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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생명을 살린 플림솔 마크’
[558호] 2020년 03월 02일 (월) 11:42:41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showload@chol.com

코로나-19와 영화 ‘기생충’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해 2월 콤파스가 취소됐다. 사스와 메르스 때도 취소된 적이 없었으나 이번엔 피해갈 수 없었다. 행여 참석자 가운데 유증자라도 생긴다면 이날 모임에 나온 사람들은 물론 애꿎은 가족과 직장동료까지 불편해지고 심하면 격리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각종 모임과 행사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매우 잦다. 처음엔 우한폐렴으로 불린 코로나-19는 사망률이 메르스보다 못 하지만 전파력이 워낙 빨라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최초 발생지인 중국 우한은 매일 감염자와 사망자가 늘어나 1,100만의 대도시가 폐쇄되고 주민들에겐 외출금지령이 내려질 정도로 심각하다. 후베이성을 비롯한 인근 대도시들이 공포의 도시로 변하고 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의 불편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양쯔강 수변의 한코우, 무창, 한양을 통합하여 만든 대도시 우한이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19년전 해사문제연구소의 선상세미나 및 중국탐방행사로 충칭의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 후 유람선을 타고 양쯔강을 따라 내려오며 삼협을 지나 우한에 들른 적이 있다.

 

교육의 도시 우한은 중국대륙의 심장부에 있어 교통의 중심지이며, 사적과 관광명소가 많은 지역으로 최근 공장과 산업체들이 대거 입주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인적 물적 교류가 빈번한 우리나라로선 감염 확률이 특히 높아 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방역당국과 의료진의 발빠른 대처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감염 확산이 차단되는 듯했으나 대구의 종교행사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감염자들이 머물렀던 곳과 동선을 따라 폐쇄와 방역이 이루어지고, 불안한 시민들은 외부활동을 꺼려 대구 도심이 썰물 빠진듯 한산하다.

 

전염병은 초기대처와 차단이 매우 중요하며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봇물 터지듯 순식간에 확산되는 호흡기질환의 속성상 방역망을 좀더 촘촘히 짜야 할 것이다. 질병 퇴치를 위해 밤낮없이 분투하는 의료진과 구급대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눈물겹다. 가슴 조이며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요즘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혹여 옆 사람이 기침이라도 하면 모두 긴장하며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으로 인해 시민들의 공중위생 수준이 향상된 것은 큰 수확이다. 예년에 비해 감기나 독감 환자가 대폭 줄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인간이란 서로 만나 어울리며 살아가는 존재인데, 이젠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리니 참으로 안타깝다. 게다가 모임 자체를 갖지 않다 보니 소비가 대폭 줄어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을 보이고 있다. 물류산업인 해운업은 직격탄을 받았다. 하루속히 코로나-19가 퇴치되어 만남과 모임들이 성사되고 경기도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연초부터 코로나-19로 침울한 우리에게 낭보가 날아들어 왔다. 미국 LA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리나라 영화 ‘기생충(Parasite)’이 작품상, 감독상 등 4관왕을 휩쓸어 우리를 열광시켰다. 수상자가 호명될 때마다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뿐만 아니라 출연진과 제작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환호하며 서로 얼싸안았다. 한국의 영상문화가 세계를 석권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봉 감독의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시나리오 작가 한진원은 감격에 겨워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고 말했다. 한때는 진고개로 불렸던 충무로가 세계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영화의 산실이요 토양인 충무로 거리의 명보극장, 대한극장 앞길을 걸으며 회상에 잠겼다. 도저히 못 오를 나무 같았던 오스카상이라는 거목을 우리가 오른 것이다. 이 나무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땀과 눈물로 씨를 뿌리고 묘목을 가꾸었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충무로 바닥의 골목길과 좁은 방에는 영화에 미쳐 젊음을 불사르는 수많은 무명의 영화인들이 있다. 그들의 한과 꿈을 봉준호라는 스토리 텔러가 대신 이룬 것이다. 이번 아카데미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영화는 중흥기를 맞이했다. 자기성찰과 내실화로 더욱 발전하여 상업화하는 국제영화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삶과 혼이 담긴 영상문화의 꽃을 활짝 피워나가기를 바란다. 
다음은 지난 1월 콤파스에서 배포된 책 ‘바다에서 생명을 살린 플림솔 마크’를 요약하여 게재한다.

 

생명을 살린 플림솔 마크
‘바다에서 생명을 살린 플림솔 마크(The Plimsoll Sensation-The Great Campaign to Save Lives at Sea)’는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인 니콜레트 존스가 쓴 책이며, 장금상선 정태순 회장의 후원으로 한국해대 김성준 교수가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존스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자못 흥미롭다. 그녀는 런던 북쪽 빅토리아 풍의 핀스베리 파크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도로명이 플림솔 로드(Plimsoll road)였고, 집 근처에 플림솔이라는 펍이 있었으며, 그 펍의 간판에 플림솔 운동화를 상징하는 빨간 운동화가 그려 있어, 플림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플림솔 운동화란 아래쪽에는 고무이고 그 위쪽은 천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그렇게 불렸는데, 화물선처럼 신발의 어떤 지점까지만 물에 잠길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만재흘수선(Load Line)으로 익숙한 플림솔 마크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렇게 힘들었고, 그 일을 해낸 사람 새뮤얼 플림솔이 이토록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이 책의 서문을 소개한다.


선박이 물에서 안전하게 떠 있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선박현측에 선을 표시하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조치이다. 그것이 국제표준이 될 때까지 선박을 관장하는 행정기관의 각종 회의에서 잡음 없이 진행될 것으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자전거에 브레이크를 설치하는 것같이 논란의 여지가 없으나 만재흘수선은 그렇지 않았다.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한 동기가 하도 어이가 없어 행정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십자군 운동으로 돌변했고, 만재흘수선은 오늘날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부당함에 맞서 정의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서사적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처럼 되어버렸다. 빅토리아 시대의 상인과 선주들은 가능한 한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위험할 정도로 화물선에 과적하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이보다 더 나쁜 행위는 살인적인 보험사기였다. 어떤 선주는 자신의 선박에 과보험을 들어놓고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 감항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운항했다. 이러한 선박은 관으로나 쓸 배라는 뜻의 노후선(coffin ship)이라 불렸으며, 선원들은 그런 선박에 승선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새뮤얼 플림솔은 단순한 안전조치인 간단한 해결책을 제안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만재흘수선과 독립기구에 의한 선박검사였다. 그러나 만재흘수선이 최초로 제안되어 법으로 확정될 때까지 무려 20년 이상이 걸렸다. 당시에는 플림솔의 흘수선 도입에 반대가 많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상업적으로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입법조치가 관료적 형식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무역을 방해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선박과 선원을 보호하는 책임이 법과 정부에게 있지 선주는 아니라는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그럼에도 만재흘수선이 입법화하고 플림솔 라인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박애적 결실이요, 19세기 중엽의 산업혁명이 그래도 양심은 있었다는 증거였다. 플림솔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입법해야 할 책임이 의회에게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 사람이며, 그런 사람 덕분에 그나마 정치인에게도 양심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준 셈이다. 플림솔 라인이 만들어지는 데에 촉진제가 된 당시의 대형 해난사고를 소개한다.

 
해난사고와 상선검사법안 
1866년 1월 승객 220명과 승무원 69명을 태우고 영국 플리머스를 떠나 공해로 나가 호주로 항해하던 런던호가 난파되어 270명이 사망하는 해난사고가 발생하였다. 런던호가 템스강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어떤 뱃사람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저것이 저 배의 마지막 항해가 될 거야. 배가 물속에 너무 가라앉아 있어 거친 바다에선 물 위로 절대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심지어 런던호의 일등항해사는 “나는 이 배가 싫다. 나의 관이 될까 두렵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되어버렸다. 침몰된 지 한달 후 해안에 쓸려온 병 속에는 “배가 가라앉고 있다. 구조될 희망이 없다. 우리 모두 살아서 집에 갈 수만 있으면!”이라는 애처러운 글이 담겨 있었으나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1871년 2월 영국 브리드링턴에서 발생한 해난사고로 15척이 침몰하고 수많은 승객과 구조대원들이 사망하여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겼다. 이때 사망자들에게 쓸 관이 모자라 목수들이 쉬지 않고 만들었고 장례식엔 장례행렬이 꼬리를 물고 반 마일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문들은 연일 기사를 통해 분노했다. “우리는 귀중한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갈 저 페인트칠한 썩은 나무 덩어리들을 바다에서 쓸어버릴 엄중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또 한 회기를 허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개탄한다” 그리고 “이제는 항해하기에 부적합한 선박을 조사하고 과적을 금지하는 플림솔 의원의 법안이 반드시 제정되도록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브리드링턴의 돌풍과 해난사고가 몰고 온 항해 부적합 선박에 대한 비판 여론과 압력에 힘입어 플림솔은 1871년 2월 22일 새로운 상선검사법안을 제출하였다. 이 법안의 제출목적은 모든 선박에 만재흘수선을 표시하고, 출항하기 전에 검사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녹록치 않아, 이에 분개한 플림솔이 의회에 나가 법안 통과를 호소한 연설을 소개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번 입법을 돕지 않는다면, 당신이 선원의 아내라면 당신의 남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떠나버려 당신은 사별의 고통과 극도의 빈곤이 더해질 것이요, 당신이 아버지라면 아들의 고별인사도 받지 못하고 눈을 감을 것이며, 당신이 어머니라면 한창 젊은 아들을 빼앗길 것이므로 과부와 고아를 양산하는 잘못된 시스템을 멈추기 위한 일에 온몸으로 도와야 할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난관과 시련을 넘어
그러나 난관과 시련은 계속되었다. 수십년간 만재흘수선을 반대했던 논리는 상이한 선박의 다양한 크기와 조건에 하나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830년대 이래 로이즈선급 위원회의 추천에 근거한 자발적 경험칙이 존재해 왔는데, 이것이 로이즈규칙이다. 그에 따르면, 너비에 비해 길이가 5~6배 가량 긴 600톤 내지 1,400톤급 선박은 악천후에도 안전할 수 있도록 화물창 깊이의 28%에 상당하는 건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원칙이 상황에 따라 변용되어 모든 선박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후 플림솔의 옹호자였던 체임벌린 수상에 의해, 무역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도 과적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건현과 관련된 일반 원칙을 제정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무역성은 로이즈선급에 도움을 청했고, 로이즈선급의 수석검사관은 모든 선형의 선박에 적용될 수 있는 건현표를 제정하기 위해 여러 항구에서 선박이 가라앉는 상태에 대해 조사한 로이즈 검사원들의 보고서를 활용하였다. 한편, 체임벌린은 선박의 과보험 방지 법안을 옹호하기 위해 의회에서 장시간 연설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정된 만재흘수선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때는 1985년이었다. 그러나 선주와 조선업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다양한 길이와 너비를 수용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수정안이 제출되어 1886년 무역성에 의해 채택 공표되었기에, 고정된 만재흘수선은 강제성이 없었다. 플림솔은 불만스럽지만 수정안에 근거하여 만재흘수선을 획정하는 상선법안을 받아들였고, 1890년 6월 9일 마침내 상선법이 국왕의 승인으로 실현되었다.

 

1890년 상선법에는 영국적 선박들을 국제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항구에서 출항하는 모든 외국적 선박들도 영국적 선박과 같은 만재흘수선을 표시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최종적으로 국제표준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틀은 조성되었다. 
격무에 시달린 플림솔은 당뇨병에 걸렸다. 당시엔 인슐린이 없었기에 유일한 치료법은 아편과 식이요법뿐이었다. 그는 공적생활에서 물러나 풍광이 좋은 잉글랜드 해안인 더 리즈로 집을 옮겼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부두파업과 선원파업을 포함한 제반 노동관계를 조사하기 위한 왕립위원회의 일원으로 동분서주하였고, 각종 연설과 집필활동도 활발히 벌여나갔다. 1898년 5월 그는 다시 중병에 걸렸으며, 이번엔 회복불능으로 보였다. 소량의 음식 섭취도 어려웠다. 그는 2차적 의학적 치료를 거부한 채 혼수상태에 빠졌고 6월 3일 이내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가 ‘폭풍우가 몰아칠 때, 일생의 폭풍이 지날 때까지 주여! 나를 보호하소서’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였다. 플림솔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포크스턴 항의 모든 선박들은 돛대에 반기를 게양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옛부터 도움을 주시고, 다가올 미래의 희망, 몰아치는 폭풍우로부터의 피난처,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라는 선원 찬송가와 ‘바다에서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라는 합창곡이 불려졌다. 든든한 후원자요 동반자인 플림솔의 아내 해리엇은 “그는 온화한 아버지이자 최고의 남편이었고, 선량한 기독교인의 전형”이라며, “그를 잃은 것은 모든 선원들이 진실한 친구를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뼈아픈 말도 남겼다. “플림솔 마크가 사라지게 되면, 그것을 만드는데 수년간의 힘든 노역을 겪어야 할 것이고, 수백명의 귀중한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영국 선원들이 플림솔 마크가 제거되도록 허용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재흘수선은 확정된 수간부터 위협을 받았다. 
 
플림솔 라인을 강제하는 만재흘수선법 
화주들은 미국 동해안으로 향하는 대서양 횡단항로가 모두 동일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1898년 12월 플림솔이 죽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음에도 무역성은 330피트(100.58미터) 이상 되는 선박에 대해 동계 북대서양 마크를 없애버렸다. 이로 인해 전에는 여름철에만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깊이까지 화물을 싣고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더 작은 선박들마저 안전 마진을 줄일 수 있어 7천 내지 8천톤급 중형 선박은 화물을 150톤 더 적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취해진 후 불과 3달 동안 기선 9척이 대서양에서 실종되었다. 그럼에도 무역성은 동계 북대서양 만재흘수선을 전체 선박에 대해 폐지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은밀히 회의를 소집하였고, 결국 플림솔 마크를 수정하는 법안을 발표하여 로이드 조지 수상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 수정으로 인해 적재능력이 5% 증가됐으나 선원노조를 비롯한 선원단체는 부당하다며 분노했다. 이러한 수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의가 뒤따랐고 1913년에 그 소요가 절정을 이루었다. 비록 수정된 만재흘수선이 신조선박에만 적용되도록 의도하였으나, 점차 기존 선박에도 이것을 적용하였다는 사실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1912년 수정법을 적용한 선박 노스 브리튼호가 침몰하여 선원 20명이 익사하였는데, 유일한 생존자인 갑판장은 침몰원인을 불충분한 건현이라고 증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수정된 만재흘수선 표를 재고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졌고, 플림솔이 주장했던 대로 되돌리자는 운동이 급물살을 탔다. 만재흘수선을 높이는 것은 선원의 안전뿐만 아니라 선원고용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후 세계 각국은 상응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1908년, 프랑스 1909년, 네덜란드는 19010년에 각각 만재흘수선을 채택하였다. 미국 해운국은 1917년에야 영국 무역성의 건현표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1920년 만재흘수선 법이 미국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채택에는 실패하였고, 192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국도 만재흘수선법을 국제항행에 적용하였다. 나아가 1930년 런던에 30개국이 모여 고정된 플림솔 라인을 도입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조인하였다. 1935년 미국은 한발 더 나아가 연안무역에 대해서도 플림솔라인을 강제하는 만재흘수선법(Load Line Act)을 통과시켰고, 다른 나라들의 채택도 속속 이어졌다. 몰타로부터 나카라과에 이르기까지 만재흘수선을 이미 사용하고 있는 60개국이 해상에서의 새로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제해사기구(IMO)가 채택한 새로운 조치들을 수용하는데 동의했다. 이제야 플림솔 마크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수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이제 플림솔의 만재흘수선은 지금까지 120년이 지나도록 영국의 표준이었고, 80여년 동안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영국적 선박에서 연간 400 내지 500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플림솔의 주장 대로 플림솔 마크로 인해 수십만의 목숨을 살릴 수 있게 되었고, 바다는 훨씬 안전한 곳이 되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각박한 세상에서 플림솔의 도덕적 확신과 자기희생이 디딤돌이자 마중물이 되었다. 1898년 유력한 신문 스타지의 기사에 의하면, 플림솔 마크가 실현된 뒤의 해상 사망률은 1천명 당 12명으로, 이는 육상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다음은 플림솔에 대한 어느 선주의 평가이다. “침몰하지 않아도 될 많은 배들이 침몰했다. 그리고 목숨을 잃지 않았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온몸으로 투쟁했던 플림솔에게 마땅한 명예를 돌려주어야 한다. 때로는 개인적인 실수도 있었지만, 그가 옳았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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