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고 고요한 작은 마을, 역사의 정취를 품다

 
 

중세 무사 전쟁에서 150년전 메이지 유신 흔적까지

부관훼리 카페리선 ‘부산항-시모노세키항’ 매일 운항

부산항에서 부관훼리의 카페리선을 타고 3박 4일 간 일본 야마구치현에 다녀왔다. 일본 혼슈 끝 서쪽에 위치한 야마구치에는 소박하고 고요한 느낌을 주는 소도시와 마을들이 모여 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한적한 길을 거닐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고, 동시에 중세 무사들의 비극적인 삶과 일본 근대화를 이끈 150년 전 메이지 유신의 역사적인 인물들도 만날 수 있다.

지독하게 더웠던 한여름의 열기가 한풀 꺾일 무렵 일본 야마구치현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의 시작과 끝은 부관훼리의 ‘성희’호와 ‘하마유’호다. 부관훼리는 부산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항까지 매일 1회 운항하고 있다. 9월 3일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해 인근의 부산국제여객터미널 3층으로 이동했다. 부관훼리 카운터 앞에는 이미 3박 4일간 함께 보낼 여행팀원 30여명이 모여 있었다. 평일 월요일이라 그런지 터미널 내부에는 여행객들이 많지 않아 한가한 분위기다. 작년 8월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한 출국장 면세점은 세련되고 현대적인 외양으로, 여행 직전 쇼핑을 즐기는 몇몇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미술작품을 만나다

성희호 중견작가 아트갤러리 ‘이색’

빠르게 출국수속을 마치고 부관훼리 ‘성희’호에 승선했다. 총톤수 1만 6,875톤의 성희호는 선령 15년의 국제여객선이다. 길이 162미터, 폭 23.6미터로 여객정원은 562명, 화물은 승용차 30대, 컨테이너 136teu를 실을 수 있다. 선내에는 카페, 면세점, 대욕장, 멀티홀, 편의점, 노래방, 게임룸 등 다양한 부대시설과 편의시설이 있어 8시간의 다소 긴 운항시간의 지루함을 날려준다.

그간 일본과 중국행 국제여객선을 여러 번 탔었지만 이번 성희호는 좀 더 특별하고 아늑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왜일까. 배 안을 구경하기 위해 돌아다녔을 때 각층과 객실 마다 멋진 그림들을 보게 된 것이다. 성희호는 선상 아트갤러리를 운영하며 배병우, 장욱진, 송수남 등 국내 유명 중견 작가 50여명의 작품 180여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매일 지치고 바쁘고 쫓기는 일상으로 피로한 마음이 아름다운 그림들로 편안하게 어루만져지는 느낌이다. 선내에서 육개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디럭스룸은 트윈베드와 TV, 욕실, 냉장고 등이 갖춰져 있어 깔끔하고 아담한 호텔 방처럼 선상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무료 와이파이도 연결돼 인터넷도 가능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야경이 아까부터 눈에 들어온다.

밤 9시. 선상에서 성희호가 밤바다에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 밤바다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환하게 빛나고 있는 광안대교와 부산항여객터미널, 컨테이너터미널, 동백섬, 오륙도 등이 차례차례 작은 점들로 멀어져간다. 도시여 안녕, 성희호는 그렇게 새로운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벌써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와 있었다. 잔잔한 아침 햇살이 비쳐오는 작은 창문 밖에는 나지막하게 길게 뻗은 섬들과 고기잡이 어선이 오가고 있다. 방안의 TV에서는 태풍 ‘제비’가 오사카와 홋카이도로 향하고 있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태풍은 야마구치현을 조용히 비켜갔다. 덕분에 여행 내내 높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즐길 수 있었다. 선내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시모노세키항 여객터미널에 내려 입국수속을 했다.

 

 
 

아카마 신궁과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

겐지-헤이시 가문 최후의 단노우라 전투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라타자 웬일인지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버스가 달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있는 조선통신사의 상륙기념비와 아카마 신궁이다. 이곳 야마구치현은 시모노세키항을 중심으로 예로부터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했기에 지금도 곳곳에 역사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조선통신사들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됐다. 시모노세키는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도착하는 첫 장소였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1592년),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켰지만 이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우호사절단인 조선통신사를 초청했다. 이 곳 기념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일행 몇몇이 전부였다. 2001년 8월 세워졌다는 이 기념비에는 ‘한일의원연맹 회장 김종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일간 평화와 우호를 상징하는 기념비이지만 완고하게 얼어붙어 있는 양국관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로 건너 맞은편에는 시모노세키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빨간 지붕의 아카마 신궁이 있다. 조선통신사비와 대조적으로 신궁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아카마 신궁은 12세기말 2세에 천황에 올랐지만 가문의 패배에 따라 8세에 바다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안토쿠 천황을 기리는 곳으로 조선통신사들의 첫 방문지이자 숙박지이기도 했다.

일본 중세시대 시모노세키의 간몬해협에서는 겐지(원씨)와 헤이시(평씨) 무사가문이 패권을 두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일명 단노우라 겐페이源平 전투로 유명하다. 해전에서 헤이시 가문이 멸절했고 결국 헤이시 가문의 일가였던 8세의 안토쿠 천황은 “바다에도 용궁이 있나이다”고 말하는 외조모의 품에 안겨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단노우라 앞바다에서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등껍질을 가진 게들이 잡혔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잡혔다는 게의 등껍질이 이 신궁에 전시돼 있었다.

신궁 한 켠에는 ‘귀 없는 호이치’라는 샤미센을 키는 악사의 동상이 있다. 그의 음악에 이끌려 찾아온 귀신으로부터 귀를 뜯겼다는 소름끼치는 전설이 내려온다. 호이치가 부른 헤이시 가문과 안토쿠 천황을 기리는 처연한 노랫말이 스피커에서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다. 관심 있게 보았던 NHK 대하 드라마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2012>의 주인공이 안토쿠 천황의 외조부이다 보니 자연스레 캐릭터가 연상되면서 아카마 신궁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묘한 기분을 안고 신궁 계단을 내려왔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바로 앞 간몬해협의 물살이 더욱 세차게 흐른다. 800여년 전 피비린내 났던 전투의 현장이 한층 비장함과 애잔함을 준다.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는 18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장소인 ‘일청강화기념관’과 일명 초밥성지로 불리는 ‘가라토어시장’ 등을 외관으로 볼 수 있었다.

조후 사무라이 마을, 가장 오래된 국보 사찰 ‘코잔지’

메이지 유신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과 제자들

다음 행선지는 하기시에 있는 조슈번 사무라이의 거주지 ‘조후 성하마을’이다. 조슈번은 현 야마구치현의 옛 이름으로 150년 전 도쿠가와 막부시절 메이지 유신의 혁명 근거지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은 1868년 일본 메이지明治왕 시기에 주력인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강화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거대한 변혁으로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됐다.

조후 성하마을은 일반 주택들 사이에 사무라이들이 살았던 전통 가옥들이 잘 보존돼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개천에는 깨끗한 물이 졸졸 흐르며 잉어, 오리, 왜가리 등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옛 정취가 담긴 아담한 골목길을 걸으니 여유와 호젓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을길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다른 관광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개울가 오리에게 빵을 뜯어주는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비는 어느새 화창하고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로 바뀌었다. 우산은 햇빛 가리개 용도로 다시 펼쳐들었다. 산책길 끝에는 ‘코잔지’라는 사찰에 들렸다. 코잔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양식을 갖춘 탑이자 국보이다. 경내 오른쪽에는 일본 메이지 유신 초기의 주역이라 불리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말 탄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조슈번 출신 사무라이로 이 곳 코잔지에서 군사 1,000여명으로 거병해 막부군 2만여명과 싸워 승리했으나 28세에 폐결핵으로 숨졌다. 현재 일본총리 아베 신조는 다카스키 신사쿠의 ‘신晋’자를 이름으로 사용할 정도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그를 꼽는다고 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현지 2층 식당에 들렸다. 돈까스 나베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1층에서 파는 기념품들을 구경했다. 그 중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공책과 달력 등이 눈에 띈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정치가로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군만민一君萬民, 오로지 덴노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동등하다’는 당시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으며 무사와 평민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다. 그의 사설학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야마구치현에 있으며 지난 201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공책과 달력 기념품에는 쇼인 뿐 아니라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꼽히는 그의 제자들의 얼굴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다카스키 신사쿠를 비롯하여 구사카 겐즈이, 기도 다카요시, 야미가타 아리토모...그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도 보인다. 일본에게는 근대화를 이끈 영웅이나 우리에게는 원흉이라는 아이러니다.

올해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150주년을 맞는 해이다. 야마구치현 곳곳에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베 신조 총리는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면서 우익의 정치색이 더 짙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 내에서도 메이지 유신에 대한 과한 포장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야마구치현 대표 관광명소 ‘루리코지 5층탑’

삿초동맹 회담 열린 2층 목조건물 ‘친류테이’

점심 후 이동한 곳은 ‘루리코지’다. 루리코지는 야마구치현의 대표 관광명소로 16세기 일본 무사였던 오우치가의 전성기 문화를 전승하는 사원이다. 당시 최대 중심지였던 교토를 본떠 탑과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가 약 31미터인 5층탑은 일본 국보로서 호류지, 다이고지와 함께 일본 3대 명탑 중 하나이며, 15-16세기의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꼽힌다.

잘 가꿔진 연못과 숲을 배경으로 한 5층 목탑은 세월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동화 속 세계처럼 아름다웠다. 작고 아담하게 잘 꾸며진 절에는 도르레가 매달린 대형 염주가 이색적이다. 염주알 8개를 하나씩 떨어뜨리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루리코지 경내에는 관심 갖고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목조건물이 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이끈 삿초동맹의 회담장소로 알려진 ‘친류테이’라는 2층 가옥이다. 삿초동맹은 1866년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이 맺은 정치군사 동맹이다.

친류테이에 들어가자 좁은 실내에 은은한 조명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들(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그대로의 작고 오래된 소박한 2층집은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었다. 막부체제의 종식과 근대 일본의 토대가 마련된 역사적인 장소를 한 바퀴 둘러보면서 일본, 그리고 한국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야키요시다이 석회암 고원, 3억년전 동굴체험

료칸 온천과 기모노, 가이세키를 맛보다

다시 버스를 타고 달려 아키요시다이라는 석회암 고원에 도착했다. 이 곳은 일본 최대의 카르스트 지대로 3분의 1 가량이 국립공원이며, 특별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생각 보다 광활한 곳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어둑어둑한 하늘에 석회암 덩어리들과 높은 들풀 사이를 지나다 보니 한적하고 스산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전망대까지 한 바퀴 걸어 오르내린 후 이 지역 특산물인 감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맛보았다.

동양 최대의 석회암 종유 동굴이라는 아키요시 동굴에 들어갔다. 10km에 이르는 긴 동굴이며 관람코스는 1km이다. 이 곳은 사계절 평균기온이 17도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마치 놀이기구 입구처럼 동굴 시작점 양 벽에는 3억년의 시간을 표현한 만화들이 그려져 있다. 타임터널을 지나 본격적인 동굴에 들어가니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과 함께 곳곳에 신기하고 요상하게 생긴 석순과 종유석들이 있었다. ‘장마의 전당’, ‘암굴왕’, ‘해파리폭포’, ‘황금기둥’, ‘천장의 다다미’, ‘백장의 접시바위’ 등으로 이름 붙여진 각양각색의 특이한 자연의 조각들을 보았고 파드닥 날아가는 박쥐 한 마리도 볼 수 있었다.

동굴 안에서 특별한 감흥이 일지는 않았지만, 출구가 가까웠을 때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에 마음이 일렁였다. 출구로 빠져나오자 다시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환한 출구로 빠져 나온 느낌이 좋아 뒤돌아 어두운 동굴 문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저녁에는 일본 전통 료칸인 사이쿄 호텔에서 묵었다. 현대적인 건물 내부에 일본식 전통가옥이 재현된 곳이다. 다다미 방 안에는 녹차와 함께 야마구치 여름밀갑 케익인 ‘미관달’, 야마구치 복어전병 등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촉촉한 귤향이 나는 스폰지 케익과 담백한 새우과자의 맛이었다.

사이쿄 호텔에서는 온몸으로 일본다움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일본식 유가타인 기모노를 골라 입고, 일본 전통코스 요리인 가이세키 정식을 먹으며, 족욕과 노천 온천욕을 즐겼다. 밤에는 호텔 지하에 일본 전통춤과 노래를 감상할 수 있는 가부키쇼 극장에 갔다. 입구에 십여분 서성였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시간을 착각했다. 가부키쇼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단노우라 전망대와 탄가 재래시장

고쿠라성, 도키와 식물원과 동물원

다음날 일본식 조식부페로 아침을 먹고, 시노모세키 단노우라 전망대로 출발했다. 어제 비가 내렸을 때와 달리 아침에 보는 간몬해협의 물살은 잔잔하게 반짝였다. 전망대에서 간몬대교 앞 평화로운 바다 풍경을 즐기다가 다리를 건너 규슈로 이동했다. 시모노세키는 간몬해저터널과 간몬대교를 통해 혼슈와 규슈를 연결하고 있다.

규슈에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탄가 재래시장이다.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규슈 재래시장이라 한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드럭스토어, 의류매장, 안경점, 스테이크 전문점, 커피 전문점 등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진 시장과 육류, 수산물, 채소, 과일 등을 파는 전통 재래시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전통시장에는 먹기 편하게 소포장된 1-2인분 단위의 음식과 재료들에 눈길이 갔다. 비린내 나는 생선들마저 2-3마리가 깨끗이 씻겨 깔끔하고 가지런한 모습으로 바구니에 배열돼 있었다. 자전거를 탄 할머니들이 조심스럽게 야채를 고르는 장면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장을 빠져 나오자 멀리 시내 빌딩들 사이로 돌성벽의 상아색 천수각이 보인다. 역사적으로 규슈의 관문역할을 했다는 고쿠라성이다. 고쿠라성은 16세기 중반 지어졌으나 전쟁으로 파괴되고 1959년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리버워크 등 대형 쇼핑몰과 현대적 빌딩들 사이에서 작고 아담한 사이즈를 뽐내며 전통 일본식 정원과 연못으로 운치를 주었다.

점심은 야끼니꾸 뷔페식으로 즐겼다. 야끼니꾸는 ‘불火에 굽는 고기’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불고기의 일본식이라 할 수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등 다양한 종류의 고기와 초밥 등이 즐비했다. 고기를 접시에 담아와 화로구이에 구워 먹는 재미가 있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떠난 마지막 행선지는 우베시의 도키와 공원이다. 도키와 공원은 일본 도시공원 100선, 아름다운 일본의 걷고 싶은길 500선에 선정됐다고 한다. 인공호수를 둘러싼 널찍한 잔디밭에는 거대한 조각물들이 곳곳에 상설 전시돼 있었고 마치 우리나라 올림픽 공원에 온 느낌을 주었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국제공모전 ‘UBE 비엔날레(현대일본조각전)’가 열리기도 하며, 야외 조각공원에는 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한 한국인 조각가(2009년 염상욱, 2017년 김경민)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식물원 온실에는 세계 식물여행을 컨셉으로 하여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등 각국을 대표하는 식물들이 원산지의 식생을 재현하고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의 바오밥 나무, 유럽의 올리브 나무는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동물원에는 흰손긴팔원숭이, 인도원숭이, 사자꼬리 원숭이, 알파카, 카피바라 등 희귀한 동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인공 사육장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숲 속에서 야생 그대로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점에서 관람객에게도 마음의 안식와 여유를 주었다.

모든 여행일정을 마치고 시모노세키항으로 돌아왔다. 여객터미널과 육교로 연결된 쇼핑몰 ‘씨몰(Sea-Mall)’에 들려 여행의 아쉬움을 쇼핑으로 마무리했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하늘 위로 노을이 비추자 시모노세키의 상징인 유메타워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훼리(일본)의 ‘하마유’호에 올라타자 아쉬움이라는 여운이 맴돈다.

배 타고 떠난 야마구치 여행은 가슴 속 설레임을 되살아나게 하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기는 시간이었다. 혼자서라도 조용히 이 곳에서의 순간들과 장소와 왔던 길을 다시 한 번 되짚고 싶어진다. 소박하고 한적한 소도시에서 마음의 쉼을 얻고 이와 대비되는 무거운 역사의 흔적은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3박 4일의 여행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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