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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선 자본주의’
[566호] 2020년 11월 03일 (화) 13:33:18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showload@chol.com

10월에도 콤파스의 문을 열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낮춰졌지만, 아직 불안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이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글릭의 시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목소리로 인간의 실존을 보편적으로 나타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희망과 비통, 열정과 침묵, 생명과 죽음, 계절을 순환하는 태양과 대지의 질서를 다룬 유려한 장시 글릭의 ‘시월’을 싣는다.

 

시월
1. 다시 겨울인가, 다시 추워지는가, 프랭크가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진 않았나, 그가 치유되지 않았나, 봄의 씨앗들이 심기지 않았나 밤이 지나가지 않았나, 얼음이 녹으며 내 몸은 낫지 않았나, 안전해진 것이 아니었나? 상처 위에 보이지 않는, 흉터가 생긴 것 아닌가 무섭고 춥구나, 이제 다 마친 것은 아닌가, 뒤뜰에 땅을 고르고 씨를 심지 않았냔 말이다. 붉게 굳은, 땅의 감촉을 기억하는데, 빽빽이 지어진 이랑에, 씨앗이 심어지지 않았나, 덩굴이 남쪽 벽을 타고 오르지 않았나 맨땅 위에 거센소리로 울리는, 바람의 울부짖음 탓에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이제 관심 없다. 나는 언제 침묵에 빠져, 그 소리를 묘사하는 것이 처음으로 무의미해 보이게 되었는가 바꿀 수 없는 무언가로 들리는 그것은 무엇인가. 밤이 지나가지 않았나, 씨가 심어질 때 땅은 안전한 게 아니었나 우리가 씨를 심지 않았나? 우리가 땅에 꼭 필요한 게 아니었나? 넝쿨이, 수확된 게 아니었나?


2. 두 번의 여름이 지났다, 폭력 이후의 안락. 지금 잘되어 가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폭력이 나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동이 튼다, 낮은 언덕이 황토색 불빛으로 빛나고, 이윽고 들판까지 빛난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안다, 태양은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 8월의 태양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이 목소리가 들리는가? 이건 내 마음의 목소리다. 그대는 내 몸속에 손댈 수 없다. 이미 바뀌어 응어리진 그것에 다시 응답할 것을 요구하지 말라. 여느 여름의 하루 같은 날, 유난히 조용했던 날, 단풍의 긴 그림자가 자갈길을 거의 연보랏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저녁은 따뜻했다. 여름의 여느 밤과 같은 밤.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폭력이 나를 변화시켰다. 내 몸은 벌거벗은 들판처럼 차가워졌다. 이제 시험받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고 경계하는 내 마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한번, 여느 여름처럼 해가 뜬다. 보상금, 폭력 이후의 안락, 들판이 수확되고 전복된 후의 잎이 변한 후의 안락. 이게 미래라고 말해줘, 너를 믿지 않을테니,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줘, 너를 믿지 않을테니.


3. 눈이 내렸다. 열린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생각난다. 내게로 와, 세상이 말했다. 그것이 정확한 문장으로 말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그 자태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해가 뜬다. 각각의 생명을 덮는 촉촉한 막, 배수로에 고인 차가운 빛의 웅덩이. 나는 그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이, 문간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술에서 찾은 것을 나는 자연에서 찾았다. 다른 사람들이 인간의 사랑에서 찾은 것을, 나는 자연에서 찾았다.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없었다. 겨울이 끝났다. 해동된 흙 속에서 녹색이 점점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게로 와, 세상이 말했다. 나는 모직 코트를 입고, 밝은 현관에 서 있었다.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다. 오래전, 그게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아름다움, 치유자, 스승.


4. 빛살이 변했다. 기본음은 이제 더 어둡게 조율되었다. 그리고 아침의 노래가 다시 시연된다. 이것이 가을의 빛이지, 몸의 빛이 아니다. 가을의 빛이 온다. 그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노래는 변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침입했다. 이것은 가을의 빛이지, 이렇게 말하는 빛이 아니다. 내가 다시 태어났다고. 봄의 여명이 아니다. 나는 혹사되고, 시달리고, 폐기되었다. 이것이 지금 일어나는, 황폐의 우화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그럼에도, 운 좋은 자여, 그대의 안에서는 이상이 열병처럼 불타오르는구나. 혹은 열병이 아니라 두 번째 심장인지도 모른다. 노래는 변했지만, 참으로 말하건대 아직도 지극히 아름답구나. 그것은 더 작은 공간에, 마음의 공간에 모여들었다. 그것은 지금, 쓸쓸함과 고뇌로 어두운 빛을 띤다. 그러나 음조는 순환한다. 적막을 내다보며 기묘하게 맴돈다. 귀가 그에 익숙해진다. 눈이 그 상실에 익숙해진다. 그대는 살아남지 못하고, 그대가 사랑하는 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 마음을 산산조각내며, 바람이 왔다가 떠나고 기묘한 평정심을 흔적으로 남겼다. 사랑하는 것에 열렬히 매달리다니, 그대는 어찌나 운이 좋은가. 희망을 빼앗겨도 그대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거장의, 비통한 음조로 이것이 바로 가을의 빛이고, 이제 우리를 비춘다. 확실히 최후에 다다르면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운이 좋다.


5. 세상에 아름다움이 충분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내가 그것을 되돌릴 능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솔직한 말이 아니며, 나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묵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냉담한 세상의 비애가 우리를 양쪽에서 에워싸고, 나무가 늘어선 골목에, 우리는 여기 함께, 아무 말도 없이 각자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 뒤에는, 철제 사저들이 대문과 덧문이 닫힌 방들이 왠지 버려지고, 마치 예술가의 의무가 희망을 창조하는 듯,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대체? 말 자체는 거짓이다, 인지를 거부하기 위한 장치이다. 교차로에 선, 이 계절의 장식용 조명이다. 여기서 나는 어렸다. 나의 작은 책을 안고 지하철을 타고 마치 나 자신을 지키려는 듯 하나의 세계로부터, 어두운 터널 안에서 시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냐.


6. 밝았던 그 날은 점점 그 밤처럼 어두워지고, 불은 거울이 된다. 내 친구 대지는 쓰라리다. 햇빛이 그녀를 저버렸겠지, 쓰라린지 지쳤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녀 자신과 태양 사이에, 무언가는 끝이 났다. 지금, 그녀는 혼자 남겨지기 원한다. 우리는 그녀가 대지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들판 위로, 마을의 집들의 지붕 위로, 모든 생명을 가능케 했던 광명이 식은 별로 변한다. 가만히 누워서 지켜보라. 그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지의 내부로부터의 쓰라린 치욕과 냉혹함, 불모 나의 친구 달이 뜬다. 그녀는 오늘 밤 아름답지만, 언제 아름답지 않은 적이 있었나? 


자본주의 진화론이라는 말에 흥미를 느껴 읽어 내려간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홀로선 자본주의(Capitalism Alone)’. 이 책은 “자본주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화두로 던지며, 전통적 자본주의에서 사회민주주주의를 거쳐 오늘에 이른 서구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의 진화과정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우리 모두 자본주의자며, 어떤 자본주의로 갈지 이 시대는 엄중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 연구의 세계적 석학 밀라노비치 뉴욕시립대 교수는 봉건제와 공산주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본주의를 조망한 후, 공정한 세상을 위해 자본주의가 유일한 해답인지 묻고, 희망적이지 않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본주의에도 오류가 있지만, 장점이 더 많아 지금까지 번영했다며, 하지만 드러난 단점은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하는 한편, 자본주의의 공공연한 문제인 불평등을 해결할 새롭고 흥미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변화의 운명 앞에 선 자본주의
홀로 남은 사상과 철학은 위기에 처한다. 성찰의 거울을 잃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잃어간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분노와 광기 그리고 냉소가 세계 정치현장에 차고 넘쳐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냉전 이후 홀로 선 자본주의도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사라졌다. 피스톨 자본주의,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냉소적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며, 미래에 살아남을 것인가 자가진단해야 한다. 시대를 관찰하는 일은 지식인의 숙명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는 내부 분화가 시작됐다. 하나는 성과주의적 자유자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자본주의다. 자유자본주의는 서구의 전통 위에 명맥이 이어진 양식이며, 국가자본주의는 서구 지역 밖으로 전이되어 변용된 양식이다. 전자를 미국이 대표한다면, 후자는 중국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체제의 변용이며, 시장적 사회주의(market socialism)라는 독특한 수렴의 현재적 모습이다.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사회적 불평등 심화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키웠다는 근원적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소생 가능하여 점차 대중적 자본주의로 진화할 것이다. 핵심은 특정 집단이 자본과 정치권력을 과밀하게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장치를 마련하고 공유하는 것이며, ‘홀로선 자본주의’의 건강한 진화 방향이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회경제 체제다. 중국도 의심할 바 없는 자본주의 체제이며, 100년 전 막스 베버가 창안한 국가자본주의 국가다. 자유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두 체제는 자본주의라는 동일한 생산방식임에도 세계 확산을 위해 서로 경쟁한다. 국제사회의 특이한 존재인 북한은 중국처럼 국가자본주의 체제 국가가 되더라도 국제정치적 현안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한반도 통일은 독일의 통일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며, 세계적 의제에서 제외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구에서 유일한 사회경제 체제는 자본주의다. 성공은 더 나은 경제적 조건과 윤택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태생적 욕구다. 이런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빚어진 사회화의 산물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어떤 사회체제에서도 안정화를 위한 필요조건을 마련하는데 가장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상은 민주주의와 법치라는 절대적 가치체계에 반한다. 민주와 법치체제가 스스로 영속하는 상류층을 형성하고 엘리트와 여타 사람들을 갈라놓는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런 움직임은 자유자본주의의 장기적 생존력을 위협하는 중대한 요인이다. 따라서 소득 불평등과 계층간 갈등구조를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 두 체제의 상대적 매력과 안정성이 결정될 것이다.

 

자유성과적 자본주의와 불평등
마르크스와 베버의 해석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생산이 민간 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자본은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고용하며, 조직체계는 분권화되어 있다. 여기에 슘페터가 언급한 자본주의의 필요조건을 추가하면, 민간기업이나 개인기업가가 대부분의 투자를 결정한다. 성과주의적 평등은 직업이 능력에 따라 열려 있어, 개인이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는데 방해되는 어떤 법적 장애물도 없다는 뜻이다.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19세기 고전적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특징을 비교함으로써 잘 이해할 수 있다.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 원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10여년 전부터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두드러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국민소득의 70%가 노동분야에서 나오고 나머지 30%는 자본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통념이었다, 자본소득 비율이 증가할수록 불평등이 심화한다. 부자들의 자본비율이 늘어나면 이에 비례하여 소득이 늘고 불평등도 커진다. 따라서 국가가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불평등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는 호모플루티아는 동일한 가구 안에 높은 자본소득과 높은 노동소득이 결합하여 있다는 의미다. 호모플루티아의 종착지는 고소득 자본가와 노동소득자가 동일인일 때 도달하며 이런 상응관계는 불평등을 가중시킨다. 만약 양질의 교육을 받아 고도로 숙련된 부유한 사람들끼리만 결혼한다면 그 자체가 불평등 요인이 된다. 아메리칸 드림은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이었다. 이는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념이다. 부의 대물림과 관련하여 부자의 자녀는 더 많은 상속이 기대될 뿐 아니라 부모를 통해 더 나은 교육과 사회적 자본, 그리고 부가 가져다주는 무형의 많은 혜택이 주어지나 가난한 사람의 자녀에게는 이런 혜택 가운데 어느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듯 세대간 절대 이동성은 세대간 상대적 이동성의 완전한 결핍을 낳을 것이다. 세대간의 연관성이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상대적 이동성은 경제의 제도적 특징을 더 잘 반영한다.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사회정책
2차 세계대전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부유한 나라의 소득 불평등은 계속 감소했다. 이는 4가지 핵심축에 의존하는데 강력한 노동조합, 대중교육, 높은 세금 그리고 대규모 정부 이전이다. 그후 40년 동안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였음에도 이를 막기 위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상류층의 지속 가능성 때문이다. 정치권력은 경제력이나 부의 소유에서 비롯된다. 미국 의회의 구성원들은 중산층과 빈곤층을 위한 중요 정책보다 부자들의 관심사를 토론하고 투표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중산층 관련 정책이나 현안들은 번번이 뒤로 밀려났다. 이렇듯 권력과 부의 결속, 교육의 양극화, 상속 재산으로 인한 불평등은 이제 오를 수 없는 나무로 전락했다. 하나의 사회구조 안에서도 엘리트 계층은 각기 다른 기준에 따라 형성되어 자신들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한다.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상류층의 순소득 대비 자본점유율 상승과 지속가능을 보장한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자본소유권 집중을 완화하여 개인의 불평등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 중산층이 더 많은 주식과 채권을 보유하도록 장려하고, 소액 투자자를 위한 세금혜택 제도를 도입하며, 정부가 보증하는 보증보험제도를 통해 변동성을 낮추고, 투자에 대한 안정성을 강화할 수 있다. 또한 자본집중을 줄이기 위해 종업원지주제도나 종업원의 주식보유를 권장하는 회사 차원의 우대책을 통해 노동자의 자본소유권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법적 규정은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이미 갖추고 있고,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도 국민자본주의를 제안했다. 존 롤스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려면 삶에서 동등한 지위를 얻는데 그 어떤 법적 제약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경제 사회적 계급과 관계없이 동등한 정치적 자유를 갖는다. 이것이 롤스가 제시한 천부적 자유체제 또는 성과적 자본주의 체제다.

 

국가자본주의의 부상
세계사 특히 현대사에서 마르크스 사상과 공산주의 역사를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역사에서 이루고자 하는 인류진화의 정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서 헤겔, 프랜시스 후쿠야마까지 모든 역사 이론은 사회변화를 이루는 법칙에 따라 정치경제 사회적 제도의 흥망성쇠를 드러내보여준다. 러시아 철학자 베르다예프는 이를 아테네와 예루살렘 두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아테네 유형은 단순히 주기적으로 바뀌는 순환법칙이고, 예루살렘 유형은 더 높은 상태로 진화하는 목적론적 법칙이다. 사회진화는 무작위적이지도 주기적이지도 않다. 만약 자유와 폭정 사이에 주기적 변동이 있다거나 플라톤의 4대 순환인 명예지상정치(timocracy), 과두정치, 민주정치, 참주정치 사이에 주기적 변동이 있다고 믿는다면, 공산주의를 발전순환의 질서 안에 두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목적론적 관점을 취할 때는 상황이 복잡해진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인류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로 보며,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사회로 여기는 까닭이다. 현재 사회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자본주의로 탈바꿈했거나 중국과 베트남처럼 자본주의로 진화하면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제성장 기록은 세계 최고에 속하며, 중국이 최근에 달성한 기록은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이런 진화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주의는 가난한 나라보다 부유한 나라에서 경제적으로 덜 성공적이었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잘사는 서구 국가가 아닌 러시아 같은 주변국에서 비롯됐지만, 만약 사회주의가 서유럽에 적용됐다면 동유럽보다 훨씬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목적론을 단순 적용하면 부유한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의 실적과 소득 수준을 상대국과 비교하면, 가난한 나라는 중앙집중계획의 이점을 보았으나 부유한 사회주의 국가는 시장 부재로 인해 장기적 성장률이 자본주의 국가보다 낮았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인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베버의 정의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의 조건은 대부분의 생산을 개인소유 생산수단으로 수행하고, 노동자가 임금노동자여야 하며, 생산과 가격에 대한 결정이 분권형 방식이어야 하는데, 중국은 세 조건 모두에서 분명 자본주의에 속한다. 베버는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정치적 동기에 따른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정치적 동기에 따른 자본주의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의 ‘경제와 사회’에서 “국가자본주의는 조세징수 도급, 정치적 필요에 따른 국가의 수익성 공급, 전쟁, 해적행위, 고리대금업, 식민지 개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했다”고도 말했다. 그런 뜻에서 중국의 덩샤오핑은 국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연착륙을 설계한 탁월한 지도자요 현대 국가자본주의의 창시자였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사회적 합의의 핵심 부분은 부패로 인해 관료주의와 정책수행 능력이 약화할 때 깨진다. 부정부패가 극심한 환경에서는 높은 성장이 유지될 수 없고, 행정의 공정성도 과시적 소비도 억제할 수 없다. 국가자본주의의 생존력은 두 가지 능력에 달려 있다. 첫째, 국가가 경제활동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능력이며, 둘째, 비즈니스 이익뿐만 아니라 국익이 되도록 결정할 수 있는 부패하지 않은 중앙집권화된 중추 기능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혁명투쟁으로 중앙집중화를 이룬 중국의 정치체제가 감내할만한 수준의 부패와 불평등을 안고 가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세계화로 얻는 자와 잃는 자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자본과 노동에 미치는 주요 특징은 이동성이다. 세계화는 넓은 의미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이동을 의미하며, 글로벌 가치사슬을 통해 실현된다. 최근 들어 노동 역시 이동성이 높아졌다. 노동의 이동성은 임금격차에 대한 반응이며, 시민권 프리미엄과 시민권 페널티로 귀결된다. 시민권은 경제적 자산이며 시장성이 있다. 국가 간의 평균소득이 불균등한 상태에서 세계화가 전개될 때, 생산의 한 요소인 노동이 이동하는 것으로 이민을 정의할 수 있다. 노동 또는 노동력은 생산의 한 요소일 뿐 자본과 다르지 않다. 세계화는 노동의 이동을 촉진한다. 세계화가 나타나더라도 나라 간에 소득격차가 크지 않으면 노동의 이동을 유인할 동기가 없어진다. 자본은 극적 변화를 주지 않고 사회에 진입할 수 있지만, 노동은 그럴 수 없다. 문화적 충격을 상대국에 준다. 이주민들은 자국의 가치체계를 자신 안에 지니고 다닌다고 사회학자 보르자스가 말했다. 이민을 한 명도 받아들이지 않는 제로 이민은 경제적 관점에서 비효율적이며, 세계적 빈곤과 불평등 해소에도 유용하지 않다. 각기 다른 범주의 이민자에게 차등적 권리를 부여하는 방법도 이상적인 해결책은 아니며, 이민자에 대해 차별대우하는 순환이민제 역시 단점이 많다.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이민통로가 열려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민에 대한 수요곡선의 최적 지점은 의미가 없어진다.


경제학자 볼드윈은 글로벌 공급 가치사슬에 제대로 올라탄 국가만이 발전을 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런 국가로 중국, 한국, 인도, 폴란드를 꼽았다. 글로벌 가치사슬은 서로 다른 생산단계가 다른 나라에 위치하도록 생산을 조직하는 방법이다. 이는 세계화시대에 가장 중요한 조직혁신으로, 이 사슬은 먼 곳에서 생산공정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술력과 상대국의 재산권 존중을 통해 가능해졌다. 과거엔 이것이 미흡하여 자본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부도덕성과 행복추구
초상업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부도덕성을 낳는다. 자본주의에는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이 있다. 선진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많은 거래에는 은밀한 의도와 금전적인 동기가 있으며, 이런 동기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적 의미의 거래는 실패한다. 순수 상업사회의 계층 구조는 오로지 금전적인 성공에 바탕을 둔다. 돈은 위대한 평등장치다. 상업사회는 그런 돈이 만들어내는 힘의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게다가 돈은 성별, 성적 취향, 장애 정도, 인종이 각기 다른 사람에게 점진적인 기회의 평등화를 가져다준다. 사회계층 구조가 오로지 부에 따라 결정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부를 축적하는데 집중한다. 베버가 정의한 이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행위는 자본주의의 주요 사회학적 특성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추가된 행복추구 역시 자유로운 부의 추구에 대한 요구로 볼 수 있다. 상업화 사회의 번영에 필수인 소유욕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 대안이 종교다. 종교를 통해 수용 가능한 특정 행동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베버의 해석에 의하면, 개신교가 자본주의 성공과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노력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인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자본주의는 지주와 자본가, 노동자 계층이 충분히 대중적으로 녹아들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바람직한 행동의 내면화는 종교적 절제와 암묵적인 사회계약 덕분에 가능했다.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쟁적이고 소유본능적인 의식구조를 바꾸면 자본주의의 장점들도 잃어버린다. 예컨대 소득감소, 빈곤증가, 기술진보의 감속 또는 퇴보로 이어질 것이다.

 

핵가족화와 상업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핵가족화와 상업화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핵가족화는 가족이 주는 경제적 장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핵가족화의 또 다른 측면은 상품화다. 글로벌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소비자로서의 현대인은 가족, 친구 또는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즉, 핵가족화는 시장화와 함께 이루어진다. 개인 영역으로 치고 들어온 상품화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일종의 상품화 과정이며, 상품화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치체계와 일치한다. 상품화는 자본주의 승리를 상징하며, 개인 영역의 상품화는 초상업적 자본주의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본주의 지배력을 절대적인 위치로 끌어올려 앞으로도 도전자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지닌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자기 이익과 재산을 추구할 수 있고, 또 분권화된 방식으로 부를 창출하여 인류의 평균적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 세기 전만 해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여겼던 문제들이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성공으로 일반화된 자본주의 정신은 현대인의 삶 내면에 깊이 침투하였다.

 

보편적 기본소득과 노동의 가치
보편적 기본소득은 보편적이고, 시민 개개인에게 소득으로 제공되며, 아무런 요구사항 없이 모든 사람에게 현금으로 지급된다. 그리고 일회성 보조금이 아닌 지속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원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새로운 복지국가의 근간이며, 복지국가의 기조 철학은 보편적 기본소득 체계의 도입 여부에 따라 정립될 것이다. 선진국에 존재하는 복지제도는 사회보험 개념을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사회보험 원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뼈대다. 하지만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면 사회가 극단적으로 양극화할 가능성도 있다. 노동 가능 인구 가운데 대략 30%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일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은 보편적 기본소득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사회는 세 부류로 나눠진다. 소득순위에서 맨 밑바닥 부류와 상층부 사람들은 일하지 않으려 하고, 중간층만 일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노동이 선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1/3가량의 젊은이들이 상시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유형
새뮤얼 볼스는 저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앞으로 진화할 세계화의 예상 진로를 세 가지로 전망했다. 첫째, 신자유주의로 서구 세계가 주도하며 자유성과주의적 자본주의를 중심에 둔다. 둘째는 신홉스주의로 재산권의 지배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으로 영토확장, 개인 권리영역의 축소, 책임없는 국가기관의 건설로 정의되며, 국가자본주의와 흡사하다. 셋째는 자본가가 민주적으로 조직된 회사에 자신의 자본을 빌려주거나 자본재를 통째로 빌려주는 제도로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에 근접하는 사회다. 다만, 자유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막론하고 모두 자본주의의 표준적 정의를 대입해보면 이런 유형의 사회를 자본주의로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종래의 자유자본주의의 세 가지 유형과 다른 두 가지 가설적 유형인 대중적 자본주의와 평등적 자본주의를 살펴본다. 우선, 고전적 자본주의는 리카도-마르크스 자본주의로도 불리는데,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서만 수입을 얻고 자본가는 자본을 통해 수입을 얻으며 자본가는 노동자보다 부유하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노동자는 노동으로, 자본가는 자본을 통해 수입을 얻으며, 공공의료와 교육을 포함한 세금 및 사회적 이전 제도를 통해 상당한 재분배가 이뤄진다. 자유성과적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노동과 자본에서 수입을 얻으며, 세금과 사회적 이전 제도로 총소득의 상당 부분을 재분배한다. 대중적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은 거의 동일한 비율로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을 가지며, 직접적 재분배는 제한적이지만 무료 의료서비스와 의무교육으로 세대간 소득 이동을 촉진한다. 평등적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은 거의 동일한 수준의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을 보유하여 개인의 불평등 정도가 낮으며, 재분배에서 국가의 역할은 사회보험에 한정된다. 자유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분야와 정치권력이 연합할수록 자본주의는 금권주의적 성향을 띠고 국가자본주의와 비슷해진다. 국가자본주의는 국민이 만족할만한 높은 경제성장과 효율적 경제 관리를 위해 유능한 관료체제가 필요하다.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의 진화
마르크스주의 관점이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심각한 결함을 보인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변화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변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와 21세기에 나타난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변종 중의 하나다. 사회민주주의는 하층 계층과 중산층의 소득을 실질적으로 증가시켰고, 평등교육과 사회보장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를 실행한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집단도 누리지 못한 번영과 정치적 자유를 이룰 수 있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공산주의의 역사적 역할을 오판하여 마르크스주의 용어인 사회주의를 엄격히 고수했다. 사회주의는 세계대전 이후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대체하기보다는 오히려 제3세계 일부 지역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서방 부르주아 계급이 했던 기능적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행단계라기보다는 사실상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이행 체제였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며 계속 진화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향후 자본주의적 외연의 확장과 더불어 지금이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정점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지 지엽적인 정점인지도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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