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해운의 현황
그리스는 2010년 재정위기로 국가 부도위기를 맞았으나 그동안의 꾸준한 개혁으로 2017년에는 GDP가 1.4% 성장하면서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거의 매년 부의 성장을 보였으나 이제 종지부를 찍고 어느 정도 회복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IMF와 OECD는  올 해 그리스의 경제성장률을 각각 2.0%와 2.3%로 전망하고 있기도 하며, 오는 8월에는 구제금융에서 벗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 S&P, 피치사 모두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스 국민총생산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큰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관광과 해운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선주조합(Union of Greek Shipowners)1) 에 따르면, 2017년 해운업을 통해 서비스수지상(the Services Balance of Payments) 벌어들인 외화가 91억 유로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이는 GDP의 5%에 달하는 금액으로 그리스 경제와 국제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운의 서비스수지상 외화 유출을 제외한 순수한 수입은 약 41억 유로로 보고되고 있다. 그리스의 인구는 세계 인구에서 0.15%에 지나지 않으나 세계 해상무역의 20%를 그리스 선대가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7년 그리스 선대 현황을 보면 1,000gt 이상의 선박 수가 5,281척으로 총선복량이 3억 8,726만 dwt에 달하는 선복량으로 세계에서 1위의 선박보유국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세계 선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6.72%에 이른다. 그리스가 보유하고 있는 선박 중 1만dwt 이상의 선박을 종류별로 보면, 벌크선 2.189척, 탱커선 1,015척, 컨테이너선 406척, LPG선 104척, LNG선 82척 등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리스 해운업은 주로 벌크와 탱커부문에 집중하고 있어 시장이 완전 경쟁적이며 변화하는 세계경제 환경에 매우 유연하게 잘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선주들은 그리스 선원 4만명 이상을 그들의 선대에 승선시키고 있으며, 그리스 해운기업은 600여개에 달하고 이들 기업에 약 15만명이상이 종사하고 있다. 또한 해운관련 기업이 2,000개이상 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리스해운의 태동
이처럼 그리스 경제에 있어 관광 다음으로 중요하고, 세계 해운을 리드하고 있는 그리스의 해운의 발자취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는 세계해운을 주도하고 있는데, 아마도 페니키아인들이 먼저 창안·제작한 삼단노선이 고대 그리스에 전해지면서 그리스가 BC 7세기부터 BC 4세기까지 지중해를 지배하며 해양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리스는 기원전 5세기(480년)에 페르시아와의 2차 전쟁 때 살라미스해전에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이 이끄는 해군이 대승을 거둔 후 해상에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보다 훨씬 전에 트로이와의 전쟁에서도 많은 군사들이 배로 이동하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의 침입을 대비해 해군력을 집중적으로 키웠는데, 이는 아테네가 지중해와 에게 해를 무대로 교역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에도 아테네는 해군력을 지속적으로 육성하여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등에도 식민지를 개척하기도 하였으며 에게 해에 접해 있는 소아시아 지역과 에게해 상에 있는 섬들을 방위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에는 약 6,000개의 섬이 있고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227개이며 100명 이상 거주자가 있는 섬은 78개라고 한다. 이러한 많은 섬이 서로 상호 교류하려면 해로를 이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안전한 왕래를 위해서는 튼튼한 배를 제작하는 기술이 뛰어나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부터 해운은 그리스의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 후 비잔틴시대(AD 330~1453)와 오스만제국시대(1299~1922)에도 에게해와 지중해에서 해상운송 및 무역에 큰 두각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821년부터 1829년까지 그리스혁명 즉 독립전쟁이 전개된 후 1860년대는 그리스의 해운이 크게 붕괴되었으나, 세계2차대전 시 연합군에 가담하여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그러한 점이 인정을 받아서 그런지 종전 후 미국으로부터 수송선으로 사용하던 Liberty선대 중 100여척을 구입하면서 그리스의 해운업은 재기의 계기를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해운과 키오스 섬2)
최근 그리스 출신 해운금융학자를 만나면서 그리스 유력 선주들이 특정 지역에서 많이 배출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 어느 지역인지를 물어서 알게 되었다. 그리스의 변방으로 에게해 동북쪽에 있는 섬으로 우리에게는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곳이다. 터키 이즈미르 지역과 가까운 섬 키오스[Chios(그리스어      )]라는 곳이다. 특히 올 7월 중순에 아테네경제경영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그곳 교수와 대화 중에 다시 확인하고 그 후 그리스의 해운에 큰 족적을 남긴 선주들을 각종 문헌을 통해 살펴보기 시작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 해운업의 40%를 키오스 섬 출신 선주들이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섬은 그리스 섬들 중 5번째로 큰 섬이며, 주민은 5만명이 조금 넘고, 면적은 842 제곱마일 정도이다.

오늘날 키오스가 그리스의 해운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이 된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자. BC 477년 키오스섬은 도시국가 아테네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델로스동맹국의 한 국가로 참여할 시기에도 아테네를 제외한 다른 도시 국가에 비해 해군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레폰네소스동맹에 속한 코린토스가 아테네 다음으로 해군력이 강했으나 델로스동맹 내에서는 레스보스와 더불어 가장 많은 군선을 보유하였다. 보통 군선 한 척당 승선 인력이 200명에 달했는데, 아테네는 평화 시 100척을, 전쟁이 있을 때는 200척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키오스는 그 당시 아테네의 1/5인 정도 약 40~50척 정도 보유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최대 1만명에 달하는 해군을 갖게 되는 셈이다. 당시 인구 등을 감안하면 키오스가 해상세력 육성에 온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뿌리로 인해 1822년 이 섬에서의 일어난 독립투쟁이 일어나면서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런던, 마르세유, 피래우스 등으로 이주하여 해운업을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 키오스섬이 오스만 터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자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여 활동하던 선주들이 고향으로 귀국하면서 키오스는 그리스해운 부흥의 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4) 이 섬의 Vrontados, Chora, Kardamyla, Oinoussai 등의 지역에서 선주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섬은 15세기 중엽 비잔틴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약 400여년 동안 받게 되었는데, 이 섬은 암흑시기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고 해상교역을 활발히 전개하며 해운력을 길러 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5)

한편, 키오스 출신 선주들을 비롯해 그리스 선주들은 1912년 발발한 발칸전쟁 그 후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쪽에서 있으면서 군수물자의 수송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전쟁 후 150여척의 배가 소실되어 그리스해운의 수송능력은 전쟁 참여 전에 비해 반으로 위축되었으며, 유능한 선원도 150여명이나 희생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이처럼 크게 줄어든 해운력의 회복을 위해 정부는 1917년 해운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는 법안을 제정하는 등 해운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후 키오스 출신 선주들은 대량의 중고선을 구입하여 해운시장의 회복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리스 선대는 다시 연합군에 가담하고 군수물자를 수송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리스 선박 중 많은 선박이 파괴되고 선원의 희생 매우 커 또 다시 그리스 해운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대전 후 미국은 군수 물자 수송선으로 대량 건조한 ‘Liberty선박(자유선)’을 매각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그리스에 배당된 척수는 100척이었으며, 키오스 출신 선주들도 이들 화물선을 구입하여 해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2차 대전 직후 뉴욕은 전후 그리스 해운의 재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키오스 출신 선주들은 이곳에서 용선, S&P, 법률, 자금 및  보험업무, 선용품공급, 선박수리 등과 관련된 업무를 취급하며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뉴욕에 거주하는 키오스 출신 선주들은 그리스 전통해운 발생지역인 디아스포라와 함께 그리스 해운업에 있어 기적을 일구어냈으며 오늘날까지도 찬란한 업적을 보이며 성장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곳 출신 주요 선주와 이 섬과 관련된 주요 선주 등을 살펴봄으로써 이 섬이 그리스 해운에서 갖는 중요성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아리스토틀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1906~1975)도 이 섬과 관련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1906년 터기 스미르나(Symyrna)(현재 이즈미르<Izmir>)의 카라타스(Karatas)에 태어나 17세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 그곳에서 처음에는 전화교환수로 일을 하다 담배사업으로 성공해서 상당한 재력가 되었다. 1931년부터 중고선박 거래로 돈을 벌면서 1932년 캐나나 해운회사로부터 6척을 벌크선을 구입하여 해운업을 성장시켰으며 1938년에는 대형 유조선을 구입하여 해운에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세계 2차 대전 발발하면서 미국의 엄호를 받으면서 오나시스의 해운업은 급성장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는 17척의 유조선을 구입하여 해운계에서 입지를 확보했으며 1946년 그 당시 그리스 해운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운가문인 Livanos가의 둘째 딸인 아니타 리바노스와 결혼하면서 오나시스와 키오스 섬의 인연이 시작된다.

오나시스의 장인 Stavros George Livanos(1891~1963)는 키오스(Chios)섬 출신으로 이미 3대에 걸쳐 그곳에 살면서 선원으로 활동한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수물자를 수송하면서 해운업에서 크게 성공한 선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 George S. Livanos는 현대중공업의 발전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주영 회장이 1970년대 초 조선업을 시작할 때 1972년 2월 최초로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발주한 것으로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까지도 현대중공업과 리바노스가는 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리바노스가는 탱커와 벌크에 집중하는 선엔터프라즈(Sun Enterprise)를 1968년 피래우스에 설립하였다. 이 회사의 근원은 이 가문이 키오스 섬에서 해운관련업을 시작한 190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현재 이 회사에는 3세가 가업을 이어 오고 있으며 22척의 선박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가문과 관련이 있는 그리스해운에 있어 오나시스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선주 Stavros Spyros Niarchos(1909~1996)가 있다.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나 스타브로스 리바노스의 첫 째 딸 그리고 나중에는 오나시스의 첫 번째 부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키오스섬과 인연을 맺게 된다. Niarchos가는 여러 세대 전부터 몰타의 발레타에서 해운대리점을 운영하였다. 그의 부모는 미국 뉴욕주 버팔로에서 백화점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으로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그리스로 귀환하였으며, Starvros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그리스에서 교육을 받고 외가의 곡물사업을 돕다 곡물운송비를 줄이는 차원에서 선박소유에 관심을 가지면서 해운업에 진출하게 된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한 때, 그가 소유한 선박이 독일군에 의해 6척이 침몰되었는데도 그는 보험 덕분에 거액의 자금을 확보하게 되어 종전 후 미국의 군함 2척을 구입했다. 이를 계기로 그 후 탱커선 등을 구입한 후 원유 수요 증가를 예측하고 1949년에 10척의 탱커선을 영국 조선소에 발주하며 탱커선 사업에 역량을 모아 1950년대 초반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조선을 소유하며 그의 동서인 오나시스와 경쟁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는 1947년에 Niarchos 해운기업을 창업하여 한 때 80척의 유조선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리바노스 가문과 비슷한 시기에 키오스섬의 Vrontados에서 출생해 그리스해운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Andreadis 가문이 있다. 이 가문은 19세기 중엽부터 5척의 범선으로 해운업을 시작해 2세대인 Georgios F. Andreadis(1872~1945)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해운업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1년 1880년에 건조된 증기화물선 구입에 지분참여를 하였으며, 그 후 부를 축적한 후 1911년에는 단독으로 1882년에 건조된 증기선을 확보했다. 1차 세계대전 등으로 해운이 상당기간 동안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해운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1923년부터 서서히 영국, 포르투갈 등으로 3척의 증기선을 사들여 대공황기에도 성공적으로 경영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0년대 후반에도 증기선을 구입하여 아테네에 사무소를 개설하기도 하였으며, Maritime School of Vrontados를 설립하기도 하여 해기사 양성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29년에는 의원에 지명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Stratis(1905~1989)는 아테네대학과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가 된 후 1939년에 데살로니카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아테네경제경영대학의 석좌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43년부터 1968년까지는 이 대학의 총장으로 재임하였다. 또한 2차 대전 후 미국에서 수송선으로 사용하던 Liberty선을 한 두 척 구입하면서 해운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대규모 탱커선대를 구축했다. 뿐만 아니라 1952년에 그리스 상업은행(Commercial Bank of Greece)을 인수하면서 그리스에서 가장 큰 기업그룹으로 발돋움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은행을 인수하여 은행업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60년부터 1974년까지 그리스선주조합의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그리스 해운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가문은 Veniami 가문과 Gaveriel 가문과 함께 Golden Union Shipping을 창업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특히 리바노스 가문과 관련된 그리스의 기라성 같은 선주 가문 외에도 그리스 해운산업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해운 가문이 키오스 섬 출신인 것을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먼저 현재 Maran Tankers와 Maran Gas 등 그리스 최대 해운그룹을 이끌고 있는 John Angelicoussis도 키오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1950년 대 초부터 해운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은 2015년 로이드 리스트가 선정한 해운계 100대 유명인사 중 5위에 오르기도 한 인사이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선박은 137척(2016년)으로 총 2,600만 dwt에 이르고 있다.

다음으로 2014년 클락슨의 보고에 의하면 그리스 해운계의 유력인사 중 2위에 오른 인물이 Cardiff Marine과 Dryships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George Economou인데 이 선주도 키오스 섬 출신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선대는 115여척(2016년)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총선복량은 1,500만 dwt에 이르는 규모다. 그는 MIT에서 해양공학석사와 해운 및 조선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클락슨의 서베이에서 그리스 해운계에서 4위에 랭크된 Angeliki Frango도 이 섬 출신인데 그녀는 현재 Navios해운그룹의 최고경영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Navios그룹도 146척(2016년)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총 1,439만 dwt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그리스 선주로는 드물게 탱커(62척), 벌크(12척), 컨테이너(7척) 등 다양한 선종 90척을 보유하고 있는 Tsakos Energy Navigation(TEN)의 CEO인 Nikos Tsakos도 키오스의 전통있는 해운가문 출신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영국 런던시립대 카스경영대학원에서 해운 및 재무학 전공의 석사를 취득하였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선복량은 약 900만 dwt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키오스 출신 주요 해운가문 외에도 수다한 가문이 있는 바6), Apodiakos가는 Blue Planet Shipping Ltd.를, Carras가는 Carras Ltd.를, Frangos가는 Kyveernitis Shipping Co. Ltd.를, Halcousasis가는 Radial Shipping Co.와 Halcousasis Z and G. Co. Ltd,를 그리고 Kallikis가는 Pikey Navigation SA를 소유하고 있다. Livanos가는 앞에서 소개한 선엔터프라이즈 외에 S. Livanos Hellas SA Ltd., Ceres Hellenic Shipping Enterprises 등을 소유하고 있다. Los가는 Vrontados Maritime Co. Ltd., Los Public  Benefit Foundation 등을 운영하며 Chios Maritime Museum 건립도 주도하였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Diana Shipping Co. 소유자인 Pailos가도 키오스 출신이며, Peraticos가의 Constis와 Nicholas는 1990년 초에 그리스 정부가 운영하던 Elefsina 조선소를 매입하였으나 실패를 하였고 나중에는 해운업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해운업에 종사하고 잇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Oceanbulk Maritime SA를 보유한 Pittas가도 키오스 출신이며 이들은 Star Bulk로부터 분사하여 Eurobulk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Euroseas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가문의 해운업은 1837년 키오섬에서 태어나 선원과 선장을 역임한 Nikolas씨가 19세기 후반부터 나무로 만든 범선을 구입하여 해상운송에 종사하면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130여 동안 해운업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오스의 전통적인 해운가문 출신은 아니나 Livanos가를 위해 선원으로서 활약을 하던 Stravelakis는 카오스의 Kardamyla지역 출신으로 나중에는 Prometheus Maritime Corporation을 설립하여 선박관리업에 종사하고 있다. Tsangaris가의 두 아들은 뉴욕에서 Carras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현재 해운대리점인 Unibro Maritime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들의 형제들은 해기사로서 종사하기도 하였다. Xylas가는 Andrianopoulos and Lentakis가와 함께 Pegasus Ocean Services Ltd.를 창업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현재 그리스 해운계에서 1위에서 3위까지, 그리고 5위의 해운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선주들이 모두 키오섬 섬 출신인 것을 볼 때 그리스해운에서 이 섬을 모르고는 그리스 해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섬 출신의 선주들은 초기에는 에게해를 드나드는 배의 선원으로 종사하면서 한 두 척의 배를 소유하게 되면서 해운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5세기부터 1820년 독립 때까지 약 400여년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리스가 많은 섬을 보유하고 있다 보니 자연히 선박건조기술과 항해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오늘날의 그리스 해운의 초석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나시스는 아테네 남부 해운 집적지에 심장병원을 건립하였고, 니어초스 또한 이 부근에 다목적 문화공원을 조성하여 아테네 시민들에게 휴식공간과 문화예술 공연을 제공하고 있다. 그 리고 키오스 섬 출신 선주들은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고 박물관 설립하는 등으로 사회공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Los 박사는 키오스출신 선주들의 특성을 여러 측면에서 밝히고 있는데, 우선, 조국과 고향 키오스에 많은 기부를 하였으며, 동료 선주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신을 발휘하여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는, 키오스출신 선주들은 시장의 흐름에 대해 주도면밀하며 시장의 작동원리를 존중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 특성으로는 시장이 상승하는 국면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응하며 시장이 나쁠 때 인내하는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특성으로는 선주 자신들이 가능한 한 선박과 선원을 매우 가까이 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 특성으로는 기술혁신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지속으로 주시하며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해운계에서 활동하는 선주 가문들에서 나타나듯이 가족 중심의 경영을 하며 다른 유력 해운가문과 혼인을 통해 그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의 에게해 북동쪽에 위치한 키오스섬이 오늘날 그리스 해운의 발전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들 선주들이 조상들로부터 바다를 활용하는 지혜를 물려받아 에게해와 지중해 등을 넘나들며 교역을 추구해온 결과로 보여진다. 이 섬 선주들이 모험정신을 발휘하며 상호 협력하고 소통하며 식민지배 상황에 놓여 있을 때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해상력을 키워온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조국의 독립과 고향의 독립을 위해 또한 헌신하기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해운시장의 작동원리를 존중하며 그 흐름를 예의주시하며 기술혁신에 민첩하게 대응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선박을 빠르게 교체하면서 변화에 대응한 것도 오늘날 그리스 해운의 발전에 있어 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조선기술에 대응한 새로운 선박의 확보에도 많은 투자를 하여 현재의 그리스 해운업을 성장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리스 해운은 벌크와 탱커부문에 집중 투자하며 잘 할 수 있는 영역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 듯이 그리스가 우리나라 조선업의 발전에도 많은 긍정적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주요 조선소에 그동안 가장 많은 선박을 발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리바노스가문이 운영하는 선엔터프라이즈는 1970년대 초부터 약 40여년 이상 현대중공업과 관계를 유지하며 우리 조선소에 발주를 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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