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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사문제연구소 ‘제 24회 바다의 날’ 기념 선상세미나 자료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549호] 2019년 06월 03일 (월) 17:10:34 해양한국 komares@chol.com
   
 

본지 발행사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는 ‘제 24회 바다의 날’을 기념한 ‘제 24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시찰’을 5월 14일-18일 4박 5일간 개최했다. 해운업계 관계자 76명이 참여한 이번 세미나는 부산에서 고려훼리의 ‘뉴 카멜리아’호로 후쿠오카항으로 입항해 시모노세키항이 소재한 야마구치현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선상세미나는 5월 14일 부산 출항을 앞두고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유신’이라는 주제로 뉴카멜리아호에서 진행됐다. 해사문제연구소의 강영민 전무가 일본 근대화의 역사적인 무대인 야마구치현 견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의 주제발표를 맡았다. 발표내용을 전재했다.

 

   
 

이 글은 역사저널리스트 조용준이 지은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에는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를 소개하며,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까지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어, 읽을수록 흥미를 더하여 이를 선상세미나 참가자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개국이 1858년, 조선은 1876년으로 불과 18년의 시차인데, 어떻게 두 나라의 위치가 지배자와 식민지로 극명하게 달라졌을까요? 그 해답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서 찾을 수 있었고, 그 토대가 조슈(長州)였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조슈는 메이지유신을 가능케 한 일본 근대화의 산실(産室)이지만,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조선을 침탈한 일본 군국주의의 태반(胎盤)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한일관계가 최악인 지금 하필이면 하기(萩)에 가나?”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한일 양국은 일의대수(一衣帶水)-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지리는 바꿀 수 없기에 싫든 좋든 이웃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일제 36년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지일(知日)과 극일(克日)은 필요합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라(不入虎窟 焉得虎子)”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메이지유신 150주년과 레이와(令和) 원년의 역사적 전기에 하기를 비롯한 야마구치(山口) 지역을 탐방하는 이유입니다. 미진한 부분은 상기 저서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메이지유신의 태동, 삿초동맹
메이지유신 5년 전인 1863년 6월 27일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서 자딘 메디슨 상회 소속의 상선 한 척이 항구를 떠났다. 이 배에는 조슈(長州)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밀명을 받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는 다섯 명의 번사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해외로의 밀항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유학을 떠나는 길이었다. 일본인 최초의 유학은 이렇듯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했다. 이 다섯 명의 유학생 가운데 22세의 이토 슈스케라는 나중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있었다. 이들 유학생 소위 조슈 5걸 가운데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는 나중에 도쿄제국대학 공학부를 창설한 일본 공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엔도 긴스케(遠藤謹助)는 영국 기술자가 만들던 화폐를 독자적으로 주조하는데 성공한 조폐술의 개척자가 되었으며,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는 일본 최초로 도쿄 신바시와 요코하마 구간을 철도로 이은 일본 철도의 아버지가 되었다.


조슈 번에서 처음 유학생을 내보낸 때로부터 1년9개월 후인 1865년 3월 22일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구시키노의 포구마을 하시마에서도 사쓰마(薩摩) 번의 번사 19명이 영국 무기상 글로버상회 소유의 배를 타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 역시 사쓰마 영주 시마즈 히사미쓰의 허락을 얻고 실행에 옮겨진 번 개혁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조슈와 사쓰마는 에도막부 말기 270여개의 번 가운데 가장 먼저 개혁 인재양성을 위해 젊은이들을 유학 보냈다. 이 두 번이 가장 강경했던 존왕양이(尊王攘夷) 태도를 버리고 개항(開港)과 영이(迎夷)에 가장 적극적인 세력으로 바뀌는 것이 당연했다. 사쓰마와 조슈가 손을 잡고 막부 척결에 나서는 소위 삿초동맹(薩長同盟)의 배경에는 지금 상황에서 양이(攘夷)가 불가능하므로 오랑캐와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현실 인식과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이 깔려 있었다. 이런 생각이 결국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가장 핵심 동력이 되었다. 조슈에서 첫 유학생이 영국으로 떠난지 5년 만에 막부가 붕괴하고 중세 봉건제에서 벗어나 세상이 바뀌었으니,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2018년은 메이지유신 150주년이다. 메이지유신은 일본만의 역사가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메이지유신에 의해 일본은 비로소 근대국가가 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서양식 군제와 무기에 의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찍이 꿈꾸었으나 실패했던 대륙진출을 재차 도모했다. 그 길목 초입에 조선이 있었기에 그들은 가장 먼저 조선 병탄에 나섰다. 이후 이 땅에서는 열강의 힘과 실리에 의해 능욕을 당하는 치욕의 역사가 지속되었다.

 

메이지유신의 거점 조슈, 사쓰마, 사가번의 공통점
메이지유신은 실질적으로 조슈, 사쓰마, 사가(佐賀) 3개 번이 주도하고 달성하였다. 나중에 도사(土佐) 번도 합류하였지만, 다 된 밥에 숟가락 얹기였다. 이들 연합은 막부 말기 270여개 번 가운데 고작 3개의 번에 불과하고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번을 합치더라도 10개를 넘지 못했다. 실로 엄청난 수적 부족, 힘의 열세를 이들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해답을 조슈, 사쓰마, 사가 3번이 가진 공통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 조선침략에 가장 앞섰던 번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슈의 모리 데루모토가 제6군 병력 3만명,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제4군 병력 1만명으로 조선침략의 주축부대를 형성했다. 사가의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1만2,000명의 병력으로 제2군에 속했다. 조슈의 병력은 모든 번을 통틀어 가장 많은 수자이다. 메이지유신의 핵심 3개 번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출정시켰다. 이 3개의 번이 조선에 가장 많은 병력을 보냈다는 것은 이들이 조선인을 가장 많이 납치해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중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어낸 공주 출신 이삼평(李參平)이 있었다. 이로 인해 사가의 아리타(有田)는 일본 전역에서 도자기를 전파한 도자기 메카가 되었고, 조슈의 하기(萩)는 진주에서 납치해온 이작광(李勺光) 형제에 의해 일본인들이 가장 갖길 원하는 찻사발 다완의 생산지가 되었다. 남원 출신 심수관(沈壽官)이 전수한 사쓰마의 나에시로가와도 사쓰마야키라는 브랜드로 명성을 날렸고,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에 걸쳐 서양에 엄청난 양을 수출해 부국강병에 필수적인 자금 확보에 튼튼한 받침대가 되었다. 3개 번이 다른 번보다 앞서서 서구식 군제개혁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도자기 수출과 내수를 기본으로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모두 도쿠가와와 맞섰던 서군 세력으로 패권전쟁(覇權戰爭)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과 싸웠다는 점이다. 그러니 도쿠가와 막부와 애초부터 좋은 감정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일본열도 서쪽에 위치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예부터 선진문명을 가장 일찍 받아들인 지역이다. 한반도로부터의 각종 선진기술은 물론 유럽의 총과 가톨릭도 가장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 영국의 무기상 글로버와 밀착관계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무기를 사들였으며, 조슈 5걸의 영국유학도 자딘 매디슨상회의 일본지사에 해당하는 글로버상회의 주선으로 그 첫 단추를 꿰었다. 이렇게 글로버와 매디슨상회의 도움으로 영국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조슈와 사쓰마의 중추세력이 되었기에 이들을 영국에서는 매디슨 보이즈(Matheson Boys)라 부른다.

 

시모노세키 전쟁과 조슈의 근대화
 1858년 미국의 강한 요구에 따라 막부가 일미통상수호조약을 맺고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비슷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막부의 쇄국체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것이 안세이(安政)5개국조약이다. 그러나 고메이(孝明) 일왕은 화친조약이든 뭐든 통상조약에는 반대한다며, 안세이조약을 공인하지 않았다. 또한 막부에 불만을 가진 양이파(攘夷派)는 조정의 양이파 신하들과 존왕사상으로 결합되어 마음을 합치게 되었고, 자연히 존왕양이(尊王攘夷)가 번론(藩論)이 되었다. 그러자 조슈의 번사들은 조정의 양이파 고관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간접적으로 교토 조정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도 고메이 왕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각 번에 통보하였다. 막부는 각국 공사들에게 개장항 폐쇄 및 외국인 퇴거를 서면으로 통보하면서 양이 실행체제를 갖추는 한편, 이와 동시에 구두로 폐쇄실행 의지가 없다는 취지를 전하고 나중에 서면으로도 폐쇄철회를 통보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막부가 행동하지 않자 존왕양이를 독자적으로 실천하고 나선 곳이 바로 조슈 번이었다.

조슈는 동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해운 요충지 시모노세키(下關) 앞바다 간몬(關門) 해협에 포대를 정비하여 1,000명의 병사를 주둔시키고 범선 군함 2척과 증기 군함 2척을 배치하고 해협봉쇄 태세를 갖추었다. 이후 간몬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과 프랑스의 연락선, 네덜란드의 동양함대가 해안포대의 공격을 받고 배에 명중하여 병사들이 사상하며 도주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자국의 선박들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으나 쇄국시대 이전부터 막부와 오랜 우호관계가 있었던 네덜란드와 달리 미국과 프랑스는 크게 분노하여, 미국은 요코하마에 입항해 있던 군함을 출항시켜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포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항해하며 항구에 정박중인 조슈의 군함을 조준 포격하여 격침시켰고 이어 해안포대에도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요코하마로 귀환했다. 프랑스도 동양함대 2척을 간몬해협에 진입하여 함포사격에 이어 해병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점령하고 대포를 파괴하였다. 조슈 번은 구원부대를 보냈지만, 함포 포격에 막혀 전진할 수 없었고, 그 사이 프랑스 해병대는 유유히 철수하여 함대와 함께 요코하마로 귀환했다. 이후 교토 조정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조슈 번을 비롯한 양이파 세력은 후퇴하고 많은 지사들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일왕과 막부에게 동시에 배척을 받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조슈 번은 양이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시모노세키 해협 봉쇄를 계속 유지했다. 시모노세키 항해로가 막혀 있는 것은 일본과 무역을 하는 서양 열강에 매우 큰 불편을 초래했다. 게다가 막부가 요코하마 항구폐쇄 의사를 보이자, 그동안 직접 피해가 없어 관망하던 영국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올콕 공사는 일본인으로 하여금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문명국의 무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프랑스와 미국, 네덜란드에게 조슈 번을 응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모두 동의함으로써 1864년 4개국 연합의 무력행사가 결정되었다. 당시에 영국에 유학하고 있던 조슈 번사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4개국 연합의 조슈 번 공격이 임박한 사실을 깨닫고,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영국의 국력과 기계 기술이 일본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던 두 사람은 전쟁을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토와 이노우에가 3개월에 걸쳐 요코하마에 도착해 올콕 공사를 면회하고 설득하기 위해 조슈로 돌아갔으나 강경론에 막혀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해 7월 영국 해군의 쿠퍼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4개국 연합함대 17척의 5,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연합함대의 공격이 임박한 사실을 안 조슈 번은 드디어 해협항해 보장과 전쟁 중지를 결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어선에 태워 협상에 들어가려 했으나 함대는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연합함대는 시모노세키 포대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고, 2,000명의 기병대와 100문의 포에 불과한 조슈 번은 화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라 제대로 응전도 못하고 한 시간 만에 싱겁게 끝나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시모노세키 전쟁이다. 연합군 해병대는 함대에서 내려 포대를 점거한 후 포를 모조리 파괴하고 시모노세키 함락을 목표로 내륙으로 진군하면서 조슈 부대와 교전하였다.
 

전의를 상실한 조슈 번은 다카스키 신사쿠를 연합함대 지휘관 쿠퍼에게 보내 강화교섭을 시작했고, 이때 통역을 이토 히로부미가 맡았다. 약간의 진통 끝에, 외국선박들의 자유로운 해협통과 보장, 석탄과 물 그리고 식량 등 필수적인 물품 보급, 태풍 등으로 조난당할 경우 상륙허가, 해안포대 설치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영국은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을 할양받은 것처럼 시모노세키 앞바다의 작은 섬 히코시마(彦島)에 대한 토지할양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이며 거절하여 관철시켰다. 한편, 바로 그날부터 나가사키의 자유무역 항구 데지마(出島)와 같은 외국 선박에 대한 물자판매 장소를 지정하는 등 개방조처로 무역을 시작하여 막부를 당황시키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슈는 군사력으로는 서양을 물리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양이도 불가능하므로 이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키워야겠다는 각성으로 적극적인 근대화의 길로 급선회했다.
 

 
조슈 정벌과 막부의 몰락
시모노세키 전쟁을 전후하여 교토수호대(京都守護隊)가 조슈, 도사 번 등의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습격하여 40여명의 양이파 번사들을 살해하는 이케다야 사건이 일어났고, 강경해진 조슈 번은 부대를 교토로 파견하여 국면을 타개하려 했으나 교토를 지키는 아이즈(會津)와 이세구와나 주력부대가 이를 막고 사쓰마 부대가 원군으로 달려와 격퇴 당했다. 이것이 긴몬의 난(禁門의 變)이고 조슈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이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조슈 번의 행동에 막부와 고메이 왕은 모두 골머리를 썩었으며, 긴몬의 난이 벌어진 다음부터 원수가 되었고 조슈 번은 악동이 되어 이를 응징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는 것은 일왕이나 에도 막부나 커다란 치욕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슈를 징벌하기 위한 제1차 조슈 정벌이 이루어졌다. 조정은 조슈 번을 적으로 선포하고 번주인 모리 다치카와 모토노리 부자의 직위를 빼앗고 체포령을 내렸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일왕과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고 교토 정국을 주도하던 조슈가 이제 타도의 대상이 된 것이다.

 

1864년 격노한 고메이 왕이 막부에게 조슈를 토벌하라는 칙치를 내리자, 쇼군 이에모치는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를 총대장으로 삼아 15만의 토벌군을 구성하였다. 토벌군은 히로시마에 사령부를, 고쿠라(小倉) 성에 부사령부를 설치하고 12월 16일을 총공격 날짜로 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슈 번은 이와쿠니(岩國) 번주 요시가와 쓰네마사를 내세워 정벌군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교섭을 추진하였다. 조슈는 막부군에게 긴몬의 난 당시의 책임자들을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화평을 요청했고, 당시 막부군을 이끌던 사이고 또한 조슈를 상대로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따라 조슈의 가로(家老) 3명과 5명의 참모들을 할복 또는 참수시키고, 5명의 중신들을 추방하는 한편, 사죄문서를 제출함으로써 막부는 토벌군을 해산하여 제1차 조슈 정벌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조슈의 사죄와 토벌군 해산으로 사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막부의 명령인 조슈의 모리 부자와 5명의 중신을 에도로 데려와 처벌하는 문제가 모리의 불응으로 지체되었다. 그후 보수파의 실권장악으로 후쿠오카로 도망쳐 은거하던 다카스키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의 스모선수 부대 역사대(力士隊)와 이시카와 코고로가 이끄는 유격대(遊擊隊) 등 여러 부대가 조후(長府) 코잔지(功山寺)에서 모여 군대를 일으킨 쿠데타로 막부에 복종하는 속론파들이 제거되고 다시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천하의 형세를 바꾼다는 의미의 가이텐(回天) 의거라고 한다.

 

이들 쿠데타 주역들이 시모노세키 전쟁, 조슈 정벌, 보수파의 번 장악 등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뚫고 전세를 역전시키고 유신으로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엄청난 투지요 끈기라고 할 수 있다. 상급무사들에게 밟히면서도 잡초처럼 살아왔던 하급무사들의 의기투합(意氣投合)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존왕파의 거점 조슈 번이 역적으로 몰린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불행이 아니라 다행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왕의 권위나 다이묘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무력과 민중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양이를 위한 막부 토벌이 아니라 막부 타도가 완전한 목표가 되는 전략을 확실히 세울 수 있었다.
 

그후 다카스키와 조슈 5걸은 시모노세키를 외국에 직접 개항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시모노세키가 조슈 번에서 갈라져 나온 지번인 조후(長府) 번의 영토였기에 이를 조슈 번의 영지와 교환하려다가 떠돌이 무사인 양이파 로시(浪士)들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변 위험을 느껴 벳부와 대마도와 시코쿠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 사태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사쓰마와 조슈가 힘을 합쳐 막부를 타도하는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추진해 후일 유신 3걸의 한 명이 되는 가쓰라 고코로, 기도 다카요시 덕분에 진정되었다. 이에 조슈 번은 막부에 순종하지만 무기와 군대를 정비한다는 체제 무비공순(武備恭順)을 새 번론으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일반 정무를 관장하는 국정방, 재정과 민정을 담당하는 국용방을 정사당(政事堂)에 신설하고 무라타 조로쿠에게 군제개혁의 자문을 구하여 무라타는 번정에 참여하고 근대 서양식 군대를 창설하고 수확량에 부대의 규모를 맞춘 전번일치(田藩一致) 군제로 정비하였다. 번의 모든 무력집단은 단일지휘체제로 편입되고 사병은 철폐되었으며, 지번이나 실세 가신의 군대도 모두 본대로 들어왔다. 전번일치제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봉건제 군대를 해체하고 절대주의적 상비군 체체로 나아가는 길을 연 혁신적 개혁조치였다. 무라타는 근대화한 조슈 번 병사들을 지휘하여 제2차 조슈 정벌의 승리 주역이 되었고 보신전쟁(戊辰戰爭) 때도 신정부군을 이끌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태정관제에서 군무를 총괄하는 병무성의 초대 차관을 맡아 사실상 일본 육군의 창시자, 시조로 불리며, 야스쿠니 신사의 중앙에 그의 동상이 있다.
 

조슈 번이 제1차 정벌 때의 항복조건을 지키지 않고 모리 번주 부자의 에도 출두를 사실상 거부하는데다 항전파가 다시 실권을 장악하자, 쇼군은 재차정벌과 마찬가지로 오와리 번주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직접 토벌에 나섰다. 3,500명의 조슈군에 비해 막부군은 총 10만2,000명이라는 압도적인 병력 우세에도 4곳으로 동시에 쳐들어갔으나 10일 만에 퇴각하였다. 이에 막부는 히로시마 번에 출병명령을 내렸으나 거부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히로시마 번이 막부 명령 불복은 모리 가문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히로시마는 모리 가문의 고향인 게이슈가 히로시마 서부지역에 있었고, 과거 도요토미 시절 모리 데루모토가 규슈 정벌의 무공으로 이 지역을 관할하는 다이묘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인연으로 조슈 정벌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오사카 성에 머물고 있던 쇼군 이에모치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는 변고가 생겼고, 워낙 젊은 나이였으므로 후계구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4달 동안 구심점인 쇼군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쇼군이 사망하던 바로 그날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 부자의 연명으로 조정의 마지막 관백 니조 나리유키에게 조슈 토벌에 반대한 백서가 제출되었다. 관대한 조서를 내려 조슈 토벌군을 해체하고 막부 조직을 갱신하고 공업을 일으키는 정체개혁(政體改革)을 건의였다. 이는 사쓰마가 조슈 정벌에서 손을 떼고 조슈와 손을 잡았음을 의미한다. 그후 규슈 전투에서 막부군이 계속 패전하고 번성인 고쿠라 성마저 함락되자, 고메이 왕은 쇼군의 죽음을 핑계로 전쟁을 중단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 당시 막부군은 여전히 봉건제 군역제(軍役制)에 기초한 무사집단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무기성능도 조슈 군에 뒤떨어졌고 각 번에서 차출된 15만의 연합군은 자신들이 왜 조슈를 정벌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토벌군이 공식 해산되자 제2차 조슈 정벌도 종결되었다.
 

  
메이지 일왕의 등장과 대정봉환
1867년 막부의 토벌군이 해산되면서 제2차 조슈정벌도 종결되었다. 형식은 휴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슈번의 승리였다 필연적으로 막부의 정치적 권위는 몰락하고, 2차 조슈정벌은 에도막부 지배체제가 붕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슈와 사쓰마는 더 이상 막부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고, 주요 번들과의 열후회의로 정국을 주도했다. 6월이 되자 사쓰마의 주도로 교토에서 사후회의가 열렸다. 사후회의는 원래 사쓰마의 주도로 유력한 영주 3인과 웅번의 최고 권력자 1인으로 구성된 합의체제로 쇼군과 섭정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조정과 막부의 공식기관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쓰마는 사후회의를 계기로 정치주도권을 막부로부터 웅번연합(雄藩聯合)으로 가져와 조정을 중심으로 한 공무합체의 정치체제로 변혁을 꾀했으나, 쇼군이 이를 돌파하는 묘수를 생각하고 실행함에 따라 그 시도가 이내 좌절됐고, 결국은 무력에 의한 쿠데타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막부가 완전히 항복한 것은 아니라 여전히 재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가 뜻밖에 찾아왔으니, 바로 1867년 고메이 왕이 재위 21년만에 사망했다. 사인은 천연두로 진단되었으나 막부 토벌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도 재판과정에서 이토의 15개 죄목을 열거했는데, 15번째 항목이 바로 메이지 일왕의 아버지 고메이 왕을 죽인 죄이다. 안중근 의사는 막부 토벌파가 유신에 비협조적인 고메이 왕을 살해하고 어린 메이지를 이용해 유신을 펼치려 했다고 본 것이다.
 

막부 토벌파를 항상 탄압해오던 고메이의 죽음으로 당시 14세의 소년 메이지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궁중세력은 이를 호기로 보고 사쓰마와 조슈의 번주에게 막부를 토벌하라는 일왕의 비밀명령 토막의 밀칙(討幕密勅)을 내렸다. 이렇듯 급박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다. 무력에 의한 막부 토벌이 진행되고 있음을 눈치챈 요시노부가 왕이 정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밑에서 자신이 실권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정권을 왕에게 모두 바치겠다고 선언하였다. 왜 대정봉환이 승부수가 되는가 하면, 아무런 힘이 없어진 막부를 굳이 토벌할 구실과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요시노부가 이렇게 묘수를 던지자, 메이지는 바로 다음날 이를 덥석 허락하였고, 이에 당황한 것은 막부 토벌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는 안정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끝까지 무력으로 막부를 토벌하려고 작정하였다. 막부 토벌파는 막부의 군사와 경찰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며, 그 사이에 쿠데타 준비를 진행시켰다. 이 무렵에는 농민으로 구성된 막부의 보병부대에서 대량의 탈주병이 나오는 등 막부의 통제력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막부 토벌파는 1868년 1월 3일 쿠데타에 성공하여 쇼군제 폐지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만민을 구제한다’고 포고하였다.
 

왕정복고와 폐번치현
막부 토벌세력이 1868년 쇼군제 폐지와 왕정복고를 선언함으로써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이것이 지방 호족과 사족의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새 정부는 재정부족으로 군자금이나 정부조직 유지비도 매우 곤궁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미쓰이, 고노이케(鴻池) 등 대상업자본가에게 강제적으로 돈을 빌리고 불환지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세금경감과 불환지폐를 정화로 교환해줄 것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런 민중봉기와 병행하여 양이론을 여전히 고집하는 사족과 고관들의 반정부 투쟁도 활발해졌다. 이 와중에 유신 10걸에 속하는 인물들이 살해되고, 양이파에 의한 개화파 고관에 대한 암살사건과 반란계획이 계속 발생하였다. 특히 판적봉환(版籍奉還) 이후 사족정리의 희생자인 하급무사들이 민중봉기와 결합하는 것은 정부로선 중대한 위협이었다. 이러한 사족봉기 여파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번들이 생겨났다. 몇몇 번들은 파산하거나 번을 폐할 것을 정부에 청원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또한 국토와 국민을 정부가 직접 지배하지 않으면 매일같이 확대되는 정부기구를 유지할 재원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정부는 1871년 번을 폐지하기로 하고 전국의 번 지사(知事)를 일제히 면직시키고 261개 모든 번을 폐하여 도쿄, 교토, 오사카를 3부(府)로 잡고 그 아래로 43현(縣)을 설치하고 중앙정부가 자유롭게 임면하는 관리가 지방관이 되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것이 폐번치현(廢藩置縣)이다. 새롭게 화족에 편입시킨 기존 번 지사들에게는 도쿄 이주를 명하고 각 번의 무기와 성곽을 접수하였는데, 폐번치현은 신정부가 번의 부채를 떠안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큰 저항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막부와 번의 유지체제는 완전히 해체되고 근대 일본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건설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메이지유신과 대규모 구미 시찰단
메이지유신 신정부가 유신 성공 3년후인 1871년 그해 재정수입의 2%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해 무려 100명이 넘는 사절단을 구미 각국으로 시찰을 보냈다. 이들은 1년10개월 동안 구미 12개 나라를 도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시찰을 통해 많은 각성을 했다. 그중에 가장 커다란 깨우침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식 군국주의 노선이었다. 유신의 핵심세력은 1862년 비스마르크의 “독일은 자유주의가 아닌 실력이 필요하고, 당면한 국가 현안은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쇠(鐵)와 피(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이른바 철혈(鐵血)연설에서 새로운 일본의 미래를 보고 그 길로 나서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신정부는 군국주의 채비를 차근차근 갖춰 나갔으나 조선은 서양을 철저히 배척하겠다고 대원군의 지시로 전국 곳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있었다.


폐번치현으로 중앙집권 국가수립에 성공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정부 주요직이 48명으로 당시 정부 관료의 절반에 해당하며, 수행단까지 합치면 100여명의 대규모였다. 이들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구미국가와 조약 개정의 예비교섭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양 선진문명을 현지에서 시찰하고 새로운 일본건설에 참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약 개정 교섭은 처음부터 완전한 실패였기에 이후 친선과 사절에 중심을 두었다. 이들 사절단의 경비는 1백만엔으로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일본이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절단은 귀국 후에 무려 100여권의 시찰 실록을 남겼는데, 이토록 대대적인 외국 시찰단 파견은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폐번치현을 단행했을 때 신정부의 실력자들은 모두 젊었다. 전권부사였던 이토 히로부미만 해도 겨우 30세였다. 그들은 구미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두루 살펴본 후 철도, 금융, 화폐, 상공업, 교육, 군대 각 방면의 광범위한 자료들을 남겼다.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
조슈 번의 마지막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영주의 신분이면서도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하급무사의 아들인 요시다 쇼인에게 사사를 받았다. 다카치카는 “유학자의 강의는 진부한 말이 많아 졸음이 오지만, 쇼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무릎을 치게 된다”고 말해 쇼인을 높이 평가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인 요시다 쇼인은 페리호의 내항 이후 서양 열강을 배척한다는 사상을 버리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고의 일대전환을 하였다. 그는 옥에 갇혀 쓴 유수록(幽囚錄)을 통해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주창하여 일본 제국주의 팽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출옥하였으나 영지에 유폐처분을 받아 1857년 숙부가 운영하던 글방의 이름을 물려받아 조슈 번의 중심이던 하기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었다. 바로 여기에서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로써 하기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들이 즐비하게 태어난 본고장으로, 조선침공을 통해 대한제국을 병합한 정한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쇼인은 막부 반대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안세이대옥(安政大獄)때 다시 투옥되어 에도에서 1859년 처형되었다.

 

정한론과 일본의 정치 일번지 조슈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한론(征韓論)을 검토하던 당시에는 정한론에 반대하였다. 외국 정벌보다 내치가 더 시급하다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태도를 바꾸어 목숨을 걸면서까지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그가 이렇게 마음을 바꾼 까닭은 유신 이후 각종 정책이 그의 의도와 다르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관료주의(官僚主義)의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가 아니라 사족(士族) 중심의 군사정권(軍事政權) 수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정황이 점점 더 사족에게 불리해지자 조선침략으로 회생의 길을 열고 기회를 보아 다시 사족이 집권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런데 원래 정한론을 꺼냈던 당사자들인 기도와 오쿠보 등이 외국사절로 나가 있다가 차례로 귀국하여 지금은 내치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정한론에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사족이 부활하여 현 체제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길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내각에서는 정한파를 모두 사직시켜 유신 3걸은 기도와 오쿠보의 정한 반대, 사이고의 정한 주장으로 대립하였는데, 그 실상은 권력투쟁이었다. 이렇듯 정한론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쓰마로 돌아간 사이고는 무장봉기를 통해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을 일으켰고, 그 결과 패배로 끝나자 세상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외부 침략보다 내정우선을 부르짖던 그는 권력투쟁의 승리로 자신 중심으로 정부가 수립되자, 그 전부터 만들어 놓은 계획에 따라 대만정벌을 감행했고, 조선에 대해서도 강압적으로 나왔다. 그는 영국의 베이징 주재공사로부터 일본이 대만으로 향하지 않고 조선으로 진출하면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영국은 극동에서 최대의 적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9월 일본 군함은 불법으로 조선 영해에 들어가 강화도 포대를 도발하여 발포하게 만들고, 그 죄를 문책한다는 구실로 무력으로 겁박하여 한일수호조약 즉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강요했다. 강화도조약 제1조는 ‘조선은 자유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여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저의가 도사리고 있는 문구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치외법권(治外法權)을 가지게 되었고, 무역에 관한 부속문서에서는 조선에 대한 수출관세를 없앴으며, 더구나 조약의 유효기간도 정하지 않아 이는 곧 조선 종속화 조약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옥중에서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러시아, 미국과 강화가 일단 정해지면 우리 쪽에서 이를 어겨 오랑캐에게 신의를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만 규정을 엄격히 하고 신의를 두텁게 하여 그 사이 국력을 배양하여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인도차이나를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게 잃은 바를 토지로써 조선과 만주에게 보상받아야 한다.” 미국이나 러시아에게는 저자세로 일관하여 교역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조선과 만주를 정복하여 영토로 보상받는다는 주장이니 황당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쇼인의 제자인 기도 다카요시가 그대로 받아들여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했고, 오쿠보 도시미치도 이를 정책으로 시행했다. 또한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조약 체결 직전 일본을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가 필리핀과 조선을 양국이 나누어 갖자는 가쓰라 태프트밀약(密約)을 하였는데, 가쓰라 역시 조슈 번 나가토(長門) 출신이다. 당시의 일본 군 수뇌부는 국정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만 원정만 해도 정부가 출병을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군사령관 사이고 쓰구미치가 독단으로 출병하고 정부가 추인하게 했다. 강화도 사건도 해군이 정부보다 앞서 일으키고 정부가 추인하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보면 요시다 쇼인에게 사숙(私塾)을 열어 후학을 가르칠 기회를 준 모리 다카치카는 그의 20대 할아버지 모리 테루모토가 조선에 쳐들어와 수많은 사기장(陶工)들을 끌고가 조슈 번 번성의 기틀을 만든 것처럼, 메이지 유신을 배후에서 성공시킨 최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요시다 쇼인으로, 쇼인에서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 기도와 이토에서 기시 노부스케로 이어지는 한반도에 대한 저들의 생각은 현재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아베 총리가 태어난 곳은 도쿄이지만, 본적지는 야마구치현 나가토 시로 옛 조슈 번이며 선거구도 시모노세키와 나가토이다. 그가 입각하자마자 요시다 쇼인의 묘소를 참배한 행동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야마구치현 하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집은 물론 공부했던 쇼카손주쿠, 기타 유신 핵심인사 관련 사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변두리 시골에 해당되는 야마구치현에서 역대 총리 62명 가운데 9명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는 무사 지위도 얻지 못한 하급 신분이었지만, 영국 무기상의 도움으로 영국유학을 갔고, 막부 토벌에 편승함으로써 45세에 일본 초대 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정계 중심에서 물러난 후엔 조선통감부 초대 총감으로 아시아 침략에 앞장서면서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켜 한일합방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현재 일본 정치인 가운데 야마구치현 출신이 30%, 사쓰마의 가고시마현 출신이 30% 정도로 절반을 넘다는 사실은 1866년 삿초동맹이 낳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 따른 권력장악(權力掌握)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긴몬의 정변 이후 견원지간이던 사쓰마와 조슈가 일본 근대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삿초동맹을 맺게 된 것은 난세의 영웅이라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절묘한 중재 때문이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으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화해시키고 서로 힘을 모아 막부 토벌과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 데에 공헌하였다.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 ‘료마가 간다’에 ‘왕비의 기이한 꿈’ 이야기가 나오는데, 꿈에 료마가 나타나 자신이 우리 해군을 수호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 국민들의 공포심을 지우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 만든 선전물로 보이나 이로 인해 료마는 더욱 일본의 구국영웅으로 부각되었다. 료마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인 대정봉환, 의회개설, 관제개혁, 조약개정, 헌법제정, 해군창설, 육군창설, 통화정책을 제안했고, 조슈에 무기를 밀거래하고 사쓰마에 쌀을 공급한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가메야마사추(龜山社中)를 세워 조슈와 사쓰마를 삿쵸동맹으로 이끌었으며, 가메야마사추에서 사명(社名)을 바꾼 민간 해군양성소 해원대(海援隊)가 시고쿠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에 의해 미쓰비시로 이어져 재벌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일본은 조슈(長州)의 하급무사들에 의해 막부타도(幕府打倒), 왕정복고(王政復古)에 이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져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했으나 군부와 재벌에 의한 제국주의(帝國主義)로 이어져 침략전쟁(侵略戰爭)을 벌이다가 패망하는 역사의 궤도를 지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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