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바다에서 혁명적인 업적을 이룬 인물 두 명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해상왕 장보고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을 지칭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해상무역 확장에 뜻을 두다 정치에 휘둘리어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장보고 보다 죽을 때까지 한가지의 일념으로 살아온 이순신 장군을 예로 들어보자.


단군 이래 이순신 장군만큼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은 분은 많지 않다. 그리고 성웅이라는 칭호를 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부를까? 싸움에 능한 무적의 장수이어서 일까? 아니면 시대적상황과 주변환경을 정확히 파악하여 전쟁의 흐름을 분쇄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정신적인 방법 즉 손자병법의 상지상책인 벌모(伐謀)의 지계(之計)를 선택하여 승리를 이끄는 전쟁을 했기 때문일까?


필자는 후자에 이순신의 위대함이 있다고 본다. 국가가 단순히 군대가 부강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다고 장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전술이 뛰어나야 되고, 그 보다는 전략이 좋아야한다. 물론 그 위에는 정치와 사회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반듯하고 체계적인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가능한 환경을 잘 활용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마침내 승리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 존재한다.

 

전쟁의 승패는 그 다음 문제다. 사실 현장지휘관이 전략적 사고를 갖기란 매우 힘들다. 사람들은 눈앞의 상황이 닥치면 넓고 크게 보는 안목을 가지는게 쉽지 않다. 그래서 예로부터 전장에 따로 병법가나 참모부를 두어 현장지휘관을 보좌 또는 경계하며 보다 넓게 전장을 파악하고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싸움은 군인들의 몫이지만 싸움의 목적은 단순히 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널리 국민과 문민관료들이 이익을 얻어야 진정한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군은 수군현장 지휘관으로서 눈앞의 왜군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손실로 왜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인가 까지 염두에 두어 전쟁의 흐름을 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고이며 이순신을 성웅이라 불러도 좋은 이유라 생각한다.


손자병법에 적을 이기는 방법에는 네 가지 지계(之計)가 있다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회에 나와 조직과 생업을 이루는 방법에도 적용된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돈벌이를 위한 생업전선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그것이 취업이든, 창업이든 기존 경제의 흐름을 뚫고 들어가 얻어내야 하는 만큼 노력과 희생이 만만치 않다. 손자병법에 일컬어 '벌성(伐城)' 이라하며 자기가 직접 해야 하는 하지하책(下之下策)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은 그 경제의 흐름에서 자기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본인 스스로 해야 하는 영토전쟁이다. 취업을 한 경우에는 동료, 선배들과의 치열한 승진 전쟁을 위한 자기 개발이 기다리고 있고 최고의 지위에 오른 후에는 경쟁업체, 환경, 불확실성 등과 조직생존을 위한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창업의 경우에도 과정에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경쟁업체, 환경 불확실성 등과 치열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일컬어 '벌병(伐兵)' 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자기와 조직이 직접해야하는 하책(下策)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너 죽고 나 살자’ 식인 전술적인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살아남거나 한 단계 도가 통하면 중책의 방향으로 들어간다. 경쟁업체나 외부환경요인들과의 경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동반적 경쟁자의 관계로 들어선다. 즉 ‘너 살고 나 살자’의 공생적 생존의 길을 터득하여 공동의 지혜와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투쟁한다. 일컬어 '벌교(伐交)' 라고 하는데, 내가 아닌 우리가 해야 하는 중책의 병법이다.


다음은 상지상(上之上) 최상의 방책으로 전쟁에서의 전략에 비유되며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자기 이해관계에 유리하게 유도하여 시대를 내다보고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컬어 '벌모(伐謨)' 라고 하는데 특히 국가, 조직, 회사 등이 위기에 처하거나 대 변혁의 시기에 빛을 발하는 지계이다. 나와 조직이 직접 부닥쳐 싸우지 않고 상대방과 여론을 도모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차단하여 상대방이 감히 투지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 압도해 버리는 병법이다.

 

우리가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세 단계를 뛰어넘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엄청난 내공을 요구하며 노력한다고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흡수 합병(M&A)하거나 잘나가는 기업이 기존의 인기 상품을 버리고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여 시대를 리드하는 승부를 던지는 것 등은 단지 그 기업의 의지만으로 안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시대의 흐름, 즉 분위기를 잘 이용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분야의 전공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과 인적관계가 다양해야 한다.         


벌모지계(伐謨之計)의 상지상책을 오늘날의 국가적 전투상황이 아닌 정치, 경제, 사회적인 현상과 대비하여 보면 문화와 철학의 확립이라 할 수 있겠다. 가치 있는 문화와 철학은 조직을 굳건하게 만들고 몇 배의 힘을 발휘하게도 하며 한 때 어렵더라도 끝내는 극복하도록 만든다.


외국의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스위스란 나라는 경상도 면적 정도의 작은 국토에 지하자원도 없고, 농토도 전 국토의 5% 밖에 안 되는 나라이다. 이런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넘어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된 비결이 있다. 그것은 충직의 문화 때문이다. 2006년 1월 22일 로마에 있는 바티칸 광장에서는 스위스 근위병 500 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세계 제일의 부국이 된 스위스의 청년들이다. 세계제일의 부국이 된 그들이 왜 아직도 500년 동안 바티칸의 근위병 노릇을 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스위스 호반의 도시 루세른(Lucern)에 있는 심장에 창이 꽂혀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자의 조각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조각상은 1789년 프랑스 루이 16세의 용병으로 가 있다가 혁명의 와중에서 순직한 스위스 청년 4만 명을 애도하는 작품이다. 스위스가 가난했을 때 남자들은 외국 용병으로 가서 봉급을 받아 본국에 송금하여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이들은 유사시에 절대 도주하지 않고 모두 현장에서 순직했다. 스위스 국민의 이런 충직(忠直) 문화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바티칸 교황청은 그래서 지금도 스위스 근위병만을 채용한다. 충직은 물질 아닌 문화의 품질이다. 스위스 국민의 충직 문화가 경제활동 분야에서 발휘되면서 오늘의 스위스가 건설된 것이다.


이러한 충직 문화는 1960년대 산업화와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우리에게도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1960년대 초반 미국의 경제원조가 중단되면서 우리나라는 외환부족 위기에 빠졌고, 우리 정부는 당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경제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서독 정부에 차관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의 차관 상환능력을 의심한 서독 정부는 한국 간호원들을 서독에 다수 파견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간호원들이 서독에서 받는 급료는 서독의 은행에 예금될 것이고, 한국이 차관을 못 갚을 경우 이 예금을 동결하면 이것이 차관에 대한 담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 간호원들의 서독행이 시작되었고 1970년대 후반까지 총 1만1,200 여명의 간호원들이 외화벌이에 나선 것이다.


당시는 대학 다니는 학생 등록금은 물론 중 고등학생 학비 조달도 힘겹던 시대였다. 남자 아이를 공부시켜야 가문이 발전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오빠나 남동생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동생이나 누나가 공장에 나가 일하던 시절이었고, 한국 간호원들이 대거 서독 행을 지원한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였다. 그래서 서독에 간 간호원들이 받은 급료는 은행에 머물지 않고 대부분이 즉시 한국으로 송금되었으며, 이 돈으로 공부한 남동생, 오빠들이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서독 정부가 염려했던 차관의 상환은 간호원들 예금 동결이 아니라 이렇게 공부한 오빠·동생들이 이룩한 경제성장으로 해결되었다.


해운인에게도 그런 예가 있다. 해방 후 거의 절망적 수준에서 수 많은 해운인들이 근면성, 성실성, 저임금을 무기로 해외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그때 벌어들인 외화는 오늘날 한국 경제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때 터득한 경험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실력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한국 해운을 불과 수 십년 만에 세계최강의 해운대국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 수준의 발전이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 그들의 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이어야 한다. 선조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하여 그들이 이룩한 성과와 미래에 이룩할 수 있는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한 준비가 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다라는 영역 내에서의 싸움에서는 나름대로 경쟁력을 확보하여 성공한 듯 보이나 전술의 지계(之計)인 벌성(伐城), 벌병(伐兵), 벌교(伐交)의 한계에 머물러 전략적인 도모에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사랑하고 아끼는 문화와 철학이 더 널리 퍼지고 더 많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한 인재들이 국가정책 결정과정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하고 오피니언 리딩그룹에도 더 많이 포진하도록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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