: 풍마도
이후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제주는 ‘풍마도(I. Fungma, Fongma)’로 표기된다. 풍마도는 1655년 중국에 선교사로 왔던 마르띠니의 ‘중국지도첩’에 처음 등장한다. 마르띠니는 1643년 중국에 도착하여 1650년까지 체류하면서 포교활동과 더불어 중국의 지리를 연구했다. 나홍선의 ‘광여도’와 주사본의 중국지도를 입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르띠니는 중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럽에 머무는 동안 중국지도를 제작하였다. 그는 블라우 가문의 요안 블라우(Joan Blaeu)와 함께 1655년 ‘중국지도첩(Novas Atlas Sinensis)’을 간행했다. 여기에 수록된 중국전도에 한국이 분명하게 반도국으로 표현되어 있고, 제주도는 풍마도(I. Fungma)로 표기되었다.


서양인이 명명한 ‘풍마도’는 당시 지식 정보의 네트워크를 고려한다면 중국 지도의 지명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I. Fungma’의 유래에 대해 기존의 연구에서는 제주도가 목마장으로 명성이 있어서 풍마가 ‘豊馬’에서, 또는 바람과 말이 많은 지역 특성을 반영한 ‘風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실증 자료는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중국의 고지도 가운데 한반도 동남쪽에 ‘鳳馬島’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볼 때 ‘I. Fungma’는 이 ‘봉마도’를 알파벳으로 표기하여 제주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3. 마르띠니의 중국전도(1655년,
 서울역사박물관)
   
그림 4. 세부도

 

1686년(강희 25)에 간행된 ‘증정광여기(增訂廣輿記)’에 ‘천하지여전도(天下地輿全圖)’가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 전도가 들어가 있다. 지도의 제목은 ‘대청일통전도(大淸一統全圖)’로 되어 있고 중국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그려진 지도이다. 지도의 한반도 동남쪽에는 섬이 크게 그려져 있고 ‘鳳馬島’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위치로 볼 때 제주도보다는 대마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남해안에 여러 섬이 작게 그려져 있으나 제주도는 보이지 않는다. 마르띠니는 이러한 유형의 지도를 참고하여 중국전도를 그렸는데, 봉마도를 대마도가 아닌 제주도로 인식하여 표현한 것이다.

 

제주 인식의 획기: 켈파트
17세기에는 ‘풍마도’와 더불어 ‘켈파트(Quelpart)’가 등장한다. 켈파트라는 명칭은 네덜란드의 연합동인도회사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1630년경 동인도 회사에서 선폭이 좁고 긴 갤리선을 제작하였는데, 이 배의 이름이 켈파트였다. 1642년경 이 선박은 일본을 향해 항해하다가 제주도를 발견하고, 배의 이름을 따서 그 섬을 켈파트라 명명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보고했다. 켈파트라는 지명은 이후 동인도회사의 보고서와 해도에 수록되었는데, 1649년 네덜란드의 블라우는 양피지에 자바에서 일본 큐슈에 이르는 지역의 해도를 그렸는데, 이 지도의 일본 Cikoko(큐슈 지역) 서쪽 해상에 마름모꼴로 켈파트라는 섬을 그려 넣었다. 이 지도는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켈파트가 표현된 최초의 지도가 된다.


블라우의 해도에 처음으로 그려진 켈파트는 1655년 마르티니와 공동으로 제작한 ‘신중국지도첩’의 일본지도에도 반영된다. 지도에는 지금의 큐슈의 서쪽, 한반도의 남쪽 위도 33도 근처에 마름모의 형태로 섬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1649년의 해도와는 달리 켈파트라는 지명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남해안에 제주도에 해당하는 풍마와 또 다른 제주도인 켈파트를 동시에 그린 최초의 지도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실측 자료와 비실측 자료가 서로 혼재되어 제주도가 표현된 것이다.
한편 1653년 제주에 도착한 하멜은 이전부터 켈파트라는 섬을 알고 있었고, 일등항해사의 관측에 의해 그들이 도착한 곳이 켈파트임을 확인했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하멜보고서를 바탕으로 1668년 ‘하멜표류기’로 출간되면서 서양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제주도는 서양에서 켈파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 켈파트라는 지명은 이후 네덜란드 해도에 표기되었고 프랑스의 지도에도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하멜표류기’를 통한 제주 인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드 페르(N. de Fer)가 1705년에 만든 아시아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제주도를 풍마(I. Fungma)와 켈파트(I. Quelpaerts)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mogan’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목안’은 ‘하멜표류기’에 나타나는 지명으로 제주목의 읍치를 당시 ‘목안’이라 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목안, 또는 성안이라는 지명이 제주에 내려온다.
8월 22일 아침 무렵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요새를 향해 가다가 아침을 먹었다. 그곳에는 전함 두 대가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 목간(Moggan. 목안) 이라는 도시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은 그 섬을 다스리는 목사의 관저가 있는 곳으로, 그들은 주지사를 목소(Mocxo. 목사)라고 불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우리를 관청 앞마당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마실 수 있는 죽을 주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마시는 마지막 음식이며 우리가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무기와 복장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무장한 병사 약 3,000명이 중국 혹은 일본식 의상을 입고서 있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했었다.3)


제주 지명으로 켈파트가 정착되면서 제주도를 풍마와 켈파트 두 개의 섬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나타나는데, 당빌의 ‘중국령달단지도’에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당빌은 서양 선교사 레지에 의해 중국에서 들여온 ‘황여전람도’를 바탕으로 1932년 ‘중국령달단전도’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에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제주도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제주도의 세 고을인 제주, 대정, 정의의 중국 발음을 음차한 ‘Ki-tcheou’ ‘Te-tching’ ‘Chan-y’ 등의 최신 지명과 함께 ‘Fong-ma’가 표기되어 있다. 아울러 한반도 남쪽 해상에 네덜란드 지도를 참고한 켈파트 섬을 그려 넣었다. 이 지도는 1735년 뒤 알드의 ‘중국지지’, 1737년의 당빌의 ‘신중국지도첩’에 수록되면서 이후 지도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전도라 할 수 있는 당빌의 ‘조선왕국전도’에는 풍마가 표기된 섬만이 있고 켈파트는 빠져 있다.
풍마와 켈파트라는 2개의 제주도 인식은 이후 영국이나 프랑스 지도에 반영되고 1797년 라 페루즈의 항해지도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의 한국 근해 탐사도를 보면 남해안의 윤곽이 보다 정교해졌고 제주도와 울릉도의 실측 결과가 지도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남해안의 해안선 윤곽이 기존의 지도보다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남해안의 섬의 형태는 당빌의 ‘중국령달단전도’의 것과 유사하여 이를 바탕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동남쪽의 제주도가 ‘중국령달단전도’에서처럼 Fongma로 표기했고 남해안의 중간 지점에 새롭게 측량하여 보다 정교해진 Quelpaert를 그려 넣었다.

 

켈파트에서 제주로
19세기 중반 벨처의 탐험과 같은 실제 탐사의 결과 제주도의 정확한 위치, 면적 등이 알려지면서 이전의 풍마도와 당빌의 지도에 수록된  ‘Ki-tcheou’ ‘Te-tching’ ‘Chan-y’ 등은 사라지고 켈파트 하나의 섬으로 표현된다.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 1799-1877)는 영국 해군으로 세계 각지의 해안선 측량에 참가했으며 1843년 1월에는 사마랑(Samarang)호를 이끌고 중국의 개항장에 이르는 항로를 정밀 탐사하였다. 그는 홍콩, 유구, 제주도, 일본, 필리핀 등을 조사하고 1846년 영국으로 돌아와 ‘사마랑호 항해기’를 출간하였다. 제주도에는 1845년 6월 25일에 도착하여 우도를 기지로 삼아 약 37일 동안 제주도와 거문도, 거금도 일대를 정밀 측량하고 중국인을 통역으로 대동하여 정의현의 조선인과 의사 소통하였다. 그는 제주도 해안선을 정밀 측량하고 한라산의 높이를 1,995m로 계산해 내기도 했다. 한라산의 높이를 정확하게 측정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그가 그린 지도를 보면 제주도의 해안선 윤곽이 실제와 거의 흡사하다. 제주도는 여전히 켈파트(Quelpart)로 표기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서 보기 힘든 한라산이 그려져 있는데, ‘Mt. Auckland’로 표기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는 제주의 이미지가 더욱 정교해진다. 프랑스 육군 지리조사부에서 제작한 제주도의 지도를 보면 제주도의 지명은 여전히 켈파트섬(QUEL
PART ISLAND)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제주, 대정, 정의의 세 고을 명칭이 표기되어 있고, 한라산도 ‘Mt Auckland’와 더불어 ‘Hal-la-San’이라는 고유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확립된 켈파트 지명은 20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제주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의 ‘제주도(I. Cheju)’는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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