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제 24회 ‘바다의 날 기념 선상세미나’에 참가한 이경순 前 KMI연구위원이 일본의 야마구치현을 둘러보고 이 지역의 역사와 의미를 짚은 내용이다.         -편집자 주-

 

부산에서 밤 10시 ‘카멜리아’호를 타고 일본 규슈 후쿠오카 하카다항에 아침 7시에 도착해 통관절차를 밟고 버스로 규슈와 혼슈를 잇는 1.5Km의 간몬關門대교를 건너 첫 도착지가 시모노세키의 아카마赤間신궁 앞이었다. 이런저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시모노세키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다. 통신사가 일본에 제일 먼저 첫발을 딛는 곳도 이곳이고,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전초기지로 삼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이곳에서 부산으로 오가던 연락선에 유학, 징병, 징용 가던 조선인들과 침략군과 일본상인들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옛날 통신사들이 일본에 닿아 처음 여장을 풀고 묵던 곳이 지금의 아카마 신궁 옆 별채였다. 신궁 앞 해안 한 귀퉁이에 한일의원연맹 회장 김종필의 휘호가 붙은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가 서있고, 아카마 신궁을 가려고 길을 건너면 왼쪽으로 ‘이홍장 길’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보니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 2018년10월에 개설된 ‘고종의 길’이 오버랩 돼 옴을 느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이곳 조선통신사들이 묵던 숙소에서 청일간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당사자 이홍장과 조선의 고종이 일본이 두려워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 갔던 것을 뭣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길거리에 ‘길’이라고 세워놔야 하는지? 시모노세키조약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가 청나라 이홍장과 마주 앉아 회담을 벌였던 그 장소에 그 현장에 탁자의자까지 그대로 보존하며 자랑 질이다. 그 조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영문도 모르는 사이 중국 손에서 일본 손으로 넘어갔다.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간토(대륙세력)와 간사이(해양세력)
1192년 가마쿠라 막부를 시작으로 일본의 실권은 막부의 쇼군將軍이 차지했다. 덴노(천황)는 상징적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쇼군이 행사했다.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100여년의 전국시대를 지나, 도요토미가 죽자 조선에서 철군 후 도요토미 가문서군과 도쿠가와 동군이 1600년 음력 9월 15일 일본 중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양군이 전쟁을 벌여 전투에서 동군 도쿠가와가 승리해 에도막부의 쇼군이 됐다.
일본열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중부를 간토와 간사이 지방 사이를 혼슈本州라고도 말한다. 관關은 세키가하라關ケ原며  관 서쪽을 간사이, 동쪽을 간토지방으로 부른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 역사상 유명하고 결정적인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그의 가문이 에도 막부 시대를 열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265 년간 일본을 다스렸고 조선과는 평화공존의 시대였다.


그런데 교토京都는 헤이안 시대 이후 거의 천년 동안이나 일본의 수도였다. 쇼군은 에도(지금의 동경)에 거주해 실질적인 수도는 동경이었어도 천황, 덴노는 여전히 교토에 있어서 명목상의 수도는 계속 교토였다. 그러니까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동경으로 오면서부터 동경이 명실공희 수도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교토 사람들은 ‘우리가 일본 정신의 중심이다’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한다. 교토 사람들은 동경 사람들을 근본 없는 것들로 치부하고, 동경 사람들은 교토 사람들을 촌것들로 서로 무시한다고 한다.
김두규 교수에 의하면 야마지 아이잔 이란 유명한 역사가 겸 평론가는 “일본 북쪽은 육지의 나라이며 주로 말馬이 교통수단이며 보수적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대표 대륙세력이다. 반면 남쪽은 바다의 나라이며 주요 교통수단은 배舟이며 진보적이며 그 대표 해양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야마지가 언급한 일본의 남과 북은 다름 아닌 간사이와 간토다. 두 곳의 지역감정은 너무 대조적이어서 한반도의 영·호남이 아닌 남·북한과 같다고까지 말한다. 한반도와 간사이 지방은 동·남해를 공유해 ‘한 우물’을 쓰는 반면, 간토 지방은 태평양을 접해있어 거의 접촉이 없었다. 한 우물을 쓰다 보면 애증관계가 생기게 마련.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중심세력은  간사이 해양세력이었고, 당시 도쿠가와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 대륙세력은 조선 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서세동점의 휘나레 아편전쟁, 그리고 요시다 쇼인의 탈아입구脫亞入毆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분권형 에도막부의 정치행태로 인하여 큐슈 섬, 시코쿠 섬, 일본 서부지방은 중앙에서 소외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 편에 줄서 서군이었다는 이유로 260여 년 간 많은 차별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세기가 되었고 서쪽 끝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와 무역하면서 국제정세에 차츰 눈을 뜨게 됐다. 그러던 중 1840년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으로 동양의 강자였던 청나라가 영국의 공격에 무너지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던 반면 조선은 중국의 허황된 변명인 양이洋夷들의 경거망동으로 치부해버렸다.
일본 지도자들은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이 한창인 당시 상황을 기원전 중국의 전국 7웅雄상황으로 인식했다. 즉 유럽세력,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무굴 제국, 페르시아, 청나라, 일본이 세계를 분할하는 7웅으로서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라고 생각했다. 서구열강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본을 개혁해야 한다고.


처음 탈아입구를 부른 짖은 사람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년~1859년). 에도막부 시대 말기의 교육자, 사상가 혁명가다. 본명은 노리카타矩方. 쇼인은 아호이며 통칭은 토라지로寅次郞다. 조슈번(야마구치 현) 하기萩에서 태어났으며, 근현대 일본 우익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자, 현대 일본의 정치·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벌(長州閥: 야마구치)의 사상적 아버지로 여겨진다.
여행 3일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하기 시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당시 정치의 중심이 현재의 야마구치 시市로 옮길 때까지 하기 시가 야마구치 현縣정치의 중심지였다. 요시다 쇼인의 생가와 사설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조선시대 서원書院과 유사함)와 이어 조금 떨어져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비가 새고 낡아 수리를 위해 지붕을 덮어놓음)집 앞에 세워진 공작이등박문公爵伊藤博文동상이 고색창연하게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것을 돌아보며 많은 감회를 느꼈다.
 

 
 

우리나라 같으면 7명이 넘는 총리대신과 이 같은 특별한 인물을 배출한 이곳을 기념해야 한다며 야마구치현을 00특별 현이라 개명改名하고 인근 토지를 국고로 사들이고 이곳을 성역화 한다면서 파고 까고 제켜서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요상 망측한 건물과 구축물이 난무 할 텐데 하고는...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5세 때 숙부의 양자가 되어 요시다 가문을 계승했다. 11세 때 번주藩主앞에서〈무교전서 武敎全書〉를 강의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 1850년 번주의 허가를 받아 규슈로 유학을 갔으며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저서〈신론 新論〉을 읽고 아편전쟁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면서 시야를 넓혔다.
이듬해에는 에도로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서 서양학문을 배웠다. 같은 해 그는 번주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번藩을 이탈한 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결국 그의 재능을 아낀 번주의 도움으로 다시 에도 유학길에 올랐다.
 

1853년 페리 함대가 내항했을 때 요시다는 사쿠마와 함께 미국함대의 정세를 탐색한 뒤 무조건적인 주전론의 무모함을 깨닫게 되었다. 외국사정을 널리 알 필요성을 통감하고 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의 체결을 위해 다시 내항한 미국함대로 해외 밀항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자수하여 투옥되었다.
칩거를 조건으로 출옥한 뒤 고향에 내려가 사설학교를 열고 하급무사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은 점차 조슈 번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고 이후 막부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실현한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858년 바쿠후가 칙허를 얻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열렬한 존왕론자이였던 쇼인은 반反바쿠후적 언동을 취했다. 이어 그는 로주老中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안세이安政의 대옥을 강행한 바쿠후는 쇼인을 수상히 여겨 1859년 에도로 호송하여 투옥했다. 심문 중에 로주 암살계획이 드러나 사형(29세)에 처해졌다.
 

또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다. ‘천하는 덴노가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내세웠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 중에 훗날 메이지 정부를 이끈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년~1877년)는 일본의 정치인이며,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삼걸중의 하나), 조선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가 나왔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우익정치를 이끌고 있는 아베(동경에서 태어났지만 야마구치가 고향)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조선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년~1909년)
이토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 가문에 입양된 사람이었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유신(1868)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기도 다카요시와 같은 인물과 알게 되었는데 기도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시기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메이지유신이 단행되기 전인 1863년 이토는 우연한 기회에 조슈長州의 지도자들에게 발탁되어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는데, 1년의 유학 기간 동안 영어를 익힌 것이 그의 큰 자산이 되었다.


이토는 개화파로서 일왕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대가로 정계에 입문, 효고 현 지사 등 요직을 거쳤다(→메이지 유신). 그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사쓰마 번 출신)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파견사절단(1870)과 이와쿠라岩倉사절단(1871~73)의 일원이 되어 해외에서 과세·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국가 제도 개선에 앞장설 수 있었다.
 

이토의 생애는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유신3걸 중 한명)암살되면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이로써 그와 마찬가지로 야심 있고 재능  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1881년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정부를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하게 했다. 1889년 일왕은 헌법 제정을 선포했고 1890년 의회가 수립되었다. 입헌정부의 수립에 대한 준비작업은 매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 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었던 이토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거의 1년 6개월 동안 당대의 유명한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을 공부했다. 이토의 작품인 <메이지 헌법>은 민권과 의회의 권한 등에 여러 가지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독재정치를 영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메이지 지도자들이 대부분 무사 출신이었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감안하면 기본권 보장과 의회 수립을 명문화한 이 전례 없는 조치는 진보적 계몽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토의 영향력은 1890년대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1890년대 중반에 그는 총리로서 2가지 중대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첫째는 영국과 조약(1894)을 맺어 1899년까지 일본 내의 영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철폐키로 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 내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은 1899년 이후 일본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 조약이 선례가 되어 일본은 다른 서구열강과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둘째 성과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거둔 승리였다. 이 2가지 성과는 일본이 비非서구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동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좀 더 비중 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토는 1901년까지 4번이나 총리가 되었으나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토는 1884년부터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청나라와 외교전 끝에 텐진 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했다. 1900년대 초,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는 등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자,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한 끝에 1904년 러일 전쟁을 벌였고,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감독권을 획득했다.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12월에 조선의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주도면밀하게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할 계획을 수립, 근대식 교육, 경찰, 교통 제도 등을 도입했다.

 

미국 페리제독의 개항 요구
1853년 페리제독은 배4척을 이끌고 일본의 개항을 요구한다. 그때 미국은 서부개척이 한창일 때라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일본의 개국을 필요로 했다. 쇄국정책을 펼친 조선과 달리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와 무역하고 있던 일본은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어,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 함대에 무너진 것과 서양무기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다. 실권을 가지고 있던 쇼군은 미국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일 화친조약을 맺는다. 그러자 강요에 의해 항구를 연 쇼군을 비판하며 덴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외국을 물리쳐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래서 쇼군을 중심으로 한 개국파와 덴노를 지지하는 쇄국파가 대립하게 된다. 쇄국파는 일본 서남 지방인 사쓰마, 조슈 번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쇼군 중심의 도쿠가와 막부를 폐지하고 덴노를 내세워 외국 세력을 몰아내길 원했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는 축적된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무기와 군인을 늘려나가 군사력이 강했다. 요시다 쇼인의 주장에 따라 덴노를 옹립하며 존왕양이를 추구하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결국 서양세력과 충돌했다. 사쓰마 번과 영국 사이의 사쓰에이 전쟁(1863), 조슈 번과 미, 영, 프, 네덜란드 연합국의 시모노세키 전쟁(1864)에서 패배함으로 쇄국정책의 무모함을 깨닫게 되었다.

 

삿초동맹薩長同盟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존왕양이를 내세운 사쓰마와 조슈 번이었지만 사쓰마는 온건파, 조슈는 강경파였다. 둘 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사쓰마, 조슈 간에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龍馬의 중재로 사쓰마·조슈 번의 삿초동맹이 맺어진다. 덴노를 옹립하는 삿초 동맹군과 도쿠가와 막부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 이것이 보신전쟁(1868)인데 신무기로 무장한 삿초 동맹군을 당할 수 없어서 막부정권은 항복하고 만다. 1868년3월 덴노는 에도에 무혈입성하고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막부는 26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 후 사쓰마, 조슈, 도사 번 중심으로 메이지 덴노를 내세워, 개방을 통하여 국가 대개혁이 이뤄졌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1868)이었다. 사무라이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상공인 중심의 근대산업국가로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영주가 지배하는 번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지역사회에서 도쿄 중앙정부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로 변신한다.
 

이것을 폐번치현廢藩置縣이라고 한다. 세습되던 영주의 지위와 봉토인 번藩이 사라지고 중앙정부 관리가 파견되어 현縣을 통치하게 된다. 사농공상의 신분차별이 사라지고 사민평등이 이뤄졌다. 단발령을 내려 일본식 상투인 존마게 폐지(1871), 국민개병제(1871)실시, 사무라이의 상징인 칼을 못 차게 한 폐도령(廢刀令1876), 이토 히로부미의 아이디어인 독일 프로이센을 본 딴 국가체제를 추구했다.
메이지 유신은 지배계급인 사무라이의 몰락을 가져온 반면 상공업발전을 이끌 수 있는 관료계급과 도시상공업자들이 새로운 지배세력이 됐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유사해 전통적 봉건영주의 몰락과 신흥 부르주아계층의 부상과 유사하다. 차이점은 프랑스 대혁명은 아래로부터지만 메이지 유신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것.
메이지 유신을 이끈 3대 인물을 유신 3걸이라 한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이다. 이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덴노가 통치하는 메이지 정부를 연 개혁적인 인물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통해 서양을 견학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개화한 합리적인 관료였다. 반면 메이지 정부 수립에 참여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사무라이들은 사쓰마 번 고향으로 낙향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정부군 오쿠보 도시미치와 대립하게 된다.

 

세이난西南전투와 정한론征韓論
급격한 사회변혁으로 몰락한 사무라이들은 사쓰마 번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부추겨 메이지 정부군과 전투를(1877)벌인다. 톰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가 이것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메이지 유신으로 기존 사무라이들의 특권은 사라졌다. 메이지 정부수립에 공헌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이 속한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주장했는데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조선침략으로 무마하려했다.
 

반대세력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선 침략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했고 두 사람의 대립으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을 가진 서구화된 신식 정부군을 전통적인 사무라이 군대가 이길 수는 없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패했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사무라이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개화기 요시다 쇼인과 함께 일본 최고의 지식인은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일본 엔화1만 엔의 인물이다.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교류하자는 탈아입구를 주장했다. 아시아 탈피를 통해 일본의 서구문명화를 부르짖었다. 게이오 대학의 설립자이자 ‘학문을 권함’이라는 책을 쓴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정신으로 서양기술과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다.
또한 실용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해야한다고 주장해 일본 제국주의의 뿌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옥균은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1882)의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몇 달 지내게 된다. 그 후 일본의 신의 없음을 깨달은 김옥균은 중국에 갔다가 암살되고 만다. <한국통사>를 쓴 박은식선생은 김옥균, 서재필 등 조선의 젊은 개혁가들이 갑신정변을 통해 일본에 이용당했음을 한탄했다. 정한론을 추구하는 일본이 조선의 개화를 도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이난전투(정한론정변政變 혹은 ‘메이지6년의 정변’)이후 일본은 관료주도로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세운다. 당시 유럽에서 통일국가를 이룩한 프로이센을 모델로 1880년대부터 산업혁명에 돌입했다. 당시 주요 수출품은 비단의 원료가 되는 생사(生絲)인데 대량 생산체제를 위해 많은 공장 노동자가 필요했다.
농촌의 소작인들은 점차 도시 노동자가 되어갔다. 우편(1871), 철도(1872), 전기(1887), 전화(1890)가 도입돼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가 됐다. 근대문명의 발상지 서유럽에 가까이 있는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 오스만 튀르크도 해내지 못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눈부신 발전은 이웃나라인 조선과 청나라에게는 불행이었다.

 

청일, 러일전쟁, 그리고 한일합방
동학농민혁명(1894)때 치안유지를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빼앗아 버렸다. 급속한 산업혁명으로 짧은 기간 서구사회를 모방한 일본은 고종의 아관파천(1896)이후 남하하는 러시아까지 이기며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했다.
러일전쟁(1904)때 만주에 파병한 젊은 병사들이 배탈과 설사로 죽자 직방 약을 만들라는 일왕의 명령으로 다이코 신약에서 정로환을 개발했다. 정로환은 병사들의 배탈, 설사를 멎게 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로환征露丸은 러시아를 정복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바꾸어 정로환正露丸으로 쓰고 있다.   7웅 중 2웅 청나라와 러시아에 승리함으로서 일본제국주의는 정한론을 실천하는데 있어 방해되는 걸림돌을 제거했다. 일본이 러시아를 굴복시킨 것을 본 영국, 미국 등의 강대국은 일본을 다시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을 두고 일본과 경쟁하기보다 협상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7월)을 통해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묵인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했고, 영국은 일본과 2차 영·일 동맹(1905년8월)을 맺어 인도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맺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호소한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사건(1907)으로 물러난다. 조선 침략에 선봉으로 나선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1909)당했지만 청,러,미,영 강대국들이 차례로 조선에서 손을 떼었기에 결국 한일합방(1910)이 돼 요시다 쇼인이 주창한 정한론의 완성판이었다.  페리의 개항 요구 후 일본은 짧은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뤘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영향으로 프로이센을 본 따 군사력을 앞세운 군국주의를 추구했다. 영·미식의 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하는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같은 팽창주의가 집단의식과 화합和을 중시하는 일본 국민성에 부합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집권자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상이 루소, 피히테, 니체 철학이다. 이들의 철학은 나치즘을 낳았는데 일본에서는 특유의 일왕 숭배의식이 더해져 점차 군사력을 중심으로 하는 군국주의적 전체주의국가로 변질되어갔다. 일본은 대대적인 사회개혁으로 작은 나라(번)들이 국경을 맞댄 지방분권적인 봉건국가에서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했다. 하지만 눈부신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과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큰 피해를 끼쳤다. 임진왜란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이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평화가 도래하자 공을 세운 사무라이들에게 줄 토지가 부족했다. 사무라이들에게 토지를 주기위해 조선침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이지 유신 이후 몰락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이라는 식민지가 필요했다. 이것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쟁탈전과도 관련이 깊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잉여생산품을 판매하기 위해 더 큰 시장을 필요로 한다. 일본은 내부의 불안정이 있을 때 화살을 외국으로 돌렸고 첫 번째 화살은 언제나 우리나라, 즉 한반도를 향했다.

 

미국을 美 와 米로 쓰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서양의 충격을 받는 단계에서 동아시아 3국은 각각 자국의 정신을 주축으로 한 바탕에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중국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조선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 조선의 ‘道/器’는 중국의 ‘體/用’, 일본의 ‘魂/才’에 비해서 훨씬 ‘理/氣’의 구분이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중국의 ‘中體西用’에 사용된 ‘體/用’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理/氣’라는 의문이 있지만, 오히려 ‘주체/작용’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또한 일본의 ‘화혼양재’의 ‘魂/才’ 개념은 대저 ‘理/氣’라고 하는 프레임과는 거리가 멀다. 정확하게 말하면 혼魂도 재才도 모두 ‘氣’의 개념이다. 이것과 비교해 조선의 ‘道=理’/‘器=氣’ 도식에서 이理가 기氣를 눌러 식민지가 됐다 .
 

개화파는 근대화를 기도했던 세력으로 갑신정변, 갑오경장을 주도했지만 모두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온건한 개화파는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모델로 ‘동도서기東道西氣’적인 변혁관을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해 급진 개혁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변법적變法的인 변혁관變革觀을 갖고 있었다. 즉 같은 개화파라고 해도 전통적인 유교의 ‘理’ 자체를 변혁하려는 급진파와 ‘理’는 온존시켜야 한다는 온건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자국의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이미 근대화의 길로 매진하고 있던 일본을 ‘理의 체현자=님’으로 우러러보는 경향으로 기울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국내에서의 다른 세력, 즉 청이나 러시아를 ‘님’으로 받드는 세력(친청, 친러파)과의 불화가 극심했다.
 

그리고 결국 갑신정변은 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갑오경장은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함으로써 공중 분해되었다. 당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비를 살해하는 등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이 조선인의 반발을 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이 부르는 아름다운나라 美國이고 일본이 부르는 국명이 쌀의 나라 米國이다. 한때 중국은 미국을 亞美利加로 불렀는데 여기서 美를 다시 써서 미국으로 정했고, 일본은 메이지시대 다시 메이리간米利堅이라고 부른데서 시작된다.
 

이후 중국식 명칭인 아미리가亞美利加란 말이 일본에 들어오지만 일본은 쌀을 미美대신 사용해 명칭을 亞米利加로 통용한다. 쌀의 나라라는 말에는 경제적관점이 들어가 있다. 근대화 이전에 쌀은 돈의 대명사다.
19세기말 일본인이 미국을 둘러본 소감은 쌀과 음식이 넘치는 풍요로운 나라로 집약될 수 있다. 중국은 미국을 돈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심성적, 감상적으로 화려하고 즐거운 나라로 본다. 일본이 형이하학이라면 중국은 형이상학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또 미국을 米國이 아닌 美國으로 부르는 것이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막는 주관적 배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한국은 중국처럼 미국을 아름다운나라 美國으로 대하고 있다. 중국문화의 영향이며 반일감정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한국이 처음 접한 미국의 이미지만 보면 美國이 아닌 麥國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국전쟁 후 미국의 배급식량 밀가루로 연명해야 했던 한국인에 비쳐진 미국의 이미지는 밀가루 때문이다. 한자로는 소맥小麥으로 풀이 되지만 小자 빼고 맥국으로 불렀음직 하지만 한국인의 눈에 비친 미국이 아니라 중국인의 눈에 비친 미국이 한국에 정착된 것이다.
 

중국이 아름다운 나라로 일본이 쌀의 나라로 부른 이유 중에는 미국을 처음 경험한 사람들의 배경과도 관련 지울 수 있다. 중국은 황제 측근의 권력자들이 미국을 처음 만났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지지하거나 직접 참가한 하급무사나 평범한 사람들이 미국을 처음 만났다. 중국의 노회한 권력자가 아름다운 나라로 신뢰하며 만나는 미국과 1871년 107명의 20대 전후의 젊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청년지사가 보는 세계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중국이 미국을 아름다운나라로 보는 다른 이유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같은 유럽제국은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에 가한 고통의 주범들이다. 마약을 팔고 땅을 빼앗고 역사유물을 강탈한 강도가 중국인에게 비쳐진 서양의 모습이었다.
 

미국은 그 같은 역사와 무관한 극히 예외적인 나라다. 유럽의 중국침략이 본격화 되던 19세기 중반의 미국은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힘든 시기였다. 1861년부터 5년간 이어진 남북전쟁과 이후의 뒤처리에 이어 신생국 미국은 중국을 괴롭히지 않는 유일한 나라로 남게 돼 중국인이 미국을 아름다운나라로 부르게 된 배경은 아닐지.
그런데 21세기 들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이 회사 이름에 화웨이華爲, 즉 ‘중화민국을 위하여’을 쓰거나 또는 일본이 쓰는 쌀미(작다는 의미로), 샤오미小米같은 상호를 씀으로서 미국을 얕보려는 심산은 아닌지 의심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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