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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제해록' - (5)해운 비화
예선업 민영화
[535호] 2018년 04월 05일 (목) 10:10:59 해양한국 komares@chol.com
   
 

默庵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인 ‘묵암제해록’이 작년 7월초 발간됐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사는 물론 70여년 해운업계에 종사하며 한국해운의 역사와 동고동락해온 박현규 이사장의 해기사로서, 해운경영인으로서의 족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선급과 한국해양소년단, 해운학술활동 등의 시발과 진흥에 일조했던 그의 활약상이 드러나 있다.
한국해운업계 발전사의 단면을 담고 있는 ‘묵암제해록’의 내용중 제 4장 <해운비사와 봉사>의 내용중  △한국선급 △한국해양소년단 △한국해양대학교 △해운학술 활동 △해운비화 부분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5년까지 예선업은 관용선이 전담하고 있었다. 1975년 12월에 항만법이 개정되어 민간업체가 예선업을 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허가제였기 때문에 예선업 허가 여부는 전적으로 교통부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1977년까지 민간예선업체는 울산의 일신해운과 동해의 동양시멘트 등 두 회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1978년 부산항내에 정박해 있던 선박에 화재가 났는데, 공교롭게도 화물이 타이어여서 사흘 동안이나 진압이 되지 않았다. 당시 제2무임소 장관 겸 교통부 장관이 민병권(제2무임소 장관 재임 1975-1978, 교통부 장관 재임 1977.11.17-1978.12.22.)이었다. 그는 육군 출신이어서 해운 관계 일은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해운 관련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물어오곤 했다. 내가 4대 해양대 동창회장(1964.5-1973.1)을 맡고 있는 동안 해양대 조도 이전 사업을 추진할 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민병권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북한의 사리원 출신이었던 민병권이 국회의원 지역구를 거창을 택하게 됨으로써 거창 출신인 신태범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해양대학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주었다. “민병권이 정계 중진 의원(국회의원 재임 1963- 76)으로 있을 때 경제기획원의 예산편성 작업이 시작될 무렵이면 부탁드리지 않아도 직접 가서 해양대학 예산을 살펴주곤 했다.”

부산항에 정박한 선박에서 화재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진압이 안되자 내게 상의를 해왔다. 나는 민병권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을 했다. “관용선이라는 것이 한번 도입하고 나면 제대로 관리도 되지 않은 채 3~40년 운항하다보니 항내에 사고라도 나면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진화설비는 물론 예선설비를 갖춘 예선을 운항할 수 있도록 민간인이 예선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십시오.” 내 얘기를 들은 민병권 장관은 군인답게 곧 주무부처인 해운항만청 강창성 청장(재임 1976.2.13.-1980. 2.21)에게 예선업을 민간인이 할 수 있도록 관련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1978년에 이르러 우리나라에 예선업이 본격적으로 민간에 개방되었다.

당시 나는 고려콘테이너터미널의 경영자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예선이라는 것은 선박의 입출항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고려해운 부사장으로 있던 신태범과 상의하여 형님(박현호)을 공동투자자로 합류시켜 사업신청을 하였다. 처음으로 민간에 개방된 사업이다보니 주무관청인 해운항만청이 무척 까다롭게 나왔다. 나는 민병권 교통부 장관에게 협조를 구해 해운항만청으로부터 예선사업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1978년 고려예선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잘 운영되고 있다. 1981년 11월에 한국예선협회가 창립되었는데, 나는 7대(1993.10-1995.3)와 8대(1995.3-1998.3) 회장을 맡았다.

인더스트리얼 캐리어(industrial carrier) 저지
우리나라의 선사들은 매우 영세하였기 때문에 외국계 정유 업체가 자기들 산하에 유조선 운항업체를 두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현대상선도 당초 원유를 수송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해운업체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뒤에도 화주들은 종종 자가 운송업(industrial carrier)을 노려 왔고, 이미 실천하고 있는 대기업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짐은 자기가 나르겠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해운업계는 그만한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일찍부터 자국화 자국선(自國貨 自國船) 정책을 취하여 왔다. 자국화 자국선 정책이란 우리나라의 해운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하여 1952년 상공부의 지시로 시작하여 1967년에 해운진흥법에 의하여 법적으로 제도화 된 정책이다. 해운 선진국에서는 선박의 국적에 따라 화물의 적취, 항만 서비스의 제공, 과세 등에서 차별하는 전형적인 국기차별 정책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해운 자유’를 외치는 선진 해운국의 압력이 심화됨에 따라 결국 자국화 자국선 정책의 핵심을 이루던 국적선 불취항 증명서의 발급제도를 폐기해 버렸다. 즉 1963년 12월 제정된 해상운송사업법에 도입되었으나 획기적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해운사업에 맞추어 1983년 12월 전면 개정할 때 해운업법으로 바뀌면서 국적선 불취항 증명서의 발급과 관련된 조항을 모두 삭제하였다. 어쨌든 대기업은 자가 운송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때 세계적 철강회사의 반열에 오른 포항제철(浦項製鐵, 2002년 포스코로 변경)이 제철 원료를 운송할 목적으로 해운회사를 자회사로 설립하고자 나섰다. 겉으로 내세운 목표는 철강원료의 자가 운송이 아니라, 산하에 설립된 포항공과대학의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이었다.

내가 늘 강조하는 얘기이지만 해운업은 우리나라만의 산업이 아니고 전 세계의 어느 나라와도 경쟁이 불가피한 특수산업이기 때문에, 항상 선진국의 여러 가지 제도를 반영하고, 비교하면서 영위해 나갈 수밖에 없는 산업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광복 이후, 그러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냥 놔두면 돈이 많은 재벌이 다 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대화주들은 호시탐탐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주의 경우 어쩔 수없이 해운업에 손을 댄다고 해도 3분의 1 이상의 지분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거나 해운업의 면허를 제한하는 것이 당시 주무관청과 해운업계의 일반화된 관례였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현대상선이 1982년 세미컨테이너선 2척을 미주항로에 취항할 때도 해운항만청은 ‘미주 부정기 항로’ 한정면허를 승인하였다.

그런데 포항제철의 박태준이 포항공대를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이 대학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거양해운(巨洋海運)을 설립하려고 해운업법상의 외항해운업 면허를 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해운항만청장 한준석(韓準石, 재임 1983.7–1984.2)을 만나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에 한준석은 협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한준석을 만나 항의하였다. 철광석이나 석탄 같은 철강 원료의 수송권을 화주에게 주는 것은 우리나라 해운업을 완전히 재벌의 독점물로 만드는 것이 되므로, 면허를 주더라도 제한을 가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논리였다. 한준석은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청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준석의 언약은 그가 1984년 2월 2일 해운항만청장직에서 물러난 뒤 실무자들에 의해 이행되지 않았다.

포항제철은 1986년 포항공과대학을 설립하고, 학교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외항해운업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 4월 23일 대주상선주식회사(대표 김명현)를 설립하였다. 대주상선은 학교법인 제철학원의 전액 출자로 광양제철4기에 소요되는 제철 원료를 수송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대주상선은 곧 1990년 11월 1일 거양해운주식회사로 개명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인더스트리얼 캐리어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거양해운이 외항해운업 면허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에 처해 있던 국제상선(대표 양정모)의 선박과 면허권을 인수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포철 산하 육영재단인 제철장학회가 최근 국제상선의 선박과 면허권을 17억원에 인수, 대주상선을 설립하고 해운항만청으로부터 동남아부정기화물면허를 취득, 해운업계에 진출했다. 제철장학회가 국제상선으로부터 인수한 5,600톤급 원목운반선 1척과 6300톤급 1척 등 2척이며, 포철측은 대주상선 대표에 김명현 제철장학회 상무를 임명했다. 포철은 이번 국제상선의 인수목적이 포철직원 자녀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확대를 위한 재원 마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해운업계는 포철이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운산업에 진출할 경우 국내 해운업계의 과당경쟁을 우려하고 있다.”(동아일보, 1990.6.19.)

거양해운은 곧 한진해운의 김갑중과 오학균을 영입하고, 1991년 삼선해운의 ‘원양부정기항로면허’를 매입하였다. 1961년 5월 거양해운(당시 대표 김갑중)은 국제상선으로부터 매입한 ‘동남아정기항로 면허만’을 갖고 있었는데, 원양부정기항로면허를 갖고 있던 삼선해운(대표 송충원)과 면허와 선박을 상호 교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즉 거양해운은 삼선해운의 원양부정기선 면허와 선박 2척을 매입하고, 대신 자신들이 갖고 있던 동남아 부정기항로면허와 선박 2척을 삼선해운 측에 넘기는 계약을 체결하여 해운항만청의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매일경제, 1991.6.4) 거양해운은 1992년 제4기 광양제철소의 철광석과 석탄 수송을 위해 필요한 대형광탄선 4척 등 총 10척을 확보하여 원료탄 수송에 나서는 한편(매일경제, 1992.3. 30), 호주/유럽간 제철원료의 수송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굴지의 화주인 BHP, Hamersley Iron, Rove Rive와 각각 15년간의 장기수송계약을 체결함으로써 3국간 전용선 영업을 새롭게 개척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거양해운의 행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거양해운이 오는 (1992년) 10월 포항제철광양4기 준공을 앞두고 초대형선사로 발돋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해운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포철의 계열회사로 제철원료를 수송하고 있는 거양해운은 오는 6월부터 내년 3월까지 10만톤 이상 규모의 광탄선 10척을 추가로 확보해 해상수송에 본격 참여키로 했다. 이에 따라 거양해운의 선복량은 현재의 살물선 2척, 2만 8천톤 규모에서 166만톤의 선박을 추가 확보함으로써 국내 4위선사로 뛰어오를 전망이다. 거양해운은 이를 위해 이미 지난해 6월 일본 미츠비시와 함께 삼성중공업에 12만톤급 2척, 대우조선에 20만톤급 1척, 현대중공업에 20만톤급 1척을 각각 건조키로 계약을 체결했다.
또 오는 6월부터는 미츠비시로부터 선박을 인수받아 단기용선형식으로 선가를 상환할 계획이며, 항만청으로부터 국적취득부나용선 인가를 받지 못한 6척은 단순나용선으로 확보, 호주 BBC사 등 외국 광탄회사의 물량수송을 위해 호주-미주-유럽-극동항로 등 3국간 항로에 투입할 예정이다.”(매일경제, 1992.3.30)

이 기사에서 본 것처럼, “해운항만청은 거양해운이 도입하기로 한 광탄선 10척 가운데 4척은 광양제철4호기 소요물량을 자가운송하고, 나머지 6척은 3국간 항로에 취항한다는 조건하에 면허를 준 것이었다. 그런데 거양해운이 이를 변경하여 6척까지 모두 자가화물을 운송하기로 한 데서 해운업계의 이슈로 대두되었다. 거양해운의 의도는 당시 해운업법 시행령의 규정에도 어긋났고, 선사는 물론 화주에게도 쌍방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논란이 컸다.” 한국선주협회 조상욱 회장 인터뷰, 월간 󰡔해양한국󰡕, 1992. 10, p.48.

거양해운이 해운업계의 문제로 대두하고 있던 이 시기에 강동석이 해운항만청장(재임 1992. 4-1993.3)을 맡고 있었다. 차제에 해운업법을 개정하여 대량화주의 해운업 진출을 원천적으로 막도록 입법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콤파스클럽>이나 기타 모임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더스트리얼 캐리어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고, 교통부나 해운항만청 고위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해운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전이나 포스코 같은 대형화주들이 해운업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선주협회(회장 조상욱)에서도 1992년 7월 25일 이사회를 개최하고, ‘거양해운이 야기한 자가화물 수송에 대한 규제’방안에 대해 심의하고, 해운항만청에 ‘자가화물 수송을 규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해운항만청에서도 두 차례 공청회(1992.8.12, 8.25)를 개최하여 여론을 수렴한 뒤 ‘대량화주의 해운업 규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해운업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1992년 10월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해운업법 개정안은 1992년 정기국회에서 계류결정되어 이듬해 입법화되었다. 1993년 2월 19일 제160회 국회(임시회) 교통체신위원회 1차소위원회에서 노건일 교통부장관은 해운업법 개정안에 대한 제안 배경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해운환경의 자율화 개방화 추세에 따라 정부의 행정 규제를 완화하여 해운산업의 자율경영을 유도하고 해운분야에 있어서의 외국과의 마찰요인을 해소하며 현행 규정상의 일부 미비점을 개선 보완하기 위함” 교통체신위원회, 해운업법중개정법률안심사보고서, 1993. 2.17.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내항화물운송사업의 운임 및 요금의 신고제로의 전환, 해상여객및화물운송업의 사업계획 변경시 기존 인가제를 신고제로 전환, 대량화주의 해운업 진출 금지 신설 등이었다. 이러한 해운업법 개정안에 대해 오성균 전문위원은 다음과 같은 검토의견을 제시하였다.

“현재 원유, 제철원료, 액화가스류, 유연탄 등 대량화물이 전체 해상물동량 중에서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증가될 추세임. 자가화물직접운송형태는 화주의 입장에서 보면 자가화물의 적기 안정적 수송과 특별한 화물유치 활동 없이도 해운업을 영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수 있으나, 해운산업 전반으로 볼 때는 전문해운선사의 활동영역 제한으로 경영수지 악화와 국제경쟁력 저하를 초래하고 독점의 속성에 의한 시장경쟁원리의 배제로 궁극적으로는 국민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 하겠음. 개정안에서 대량화물 화주의 자가화물직접운송사업을 제한하는 취지의 규정을 신설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제원리에서 보면 다소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해운산업합리화라는 극단적인 조치 후에도 여전히 많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국적선사에게 장기적화보증된 기초화물의 수송권을 확보케 함으로써 안정된 기조하에 국제경쟁력을 제고하고 경영안정을 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해운정책방향이라 사료됨.” 교통체신위원회, 해운업법중개정법률안심사보고서, 1993. 2.17.

1993년 2월 17일 교통체신위원회는 대량화물의 개념을 ‘원유, 제철원료, 액화가스류 기타 대통령령이 정하는 대량화물’로 표현한 것이 미흡하므로 ‘원유, 제출원료, 액화가스류 기타 대통령령이 정하는 종류의 주요화물’로 수정하여 의결하였다. 이 수정안은 법사위원회(1993.2.19)와 본회의(1993.2.23)를 각각 통과하여 1993년 3월 10일 법률 제4546호로 ‘해운법’으로 공포되어 6월 11일부로 시행되었다.

● 해운법 제27조 2(1993.6.11 시행)
① 원유, 제철원료, 액화가스류 기타 대통령령이 정하는 종류의 주요 화물(이하 ‘대량화물’이라 한다)의 화주 또는 대량화물의 화주가 사실상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법인은 그 대량 화물의 화주의 화물운송을 위한 해상화물운송사업을 할 수 없다. 다만, 해운산업육성법 제22조의 규정에 의한 해운진흥심의회의 심의를 거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한 대량화물의 화주가 사실상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법인에 관한 기준 및 기타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한편, 정부는 1993년 1월 공익법인에 대한 기업의 지배를 억제하기 위하여 기업의 공익법인 주식 보유를 5% 이내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해운법상의 대량화주 규제 조항과 이 조치로 거양해운의 증자에 참여할 수 없게 된 포항제철은 거양해운 지분의 90%를 매각하여 경영권을 민간기업에 이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95년 2월 11일, 거양해운의 자본금 150억 원 중 90%인 135억원(270만주)에 대한 일반공개입찰이 실시되었다. 입찰에는 한진중공업, 우리자동차판매, 대한해운, 현대중공업, 조양상선 등 국내 굴지의 업체들이 참여하였다. 결국 711억원을 써낸 한진중공업 컨소시엄이 거양해운의 지분 90%를 인수하였다. 인수비율은 한진중공업 40.33%, 한진해운 20%, 정석기업 11.7%, 한국항공 1.67% 등이었고, 포항제철이 5%, 포항공과대학이 각 5%씩 보유하게 되었다. 󰡔한진해운25년사󰡕, p.435.

내가 줄곧 역설한 바 있는 주장이 이제서야 관철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형 화주들은 해운법의 이 조항을 없애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김선길이 해양수산부 장관(1998.3-1999.3)에 취임하였다. 김선길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해운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자 대형 화주들의 청원에 혹하여 해운법 제27-2항을 폐지하는 개정안을 1998년 말에 국회에 제출했다. 해양수산부의 백옥인 기획관리관이 이 사실을 내게 알려왔다. 나는 부랴부랴 김선길 장관을 면담하러 갔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날이 1998년 12월 25일 성탄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호남탱커를 보십시오. 모 회사인 호남정유의 원유를 운송하여 손쉽게 돈을 벌기 때문에 시프린스호(1995) 사건 같은 것이 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해운이 전 세계적으로 불황인데도 호남탱커는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원유 운임을 기름값에 포함시켜 전 국민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전이나 포스코 같은 대형 화주들이 해운업을 자회사로 거느린다면 우리나라 해운업은 다 망합니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김선길 장관이 ‘아! 그렇겠군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면서 ‘전승규 차관(1998.3-1999. 5)에게 얘기해서 해운법 개정안 요청 공문을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변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국선주협회 회장과 전무이사에게 해양수산부가 국회로 보냈던 해운법 개정안을 회수해 오도록 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해운법상의 대량화주의 해운업 진출은 IMF 체제로 접어들면서 ‘규제 완화’라는 명분에 휩쓸려 1999년 4월 15일, 27조 2항이 삭제될 때까지 전문 해운업자의 영역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거양해운 사태 이후에도 나는 틈나는 대로 해운업계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2011년 10월 18일 해양물류산업 공생발전과 공정사회 구현 세미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국내 해운선사들은 40% 이상이 도산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포스코와 한국전력 등과 같은 대형 화주들은 일본선사들과 장기계약을 맺고 있다. 일본의 경우 석탄, 철광석, 식량 등의 화물은 국적선사가 98% 이상 장기계약을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화주인 포스코는 일본 3대 선사와 10여 년간 장기계약을 체결했고, 한국전력 역시 NYK와 20여 년간 계약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공무역을 통한 수출국으로 해운산업이 가장 기본이 되지만, 일본과 비교해서 많이 소외당하고 있다.”

또한 2013년 3월 29일 해양수산부 부활에 즈음한 인터뷰에서도 해운업의 발전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13년 정부가 발표한 중점육성 글로벌 종합물류업체 선정결과를 보면, 대기업의 자회사인 2자 물류회사가 전부 선정되었다. 이것은 대통령(박근혜)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누차 강조한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식 계열회사화 행위다. 물류는 특성상해운회사와같은전문물류회사가해야만유럽의쉥커(Schenker)나 퀴네앤나겔(Kuehne & Nagel) 같은 세계적인 전문 물류업체인 3자 물류회사가 우리나라에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자사 물류인 1자 물류와 자회사 물류인 2자물류는 독과점적 불공정거래로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분업화, 전문화와는 거리가 멀고, 현 정부가 내세운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건전한 중소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경제정책에서도 한참 벗어난다.” 이상 송철원, 󰡔개천에서 난 용들이 바다로 간 이야기󰡕, pp.55-56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제1세대 해운인들이었던 신성모, 박옥규, 황부길, 이시형 등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광복 이후 해운업을 일으켰던 이맹기, 박건석, 현영원, 김윤석 등 2세대 해운인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나는 2세대 해운인에 속하지만 아직 현업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해운업이 전문인의 영역으로 평가받고, 정책 우선순위에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내가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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