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더불어 한평생 여해춘추(與海春秋)는 우리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글입니다. 지난 90여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니 저의 인생역정도 여해춘추였습니다...이제 남은 시간과 조그만 힘이라도 제게 주어진다면, 바다사랑과 해운입국(海運立國)을 위해 남김없이 쓰렵니다. 땀과 눈물 아니 피 한 방울이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난 해양한국 4월호 발행인편지의 서두이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박현규 이사장이 올해 ‘바다의 날’ 기념식에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다. 평생 바다를 사랑하고 해운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국가가 인정하고 포상하였다. “영예로운 수상을 축하합니다!”

 

로마사 연구의 고전 ‘몸젠의 로마사(Roemische Geschichte)’ 제5권-혁명편에는 그락쿠스의 농지개혁부터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까지 다루고 있다. 포에니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에 카르타고 방식의 대농장 경영이 도입되자, 농민은 농토를 잃고 삶은 피폐해졌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거대농장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났고,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을 이탈리아 국유지로 정착시키는 한편, 이탈리아 밖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 시급해졌다. 그락쿠스를 위시한 민중당파는 이를 밀어붙였고, 귀족당파가 반발하여 충돌은 불가피했다. 폭력사태로 혁명 지도자들을 잃고 주춤하던 민중당파는 전쟁영웅 마리우스에게 다시 희망을 걸었다. 무려 7번 그를 집정관으로 뽑았으나, 정작 그는 결정적인 순간 민중당파의 혁명과 거리를 두었다. 마리우스는 군사독재 가능성을 보였고, 무산자계급의 입대를 허용하는 군대개혁은 로마역사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탈리아 안팎의 거센 도전으로 강인함과 탁월함을 보여주던 로마의 한 시대가 저물고 커다란 변화와 몰락이 찾아왔다.
저자 테오도르 몸젠은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가장 권위 있는 고전문헌학자요 역사학자였다. 그는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로마고전문학 교수로서 많은 연구사업을 주도했으며, ‘고대 로마의 비문 총서’와 로마법 연구의 초석이 된 법률 저서들을 남겼다. 1902년 ‘로마사’로 독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로마의 패권과 복속지역
마케도니아 왕국의 몰락과 함께 로마의 패권은 헤라클레스 기둥에서부터 나일강과 오론테스강 하구까지 확장되었다. 숙명처럼 압박이 모든 주변 민족에게 가해졌고,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저항으로 소멸하느냐 아니면 인내 가운데 소진하느냐 뿐이었다. 오래전에 로마제국에 편입된 히스파니아 지역은 물론 피호(被護) 관계로 지배되던 아프리카, 그리스, 아시아 지역에서 대결한 강자와 약자의 결말이다. 당시의 이탈리아 상황은 속주들이 본국에 대해 벌인 저항의 관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베리아반도에는 이베리아인과 켈트족, 페니키아와 그리스인 그리고 로마인이 복잡하게 뒤엉켜 문명과 야만이 공존하였다. 로마가 넘겨받은 로마-그리스적 세계 통치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국가를 이탈리아반도에 국한하며, 이탈리아 밖은 피호 관계로 지배한다는 원칙이 지켜질 수 없음을 지도자들은 이해했고, 피호가 아닌 독립공동체로 보장하더라도 로마의 직접통치가 필연적임을 절감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러한 신질서를 신속 일관되게 도입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의와 편의로 몇몇 지역은 편입시켰고, 대부분의 피호 지역은 어중간하게 내버려 두거나 시리아처럼 로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도 되었다.

 

로마 중앙정부는 속주에 대한 감독과 검열을 거의 포기했고, 예속민의 이익은 물론 국가의 이익마저 온전히 속주 관리에게 맡겨버렸다. 백성의 권리는 속주 총독에 의해 짓밟혔으며, 로마의 명예는 식언과 배신, 항복과 조약의 농락, 양민학살, 적장에 대한 암살시도로 더럽혀졌다. 로마 최고관리의 명시적 의사표명에 반하여 전쟁이 수행되고 휴전했다. 통치는 의무이고 부담이지만, 동시에 특권이고 혜택이며 통치의 대가는 통치 자체라는 기존 원칙이 무너졌다. 국가경제가 피폐해져도 시민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예속 공동체를 시민 공동체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착취했으며, 부분적으로 시민들에게 착취하도록 넘겨주었다. 속주 관리의 불법적 관용은 무분별한 로마 상인에게 활동무대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 처리에 국가 공권력까지 동원되어 도시 전체가 탐욕적인 상인들의 투기대상이 되었다. 시민정신으로 유지되던 군대질서를 방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국가는 스스로 토대를 무너뜨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경수비는 예속민에게 전가되었으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국경 방어가 아주 형편없었다. 사회 상층부는 군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장교의 숫자를 채우지도 못했다. 민족적 명예와 전사적 영광이라는 개념이 로마인에게서 사라졌고, 로마의 내적 실력과 외적 무력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영웅들이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가 더는 확장되지 않았고 유지조차 어려웠다. 세계 통치는 이룩하기 어렵지만 유지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계 통치를 이룩한 원로원이었지만 유지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혁명의 조짐과 사회적 갈등
로마의 강역은 세 대륙에 걸쳐 확장되었고, 로마의 국력과 명성은 계속 상승하였다. 로마는 원근의 왕국들을 정복했고, 그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사태는 전혀 달랐다. 귀족정 정부는 자신의 업적을 망가뜨리는 일을 행하고 있었다. “더 이상 두려워할 나라가 없어지면 로마는 어떻게 될까”라는 정치가 카토의 질문에 이젠 응답해야 했다. 현안을 처리하는 것 이상이 통치라면 그 시대의 로마엔 통치가 전무했다. 통치집단의 유일한 이념은 오로지 그들의 특권 유지, 가능하다면 확대에 있었다. 원로원이 직접 맡거나 특별위원회를 통해 지휘했던 속주 행정심판은 적절치 못했다. 원로 피소의 제안에 따라 원로원 상설 사문회가 설치되었다. 속주민들이 제기한 탄원을 법률적 형식으로 다룰 목적이었다. 민회를 귀족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노력으로 표결제와 비밀투표제도 도입하였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도 로마 공동체의 법적 최고기관이 가진 무기력과 예속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옛 민회 장소로부터 로마광장의 원로원 의사당 아래로 집회장소를 옮김으로써 시민에게 부여했던 독립권과 주권도 형식적 승인에 지나지 않는 공허한 조치였다.


당시 로마에는 타락한 귀족정과 미숙한 민주정이 뒤엉켜 있었다. 이들은 명칭처럼 각각 귀족과 시민의 이익을 실현하려 했으나 당시의 로마엔 진정한 귀족도 진정한 시민도 존재하지 않았다. 양 당파 모두 허상을 좇았고 열광자와 위선자로 넘쳐났다. 이렇다 할 정치적 이념과 계획도 없이 순간마다 수단이나 목표를 두고 대립했고, 정권 교체는 정치신념의 변화보다는 전략의 변경을 의미했다. 그들은 서로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을뿐더러 원하지도 않았다. 혁명으로 이어질 조짐이 무르익었다. 정치적 갈등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서도 병색이 짙어져 폭발 직전까지 갔으나 로마 정부는 이를 방관했다. 옛날부터 로마 경제는 서로 대립하던 두 요소 농업경제와 자본경제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경제는 대토지 소유와 긴밀히 연합하여 농민계급과 전쟁을 벌였고, 이런 전쟁은 먼저 농촌을 몰락시키고 이어 공동체를 몰락시켰다. 수도 로마에 거주하던 고리대금업자들은 대농장 경영주로 변신했고, 이탈리아 농민의 지위는 추락하여 소농 경제가 붕괴되고, 자유민 노동자들은 속주와 이탈리아에서 노예로 대체됐다. 로마를 비롯한 고대의 토지경제는 노예노동에 기초했음에도 당시 로마의 노예들이 겪은 고통은 흑인 노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노예들의 크고 작은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고 진압을 위해 군대가 분주히 움직였다.

 

개혁의 이념과 개혁자들
귀족과 평민의 갈등 속에 토지분배와 노예반란으로 혼미해진 로마의 대내외적 상황은 남용과 타락이 넘쳐났다. 사려 깊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고치고 바로잡으려 고민했다. 이때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과업을 맡을 최적의 인물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떠올랐다. 그는 한니발을 물리친 로마 영웅 스키피오 장군의 손자로 건강하고 신중하며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다. 올바르고 정직했고 조화로운 개혁을 통해 사회적 퇴폐를 바로잡는데 누구보다 적합한 인물로 보였다. 그는 기회와 방법이 주어질 때도 남용을 삼갔고, 법적 질서의 확립과 개선에 진력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법 집행의 엄정성과 산발적 조정은 결코 구조적 병폐를 치료하는 시작이 될 수 없었다. 스키피오는 병폐의 심각함을 철저히 파악했고, 혼자 위험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개인적 명예를 돌보지 않고 뛰어들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구원은 혁명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혁이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수의 친구와 함께 그는 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중간에서 평생 외롭게 지냈다.


두 번이나 로마군을 절망적인 위기에서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가 좌절했을 때, 무경력의 젊은이가 이탈리아를 구원하겠다고 나섰다. 그의 이름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로 동생 가이우스와 함께 로마의 개혁을 이끌었다. 티베리우스는 선량하고 바른 품성을 타고났으며 온화한 얼굴과 침착한 태도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젊고 자긍심이 강한 그는 통치 귀족계급에 곱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 그가 호민관으로 취임할 당시의 로마는 거듭된 실정으로 정치, 군사, 경제와 윤리적 타락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우선 농지법을 발의했다. 소유자가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국유지를 국가가 환수하여 환수된 국유지를 일부는 시민에게 일부는 이탈리아 동맹에 분배토록 했다.


물론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소유토지가 아닌 남에게 매각할 수 없는 세습 임차토지였으며, 임차인들은 토지를 농업에 이용하고 적당한 임대료를 국고에 낼 의무가 있었다. 이는 원로원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대토지 소유자에 대한 선전포고일 뿐만 아니라 친귀족적 정부에 대립각을 세운 조치였다. 더구나 동료이자 동지였던 호민관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자, 국헌에 따라 그의 제안은 거부됐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들의 의견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을 요청하고, 운집한 군중에게 누구를 택할지를 직접 물었다. 군중의 환호 가운데 농지법이 통과되었고, 국유지의 획정 몰수 분배라는 힘겹고 복잡한 업무는 로마와 이탈리아 연맹 내부의 반목과 분열을 초래했다. 티베리우스는 신규 토지소유자에게 필요한 농기구 도입을 위해 로마인의 재산을 쓰자고 민회에 제안했고, 관례에 반하여 신규 속주와 관련된 최종 결정권을 시민에게 부여하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군복무기간 단축, 상소권의 확대, 심판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원로원의 배타적 특권 폐지, 이탈리아 동맹에의 로마시민권 부여를 위한 법률안을 준비했다. 게다가 자신의 신변 보장책으로 그의 호민관직을 민회에서 연장하려 들자, 사람들은 그가 반국헌적 개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샀다. 티베리우스가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개혁에 뛰어들었으나, 이제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위기에 처했다.


원로원이 소집되고, 격노한 티베리우스의 정적들이 발언을 주도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티베리우스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키며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군중에게 알리려 했으나 정적들은 그가 제왕의 머리띠를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하여 국가 반역자로 몰아 살해했고, 원로원은 살해를 옹호했다. 이때 히스파니아에서 귀환한 스키피오는 처남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공개질문에 “매제가 왕관에 뜻을 두었다면, 그의 죽음은 정당하다”고 말해, 사태가 일단락됐다. 사람들이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개혁 목적이 유익하다고 공감했지만, 그의 방법은 애국적 인사들 가운데 누구의 인정도 얻지 못했다. 이 시기의 로마는 원로원이 통치하고 있었고, 티베리우스가 공유지 문제를 민회로 가져갔을 때 이것은 국헌에 반하는 혁명이었다.
그는 민회의 성격을 간과하여, 민회체계를 대표자 의회체제로 발전시키지 못한 대가를 치렀다. 민회라는 장치를 선거와 입법에 활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한 것이었다. 민회 즉, 대중 집회가 정부를 공격할 때 이런 공격의 방어장치를 원로원이 가지고 있다면 승부는 이미 끝난 셈이다. 티베리우스는 유능하고 철저히 선의를 따르는 애국인사였지만, 무자비한 사태의 논리가 군중을 선동하는 막다른 길로 그를 내몰아 멈출 수 없었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과 혁명
티베리우스 그락쿠스는 죽었지만, 그가 추진한 토지분배와 사회개혁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락쿠스가 과업을 승계하여 더욱 과감하고 치밀하게 밀고 나갔다. 가이우스는 높은 교육을 받은 용감한 병사였다. 재능과 성격 무엇보다 열정에서 형 티베리우스를 압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주 복잡다양한 법률적 업무를 처리하는 선명함과 확고함에서 정치가적 천재성을 보였다. 가장 먼저 로마에 곡물분배제를 시행하여 모든 수도 시민에게 일정량의 곡물을 지급하자 무산자들이 로마로 대거 몰려들었고, 그들은 민중당파 지도자들의 피호민이 되어 민회의 확고한 다수를 보장해 주었다. 또한, 민회와 관련하여 투표제도를 바꾸어 시민 무산자의 지위를 높이고 민회의 자유로운 의결과 처분으로 원로원과 정무관을 압박했다. 무엇보다 그는 국유지 문제를 종결하였는데, 티베리우스의 농지법과 토지분배가 법적으로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일보하였다. 국가가 임대하여 토지분배에서 제외되었던 지역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식민지 건설 방식이었다. 이탈리아 무산자에게 해외 국유지를 제공하고, 식민지 건설과 함께 식민도시 권리를 부여하는 해외 식민지 건설원칙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다.

 

기존의 엄격한 국헌을 현실적인 조항으로 개정하며 무산자 시민과 관련된 조치들을 뒷받침할 법률을 삽입했다. 또한, 군제와 복무기간에 관한 규정과 법률을 개정하여 어떤 시민도 18세 전에 징집되지 않는다는 조항을 신설하고, 군복무 면제에 필요한 참전횟수도 축소하였다. 사형도 철폐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줄였으며, 부분적으로 군사법정에서 실행하였다. 부채 문제와 관련해도 채무자에게 부채 탕감 또는 상환 경감의 희망을 주는 친서민 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렇듯 가이우스는 민중에게 기대고 민중은 그에게서 물질적인 개선을 기대하거나 누렸다. 그는 귀족 붕괴에도 힘을 쏟았다. 무산자계급을 토대로 구축된 국가 수뇌부의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귀족을 분열시킨 후 분열된 귀족을 이해관계에 따라 끌어당겼다. 가이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계급은 두 개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쪽은 원로원 통치가문으로 이들은 직접 투자는 멀리하고 자본을 부분적으로 토지에 투자하거나 회사의 조용한 참여자로 활동하였고, 다른 한쪽은 핵심 투자자들로 거대 회사의 경영자로 활동하거나 로마 패권의 영역에서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을 주무르는 사람들이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들은 기사계급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사안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기병 계급 즉, 본질적으로 부유한 상인계급은 이해관계로 원로원 통치계급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이는 혈통귀족과 돈으로 귀족이 된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감이었다. 가이우스는 형보다 노련하게 이들의 균열을 키웠고, 마침내 재산귀족이 그에게 가담하였다.


 
사법개혁과 시민권 확대
재판제도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국가의 두 권력인 통치 조정하는 정부와 입법 권력인 민회가 법정을 나누어 지배했으나 이제는 물질적 토대 위에 특권계급을 형성한 자본귀족이 재판하고 조정하는 권력으로 등장하였다. 상인과 귀족의 해묵은 반목은 심판인 판결에서 실질적으로 표출됐다. 특히 속주 총독 재판에서 원로원 의원은 예전처럼 같은 원로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대 상인과 금융업자에게 심판을 받아야 했다. 가이우스는 무산자계급, 상인계급과 함께 통치귀족의 붕괴라는 본업에 착수하였다. 원로원의 붕괴는 법률개정을 통해 주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박탈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이고 임시적인 조치를 통해 기존 귀족들을 몰락시키는 것이었다. 이로써 원로원은 재판 권능을 완전히 상실했고, 감독권 가운데 오직 국가 수뇌부가 원로원에 허용하는 것만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이우스가 로마 공화정을 새로운 민중적 토대 위에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로마 공화정을 철폐하고 종신 호민관이 되어 민회를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독재정을 펼치려 하였다. 가이우스가 확고한 행정과 올바른 사법을 원했음은 그가 만든 합목적적인 규정들이 말해준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행정체계는 오직 형식적으로만 법제화된 직권남용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잘못된 통치를 대체하는 통합적이고 합목적적인 행정체계를 통해 국헌 변경을 합법화하는 우회 전술을 시도하였다. 이렇듯 개혁으로 시작한 통합이 군주정 수립을 동반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로마와 속주를 통합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새로운 국가 정체를 상당 부분 완성한 가이우스는 더 어려운 작업에 착수했다. 동맹공동체 문제와 로마시민권 확대 문제였다. 당시의 민중당파 지도자들은 당연히 로마시민권이 최대한 확대되기를 원했다. 라틴 시민권자들이 차지하고 있던 국유지를 토지분배를 위해 환수하기 바랐고, 대폭 증가할 로마 시민권자들과 피호 관계를 맺기 원했다. 그러나 로마시민권은 마치 주식과 같아 주식으로 이득분배에 참여할 권리를 얻을 수 있었기에, 원로원은 물론 심지어 로마의 무산자들까지 주주의 숫자를 절대 늘리려 하지 않았다. 이를 가이우스는 밀어붙였고, 의결투표에서 그의 동료인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법안에 거부 입장을 표했음에도 강행했다. 수세에 몰렸던 원로원은 민중 선동가를 몰락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공화정 전복 시도라며 무력으로 진압하는 조치를 발동했다. 가이우스의 힘의 원천은 상인계급과 무산자계급이었으나 결정적일 때에 그들은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의 약점은 우두머리와 추종자 사이에 신뢰가 없었다. 민중은 가이우스 그락쿠스를 지지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지지했을 뿐이었다.

 

복고정치
상속자를 남기지 못한 가이우스 그락쿠스의 사망 이후 원로원 통치가 자연스럽게 회복되었다. 복고는 언제나 또 다른 혁명이다. 그러므로 옛 통치가 시작되었다기보다 옛 통치자들이 돌아왔다고 하겠다. 과두정이 새롭게 무장하고 몰락한 독재정의 군대 앞에 등장했다. 복고정부의 특징은 귀족당파의 정치의식에 발전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선 상인들과 무산자들을 보호했고, 곡물분배, 아시아 속주의 과세, 심판인과 재판규칙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여전히 그락쿠스의 혁명을 그리워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이런 조치들이 사실상 귀족당파의 이득에도 부합됐기 때문이다. 그락쿠스 이전의 귀족계급은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고 원로원 의석은 기득권을 누리려는 탐욕적인 귀족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스키피오, 크라수스 같은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들도 있었기에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실정 속에서도 권력을 유지해왔다. 또다시 귀족들이 돌아왔으나 영리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했다. 당시 로마의 귀족통치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현저하게 부실했던 시대였다.

 

마리우스의 혁명과 실패
가이우스 그락쿠스의 피 묻은 시신이 티베리스강에 던져진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사람들은 복귀한 과두정부를 원망하며 견뎌왔다. 이때 혁명가로 등장한 인물이 가이우스 마리우스다. 그는 가난한 날품팔이 아들로 태어나 농부로 키워졌으며, 굶주림과 겨울 추위에도 땅바닥에서 잠을 자는 곤궁한 환경 속에 자라나 군대에 들어가 고된 훈련과 전쟁을 통해 고속승진하여 장교가 됐다. 전쟁 책임자로서 그는 용감하게 싸웠고 공평무사하게 판결을 내렸으며, 전리품 처분에 사심이 없는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녹슨 로마 군사조직을 쓸만한 상태로 돌려놓은 유능한 조직자였다. 출신은 농부이고 천성은 군인인 마리우스가 어떻게 혁명적일 수 있었을까? 귀족계급의 적대적 태도가 그를 점차 반정부 진영으로 몰아붙였고, 반대당파의 사령관으로 뽑힌 자신을 발견하여 이에 충실했으며, 더 큰 것을 지향했다. 그는 장점은 물론 단점으로도 인기를 끌었는데, 귀족과 다른 공평무사함과 농부 같은 투박함이다. 농부이자 병사인 그에게 수도 로마의 정치적 절차는 낯설고 불쾌했다. 그는 우선 군대 재편부터 시작했다. 공화정 국제는 시민이 병사요 병사가 시민이라는 사실에 기초했다. 그러나 모병제 도입과 무산자계급의 군복무 허용으로 병사의 신분이 새롭게 형성됐다. 심지어 마리우스는 국헌의 위배에도 불구하고 무공을 이유로 부대에 집단으로 시민권을 수여했다. 그는 복잡한 위계질서로 만들어진 국가조직과 다양한 관례와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4백년을 이어온 국헌의 전복을 매우 가볍게 생각했다.


승전하고 돌아온 마리우스는 개선식을 거행한 후 전통대로 군대를 해산하고, 국헌에 따라 국가 관직을 인수함으로써 국가 최고수장직을 차지했다. 이때 그는 민중당파에 의존했으며, 무적의 장군에게 필요한 정치적 재능과 경험을 민중당파 지도자들을 동지로 삼음으로써 해결했다. 그리고 과거 그락쿠스 형제가 시도했던 개혁을 다시 시작했다. 토지분배와 사회개혁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일치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락쿠스가 순수하게 민사적 지위였다면 마리우스는 거기에 군사적 지위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열렬히 환영받던 군사령관이 정치에는 무능력자임이 이내 드러났다. 마리우스는 정적을 이길 줄도 그의 당파를 단속할 줄도 몰랐다. 집정관과 호민관 선거를 둘러싼 과정에서 소요가 발생했고, 폭력사태를 기다리던 원로원이 집정관 마리우스에게 대응조치를 요구하자, 민중당파에게 얻었고 그들을 위해 뽑겠다고 약속한 마리우스의 칼이 보수당파를 위해 쓰였다. 사태가 수습되자 위험인물 마리우스도 제거되어 개혁은 동력을 잃었다. 이번 사태로 집정관 법률은 호민관 법률을 대체했고 자유제한이 진보적 조치를 대체했으며, 무엇보다 민중당파의 중요 구성원인 자본가계급과 무산자계급이 완벽하게 갈라섰다.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
로마 원로원 통치의 주요 기반인 속주 통치는 심판인 법정, 다시 말해 사문회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속주 총독들마저 원로원이 아닌 자본가와 상인계급을 위해 속주를 통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법의 칼날로 귀족계급이 파괴될 것이라는 가이우스 그락쿠스의 의미심장한 발언이 실현된 셈이다. 사법권 남용만큼이나 쟁점이 된 것은 작은 흠결로도 처벌받고, 권리와 정의에 따른 속주민의 합당한 요구도 매번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를 바로잡으라는 외침에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응답했다. 그는 진정한 귀족으로 보수적이며 상당한 재산가였다. 도덕적으로 엄격했고 천박한 귀족들의 허영과 저급함을 멀리했다. 또한, 신뢰를 지켰으며 그의 대문과 주머니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열려 있는 젊은 나이에도 존경받는 원로원과 광장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드루수스는 기사계급 재산등급의 시민을 심판인 자리에서 배제하여 이를 원로원에 돌려주는 동시에 300명의 새로운 원로원 자리를 늘려 확대 귀족정을 시행하려고 했다. 아울러 불법행위를 저지른 심판인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 특별법정도 설치하여, 자본가의 정치적 특권을 빼앗고 그들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하였다.

 

그의 제안들은 한정된 조치가 아니라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개혁안이었다. 그는 곡물분배를 늘리고 늘어난 비용은 은화와 함께 동화를 계속 발행하여 충당하고, 분배되지 않은 이탈리아 농지에 시민 식민지를 건설하며, 이탈리아 동맹시에 로마시민권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귀족계급인 드루수스가 가이우스의 개혁과 동일하게 합목적적인 시민권 확대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는 그락쿠스의 적대자이면서도 후계자요 제자였다. 드루수스가 제안한 법률에 대한 찬반여론이 비등하자, 제안자는 이탈리아 동맹시에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는 안은 잠정 철회하고, 심판인법, 농지법, 곡물법만을 제출했다. 자본가당파가 심판인법에 격렬히 저항하여 리비우스법이 폐기될 뻔했으나 드루수스는 단일안으로 통합하여 간신히 통과시켰다. 이는 끝까지 반대한 집정관 필립푸스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압송한 이후였고, 민중은 호민관 드루수스를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그러나 드루수스의 반대파는 리비우스법이 로마법에 상충된다며 무효화를 선언했다. 풀려난 집정관이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리비우스법의 파기를 원로원에 거듭 요구했고, 원로원은 기사계급 법정이 사라지는 것을 반기며 집정관의 요구를 거부했다. 집정관은 광장에 나가 원로원을 격렬히 비난하며 리비우스법 폐기를 거듭 주장하자, 우유부단한 원로원은 절차상의 하자를 내세우며 마지못해 수용했다. 사태가 급박해진 드루수스가 폐기 결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포기했음에도 며칠 후 자신의 집 앞에서 암살자의 손에 의해 쓰러졌다. 민중당파 개혁가들을 쓸어버렸던 폭력이 귀족계급 개혁가에게도 단행되었다. 개혁 시도가 같은 계급에서 시작되었으나 개혁은 실패했다. 드루수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개혁사상이 수포로 돌아감과 동시에 내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개혁과 보수의 역사는 숙명처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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