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상법 해상편 제정시 건의

 
 

默庵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회고록인 ‘묵암제해록’이 7월초 발간됐다. 이 책에는 그의 개인사는 물론 70여년 해운업계에 종사하며 한국해운의 역사와 동고동락해온 박현규 이사장의 해기사로서, 해운경영인으로서의 족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선급과 한국해양소년단, 해운학술활동 등의 시발과 진흥에 일조했던 그의 활약상이 드러나 있다.
한국해운업계 발전사의 단면을 담고 있는 ‘묵암제해록’의 내용중 제 4장 <해운비사와 봉사>의 내용중  △한국선급 △한국해양소년단 △한국해양대학교 △해운학술 활동 △해운비화 부분을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제주호의 (원외)선장으로 승선하고 있었던 기간 중에 잊지 못할 기억으로는 우리나라 해상법 제정 1차 위원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상법전(해상) 심의에 대한 제언’을 작성하여 제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개의 법들이 그렇듯이, 해상법도 식민지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법률을 해방이후에도 그대로 의용해 왔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3월 18일 조선민사령 제1조에서 “민사에 관한 사항은 본령 외의 법령에 의해 특별한 정함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음 법률에 의한다”라고 정하고, 제8호 상법, 제10호 상법시행령, 제12호 상법시행조례 등을 열거하였다. 그런데 일본 상법은 일본 민법과 함께 1889년 최초로 입법되어 1890년에 시행되었던 것이 식민지 시대 내내 적용되었고, 1948년 정부 수립시 제헌헌법 제100조에 따라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현행 법령은 그 효력을 계속 인정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의 상법전(해상법)이 1962년까지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준용되었다.

그 사이에도 독자적인 우리 법전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8년 9월 15일 대통령령 제4호로 판검사, 변호사, 법률담당 공무원, 법학교수 등으로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김병로 대법원장이 위원장을, 이인 법무부장관이 부위원장을 맡아 민법전, 상법전(해상법 포함), 형법전, 소송법전 등 기초법의 초안을 기초하였다. 1957년 말 상법 초안이 마련되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1958년에 제정된 민법에 밀려 심의조차 못하고 있던 차에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군사정부는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20~32명 이내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였는데, 1963년 12월 16일까지 1,300개의 각령을 발표 집행하였고, 헌법 이외에 725개 법률을 입법 공포하였다. 해상법도 1961년 하반기에 법전편찬위원회로부터 초안 등 관계 자료들을 넘겨받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법제사법분과위원회에서 심도있게 토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상법(해상법 포함) 분야의 심의위원으로는 연세대학교 손주찬(위원장) 교수, 서울대학교 서돈각 교수, 이균성(당시 간사) 등이 참여하였다.1)

1961년 나는 제주호의 원외선장으로 승선 중 상법전(해상) 심의위원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대한해운공사에서 육상근무와 해상근무를 하는 동안 업무 특성상 해상법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일본에 드나들 때마다 해상법 관련 서적을 구해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마침 해상법 초안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상법전(해상) 심의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80여 쪽에 달하는 건의안을 작성하여 동남아정기선 선장 명의로 발송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위원장이었던 손주찬 교수는 나의 제언을 받아보고 “승선 중인 해기사가 이런 글을 쓰다니 대단하다”면서 간사였던 이균성에게 “귀중한 자료이니 잘 보관해두라”고 했다고 한다.2) 2008년 한국해법학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이균성 교수가 “40여 년간 소중히 보관해 왔었는데, 이제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낫겠다”며 내게 그 제언서를 돌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가까이 지난 옛날 자료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해상법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던 자료라고 생각되어 한국해양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아래에 중요한 제언 몇 가지를 발췌한다.

“항해 생활이란 심히 사회와 몰교섭적이며 도대체 번잡다난하고 다기다양한 육상의 일들에는 우둔하기 한량없으며 일상 팽배대해(澎湃大海)만을 상대해온 단순한 머리로써는 추정조차 허용치 못할 일들이 꽤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망망대해에 유랑하는 일개 선원이 어려운 법률에 대하여 더욱이 그 법률을 창조하는 입법론에 대하여 심의완료를 목전에 두고 별안간 준비된 자료도 없이 항시 동요하고 고립된 선중에서 해운말단기엽을 담당하는 실무가로서는 본법을 심의감당하는 육상의 사계 지자제위(智者諸位)에게도 천려의 일실이 있을까 염려한 우자의 독백이 될지도 모르나 좌우간 법률이 우리들의 생활관계를 규범하고 현재 심의중인 상법, 특히 해상법을 …기법의 합·불합리를 포함하고 당장에 해운기업활동의 범주가 정해질 것이며, 공포 실시된 일국의 법률은 중대한 결함이 내포된 것이 현저할지라도 자체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그리 쉽사리 개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법(私法)은 불고불리(不告不理)의 원칙과 주장하지 않는 자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도 하니 기간의 체험적 애로와 평소의 소회를 개진함이 필요할 것 같다.…”

법전편찬위원회가 기초한 상법 초안도 대체로 현행 상법을 답습하였으니 이러한 법이 실시된다면 같은 운명에 놓여질 것이다.…① 현행 상법과 초안의 후진성을 설명하려고 한다.…현행 상법이 의용법률이며, 이를 답습한 초안이 1888년 브뤼셀 상법회의에 기초한 19세기 후기의 독일 구 상법을 계수한 것임은 공지의 사실이며, 근 1세기를 지난 현금 그간 비약적인 발전과 변천이 많았던 현상관습을 무시하고 입법론으로서 19세기에 소급하여 성문법의 단점을 확대시킬 이유는 없다.… ② 국제선하증권 통일조약의 내용을 국내법화하기 위하여 제정된 단행법인 국제해상물품운송법의 공포실시로 현행 해상법의 후진성과 비현실성을 거의 완전하게 보충시켰으므로 현상법의 해상운송법은 국내연안 선박에만 적용될 뿐이다.… 대한해운공사의 10여 척을 제외하면, 1~2척을 가진 해상기업체가 불과 2~3개사에 지나지 않는 상금도 창조적 과도기에 있는 작금의 현실은 한국 해상관례란 그 기준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에 대한 사실의 관습 및 관습법의 뒷받침도 없이 성문법의 모호, 부당, 결함으로 해상기업거래 활동을 당사자간의 자의에 방임한다는 것은 그 부당의 보충은 커녕 오히려 그 방임성에 비례해서 공연한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할 뿐이며 결국 현재와 같이 해상(海商)에 관한 한 모든 판단의 기준이 타국가법률의 의존성만 농후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지리멸렬의 상태에 있는 오늘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 당연히 실현성있고, 합리적인 입법이 필요할 것이다.…

초안은 국제적인 추세와 현실적으로 자국해운이 위치한 실정의 참조 없이 문리적(文理的) 논리적 관념에 치우지고 구태에만 고착되었으므로 해상운송기업형태의 변천과 발달에 기초한 신사업가에 대하여는 눈가림을 하였다고 생각되며, 그 대표적인 모순을 개괄하고자 한다.… 선박 공유에 관한 초안의 대부분의 규정은 현재 그 가치를 잃은 것이며, 해상운송을 규정함에 있어서도 전기(前記) 부정기 범선시대에 발달한 용선계약을 중심으로 규정하고, 현재 해상운송계약 건수에 있어 절대다수이며, 경제적으로나 실제적으로서도 제1중요한 운송계약형태인 개품운송계약에 대하여는 용선계약에 공통한 것을 제외하면 불과 2개조의 특별규정(제782, 786조)이 있을 뿐이므로 극히 시대에 적응치 못하였다.”3)

당시 내가 제주호의 선장으로 승선하고 있었고, 늘 뱃사람의 입장에서 일하고 사고했기 때문에 선주와 선원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방향에서 입법해주길 청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 1962년 상법 해상편은 헤이그규칙을 수용한 것과 선가와 금액주의를 병용하는 선주책임제한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선주와 해상운송인에게 유리하도록 제정되었다. 1962년 상법 해상편에 나의 제언이 수용된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2장의 선장 및 선원이란 용어 대신 선장 및 해원으로 바뀜

② 20톤 미만의 선박은 적용 제외

③ 선주책임액을 정할 때 당초 선가주의와 위부주의를 병용하려 했으나, 선가주의와 금액주의를 병용하게 됨

④ 운송계약의 종류를 전부 또는 일부용선과 물품운송계약 2 종으로 대별함

⑤ 전부용선의 경우와 일부용선, 개품운송 경우를 구별하지 않고 대리선적권을 인정하려 했으나, 전부 인정하지 않게 됨

⑥ 공동해손의 그 처분을 행하는 자는 선장, 대행선장, 선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자에 한정하려 했으나, 삭제됨

⑦ 공동해손의 액을 정할 때 선박의 가액은 도달한 때와 장소, 적하의 가액은 양륙한 때와 장소의 가액으로 함

⑧ 공동해손 시한을 계산 종료후 1년 이내로 소멸시효를 정함

그러나 나의 제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항해과실이 선주배상책임에 포함된 것(746조), 선박 등의 가액 증명과 평가 기준의 존치(749조), 선주의 지시에 따랐을 경우라도 선장의 이해관계인에 대한 책임 의무(770조), 선적 및 양하 기한의 기산을 통지일 익일로 정한 것(798조), 운임 결정시 인도하는 때의 중량 또는 용적에 의하도록 한 것(801조), 공동해손 산정시 선박의 가액은 도착지 당시, 적하의 가액은 양륙지 당시로 정하도록 한 것(836조) 등이 그것이다.(부록 2 참조)

『한국해법학회50년사』에서 채이식 교수는 1962년 상법전(해상편)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62년까지 시행된 의용 상법은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의 상법을 말하는데, 정작 일본은 1957년 국제해상운송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1962년 제정된 상법은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반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법안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시행 중이던 일본 상법을 대부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2년 제정 상법 중 해상편은 1991년까지 30년간 사용되었다는 것은 1962년 상법 해상편이 그래도 상당히 신뢰할 수 있고 수준 높은 입법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1962년에 제정된 상법 해상편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해상보험을 해상법에서 분리하여 보험편으로 옮겨서 손해보험의 한 종류로 편입한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나 입법례에서 보나 대단한 변화의 시도였고 아주 독창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상법은 아직까지 해상보험을 해상법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의의는 당시 시행되고 있던 해상법에 관한 국제조약을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1962년 상법 중 해상편에서는 선주책임제한제도를 채택하였다. 선주는 항해 종료시 선박 가격 한도로 책임을 제한할 수 있고, 이 한도는 선박톤수에 비례하는 일정 금액을 초과할 수 없었다. 운송인의 책임과 관련해서는 의용 상법 제3장 운송을 그대로 따랐지만, 1924년 헤이그규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제738조 감항능력 의무 조항에서 선박 소유자는 용선자 또는 송하인에 대하여 발항 당시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를 하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것을 담보한다는 규정과, 제739조 면책약관의 제한 조항에서 선박소유자는 특약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과실, 선원 기타 사용인의 악의 또는 중대한 과실 또는 선박이 항해를 감내할 수 없는 것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손해를 배상하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조항 이외에, 헤이그규칙을 수용하였다는 것은 매우 용기있는 결정이었으며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1962년 이전의 의용 상법 해상편은 공동해손과 선박충돌을 하나의 ‘해손’이라는 하나의 장으로 취급하고, ‘해난구조’를 독립된 장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62년 해상편은 공동해손, 선박충돌 및 해난구조를 각각 독립된 장으로 분리하였다. 전통적으로 해상법은 다른 법에 없는 해손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왔고, 이를 해상보험과 공유해 왔다. 해손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해상법에 공동해손이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고, 이것이 해상보험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공동해손, 선박충돌 및 해난구조를 별도의 장으로 규정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4) 1962년 해상법은 1962년 1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현 서울시의회)에서 의결되었고, 1962년 12월 12일 약간의 오자와 탈자를 수정·개정하여 1963년 1월1일부터 시행되었다.

내가 한평생 풍국해운 설립자로, 또 고려해운 경영자로 성공적으로 해운업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해양대학에서의 교육과 승선생활의 실전, 대한해운공사에서 익혔던 선박과 해운 관련 실무, 실무 과정에서 익히고 쌓았던 해상법에 관한 지식 덕분이었다. 나는 해기사의 직무나 해운업의 경영상 해상법 지식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틈나는 대로 일본 서적을 사서 읽고 익혔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해운공사의 해무조사역으로 일하면서 국민대학교 법학과(야간과정)에 학사편입하여 공부하였다. 당시 국민대학교 교사는 현재 경복궁 서문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해운공사 본사와 가까웠다. 야간 과정에는 공무원, 군인, 경찰공무원 등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이때 무애 서돈각 서울대학교 교수가 출강하셨는데, 그때 만난 인연으로 무애 선생님은 나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한국해법학회의 창립

나는 대한해운공사에 근무할 당시 업무의 성격상 해상법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고등 통합 과정을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나는 일본어를 읽고 이해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일본이 우리나라 보다 해운관련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승선 중이거나 대한해운공사에 근무할 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의 해운과 해상법 관련 서적을 사서 읽곤 했는데, 지금도 우리 집 서가에는 당시 구입한 책들이 꽂혀있다. 이러한 해운 선진국의 지식 습득을 통해 나는 선급의 발안과 해상법 제정 건의 등을 나름대로의 논리와 실질적 경험을 토대로 앞장설 수 있었다.

나는 해법학자도 아니지만, 해법을 실무에서 다룬 경험자이자, 선박의 운항을 책임져야 할 선장의 입장에서 해법은 해운업을 경영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고려해운 전무이사로 일하고 있을 때니까 1960년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사카모토(阪本)방직을 설립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이 서갑호(일본명 阪本榮一, 1915-1976)였다. 그는 일본의 임금이 올라가자 1963년 태창방직을 인수하여 판본방직을 설립한 뒤 1967년에 방림방직으로 개칭하였다. 그 공장이 영등포에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기업이었다. 방림방직은 일본 사카모토방직의 기계와 설비를 이전하여 설립되었다. 고려해운은 사카모토방직의 방직 기계와 설비를 한국으로 수송했는데, 선B/L을 요구하였다.

당시는 화물 얻는 게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울 때니까 짐만 준다면 선B/L 발행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운임 정산을 일본의 사카모토방직에 청구하려고 하니 회사가 부도 처리되어 버렸다. 우리는 법원에 방림방직에게 운임을 정산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에서 “일본에서 부도가 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호텔에서 로타리모임을 하고 있는데, 일본통운의 해상고문변호사가 참석했다. 나는 행사 뒤에 5분만 만나 달라고 요청하여 위와 같은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그 변호사가 5권으로 된 일본의 『해상법』 의 3권에 ‘해상법 요율’ 항목에 “해송화물은 송화주, 수화주, 실화주가 부진정(不眞正) 연대채무를 진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송화주가 부도가 났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수화주가 운임을 지불해야 한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이를 재판부에 제출하여 결국 운임을 받아낸 적이 있었다.

고려해운 전무로 있던 1972년 경성공작소와 관련된 사건이 터졌다. 영등포에 소재를 둔 경성공작소는 박태진이 설립한 회사로 일본에서 수도관을 수입해서 정부에 납품하는 것을 주로 하는 회사였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에서 수입화물을 선적해 운송했는데 경성공작소가 부도가 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도다 슈죠(戶田修三)라는 해상법전문변호사에게 문의를 했더니, “해송화물은 본안 소송을 하지 않고도 화물을 바로 압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고려해운 자문변호사나 주임판사도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경성공작소의 화물을 압류해서 경매처분해 운임을 변제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상법이 우리나라 상행위를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상법이 제대로 되어 있기 않았기 때문에 해상운송인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많았다. 내가 대한해운공사의 해무조사역으로 일할 때 국민대학교 법학과 학사과정(야간)에 편입학하여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서돈각 선생이 강의를 나오셨기 때문에 이따금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나는 서돈각 선생을 평생의 은사로 생각하고 있고, 2009년부터 현재까지 무애문화재단의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서돈각 선생은 “해상법이라는 것은 세계 공통의 판단과 법의 원리를 모두 알지 못하면 안 된다”면서 “자기는 일제 강점기에 법을 배웠는데, 해상법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법 전공자와 해양대 출신들이 함께 협력해서 해상법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 위해 해법회를 만들어 보자”라고 제안하였다.

나와 서돈각 선생의 인연, 손주찬 선생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해법회’ 결성의 구상이 구체화되었다. 내가 고려콘테이너터미널의 대표를 맡고 있었던 1978년 7월 25일 우리 회사의 회의실에서 발기인 18명이 창립준비회의를 갖고, 당시 한국해양대학 교수였던 배병태를 창립준비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한달여 간의 준비를 마친 끝에 1978년 8월 23일 한국해양대학의 실습선 한바다호 회의실에서 서돈각(徐燉珏)5) 상사법학회(商事法學會) 회장, 나(고려콘테이너터미널 대표), 이준수(한국해양대학장), 대한변호사협회 사무총장 박원서(朴元緖)가 발기인 대표가 되어 한국해양대학의 연습선 한바다호 회의실에서 한국해법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서돈각 선생을 모셨다. 당시 발기취지문에는 “우리나라는 그간의 경제발전에 따라 이에 관련되는 해운, 무역, 금융, 보험, 조선 등 해사관련 산업에 관한 법제의 조사 정리의 필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우리나라와 외국의 해법의 조사 연구와 해법의 국제적 통일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국해법회를 창립한다”고 밝히고 있다.6) 초대 부회장에는 연세대학교 손주찬(孫珠璨)7), 박원서, 김창갑(金昌甲), 배병태(裵炳泰)와 내가 선임되었다.

그 뒤 나는 해법회의 이사로, 특히 1978년 8월에는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해외에 출장을 가거나 특별히 처리해야 할 긴급한 일이 없는 한 총회에는 참석해 왔다. 물론 학자가 아닌 나로서 어떤 사안을 특별히 발표했던 일은 없다. 주로 학자들이 발표하는 연구를 조용히 경청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누구인가 현장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발표하거나, 현장의 실태를 묻는 경우에 나는 내 본분으로서 현장의 실태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는 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회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만큼 해 왔다고 생각한다.

 

한국해운학회 창립
한국해운학회 창립

한국해운물류학회의 창립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내 각 대학에 우후죽순처럼 무역학과가 설치되고 그 커리큘럼이 짜여진 것은 국가의 시책으로 보거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여 준다는 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국제통상(International Trade)의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한 각 대학 무역학과의 커리큘럼은 대체적으로 무역실무, 국제무역이론, 국제금융, 국제 통상정책, 국제경영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학교에 따라서 국제통상에 필수적인 영어회화 및 무역영어 프로그램에 중점을 두기도 하였고, 국제경제 환경에 대한 현실 감각을 높이기 위한 국내외 기업 및 무역 상대국에 관한 정보의 수집 및 분석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습에 중점을 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제통상 분야의 전문가를 정기적으로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여 통상 분야에 대한 학생들의 현실 감각을 높이고, 경영학부의 회계학 및 경영정보학 등 다른 전공분야와 연계하는 데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많은 학교의 무역학과의 커리큘럼 가운데 상당한 학교가 무역조건(trade terms)의 핵심을 이루는 운송(transportation or carriage)이나 보험(insurance)과 관련된 분야를 결여하고 있었다. 무역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 거래의 대상이 되는 물품의 가격이 얼마인가? 일반적인 거래에서와 마찬가지로 물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buyer)이 그 물품을 파는 점포를 찾아가 그 물품을 구입하는 경우라면, 그 물품의 가격은 그 물품의 원가에 물품을 파는 사람(seller)의 이윤을 보탠 것으로 간단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국제통상의 경우에는 매도인과 매수인이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에, 그 물품의 소유권이 어디에서 이전되는가에 띠라 운임 및 위험의 부담이 달라지므로 그 가격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 무역학과의 커리큘럼에 운송과 보험에 관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운송이나 보험에 관한 학자가 양성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역학과를 개설한 것은 성균관대학교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균관대 무역학과에 재직 중이던 한동호는 1974년 7월 22일 한국무역학회의 설립을 발기하고,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64년 5월 2일에는 한국보험학회의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회장, 체3대 회장 및 제7대 회장 등 세 번이나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상보험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어서, 기초적인 상식을 결여한 나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음을 늘 부끄러워했다.

한동호가 박은회를 대동하고 윤상송을 방문한 것은 1970년대를 전후하여 각 대학마다 우후죽순처럼 설립된 각 대학 무역학과 커리큘럼이 결여하고 있는 국제운송 분야의 주축을 이루는 해운을 연구하는 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해운 관련 학회의 설립을 윤상송에게 권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상송은 틈틈이 만학도로서의 배움을 이어가면서도 1951년 12월부터 1956년 11월까지 한국해양대학교, 1958년 4월부터 1960년 8월까지 인하공과대학, 그리고 1965년 2월부터 1968년 2월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등에서 해운행정 내지 해운정책 등에 관하여 강의하였다. 한동호는 오래 전부터 그러한 윤상송과 안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윤상송에게 성균관 대학에서의 특강을 부탁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세 사람의 협의는 쉽게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1982년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윤상송을 계속 방문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윤상송이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월간 해양한국의 편집을 맡고 있던 이원철(李源哲)을 합석하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처하여 있는 현실을 설명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원철로서는 그 간의 대화에 대하여 따로 설명을 들은 일이 없었으나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해운관련 학회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감을 이루고 있었지만, 누가 주도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단체이건 그 단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 그것을 뒷받침하는 재정문제 등등 모든 것을 그 구성원들이 꾸려 나아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직 그러한 단계에 있지 못하였다. 특히 학회의 경우 회원의 회비만으로 학회의 재정을 해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윤상송은 정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재정적 지원이 가능하더라도 정부의 재정지원에 의존하면 정부의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학회로서의 올바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업계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해 오면서 체험적으로 느낀 바였다.

그러나 윤상송은 물론 한동호, 박은회 어느 누구도 재정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윤상송이 학회 설립의 주도를 고사한 이유는 뒤늦게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는 하였지만, 첫째, 학자로서의 경력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호가 윤상송이 주도하여 줄 것을 권유한 것은, 그래도 윤상송이야 말로 대한민국에서는 해운 문제를 연구한 유일한 전공자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전혀 해운과 무관한 어느 누가 해운학회를 운영해서는 성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원철을 부른 것이었으나, 이원철은 그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제시할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았거니와 그런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원철은 그러한 문제는 차차 생각하고, 해운을 공부한 학자나 해운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자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만 답변하였다.

이원철의 이 같은 엉뚱한 답변으로 윤상송과 한동호 및 박은회의 줄다리기의 매듭이 지어졌다. 이에 따라 1982년 8월 16일 윤상송, 한동호, 박은회, 서병기, 최재수, 배병태, 이균성, 이준수, 민성규, 박현규, 황근식, 이원철 등을 발기인으로 하여 한국해사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발기인총회를 개최하였다. 발기인 총회에서는 윤상송을 발기인 대표로 선임하고 총회 준비간사로 배병태와 이원철을 선임하고, 1982년 8월 27일에 가칭 한국해운학회의 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원철은 윤상송 발기인 대표의 지시에 따라 창립총회 준비로 학계의 대학 교수들과 업계의 임직원 가운데 회원이 될 만한 사람들을 윤상송과 한동호의 의견에 따라 150명 정도의 명단을 만들어 소집공고문을 발송하였다.

이에 따라 1982년 8월 27일 한국선주협회 제1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40명 정도의 인원이 참석하였다. 이 날의 창립총회에서 임원의 선출에 뒤이어 정관을 제정하였다. 즉 이 날의 총회는 회장에 윤상송, 부회장에 나(당시 고려해운 대표이사)와 한동호, 서병기(동지상선 대표이사), 신민교(한국해양대학 학장) 등 4인을 선임하고, 감사에 이균성(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과 최재수(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기타 이사의 선임에 관해서는 시간과 관례상 회장단에 위임하였다. 총회 개최 후 약 한 달 뒤인 1982년 9월 24일 한국해운학회는 한국선주협회 제1 회의실에서 1982년도 제1차 이사회를 개최하고, 사업분과위원장에 서병기, 재정분과위원장에 나(박현규), 편집분과위원장에 한동호, 그리고 연구분과위원장에 신민교 부회장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사무국장으로는 회장의 직권으로 이원철 해사문제연구소 이사를 임명하였다.

학술지의 창간은 1984년 3월 19일 한국선주협회 회의실에서 개최된 1983년도 정기총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된 사항이었다. 또 이 날의 정기총회에서는 정관의 일부를 개정하여 부칙 (2)를 신설하였다. 한국해운학회는 1982년 8월 27일 설립되어 정관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임하였는데, 임원은 총회에서 선임(제11조 제1항)하고, 그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중임(重任)할 수(제2항) 있도록 규정하고, 또 정기총회는 매년 1회 결산기로부터 3월 이내에 개최(제15조 제1항)하도록 규정하고, 회계연도는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제23조)로 규정하고 있어서, 1982년 8월 27일 선임된 초대 임원의 임기가 정기총회 개최시기와 달라 혼선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혼선을 해소하기 위해 ‘초대 임원의 임기를 1984년 3월말까지로 하는’ 조항을 부칙 (2)로 신설하였다.

총회에 참석한 회원의 대부분이 해운학회의 재정 사정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학회지를 발간하지 못한다면 학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므로, 그러한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집행부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었다. 이와 같은 논의에 윤상송은 자신의 현실론을 접고, 학회지의 창간을 1984년도 최대의 중점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분명히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사무국장은 회비를 납부해 줄 것을 당부하는 공문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각 회원에게 송달하였다. 그러나 회비의 수령은 지극히 부진하였다. 이에 대한 마지막 수단으로 윤상송은 서병기를 해사문제연구소 사무실로 불러 이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였다. 학회의 창립을 논의할 때부터 서병기는 재정에 관한 문제라면 자신이 능력이 허용하는 한에서 최대한 협조하겠지만,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적극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해운학회지의 창간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됨에 따라, 학회 사무국은 전 회원을 상대로 학회지의 창간과 창간호에 게재할 원고의 모집을 공모하였다. 그 결과 원고 마감일인 1984년 9월 30일까지 10편의 원고가 접수되었다. 다소 원고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으나 편집분과위원장인 한동호의 지휘 아래, 투고 원고 10편 모두를 창간호에 게재하기로 하고, 삼진인쇄소(사장 박용수)와 정식으로 인쇄계약을 체결하고 원고를 송고하였다. 삼진인쇄와 정식으로 인쇄계약을 체결하였다 함은, 인쇄소와의 계약 및 그 인쇄인의 명기가 발행 및 편집인의 명기와 함께 상술한 문화공보부 등록 요건의 하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계약 형태로나마 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편집을 비롯하여 용지의 구입 및 학회지가 발간된 뒤의 배포 문제 등 소소한 문제는 일괄하여 이원철 사무국장에게 위임되었는데, 최종적으로 학회지의 제자(題字)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논의되었다. 한동호는 이름이 알려져 있는 서예가에 부탁했으면 하였지만, 학회에 그럴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어 이원철은 일반 활자체로 하기를 주장하였다. 그 절충으로 이원철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던 ‘한석봉 체 천자문’ 한 권을 사서 집자(集字)하였으나, 몇몇 글자는 천자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글자가 아니어서, 둘 이상의 다른 글자에서 일부분씩 따서 한 글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1984년 10월 20일 한국해운학회지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해운학회와 나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는 해운학회가 발기될 때부터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기도 하였지만, 원래 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적극 참여할 공간이 없었다. 물론 해운학회는 창립 초부터 학회는 산학협동(産學協同)을 표방하였고, 참여 인원을 보더라도 학자들보다는 현장의 실무자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무역학과와 물류 관련 학과들이 개설되면서 점차 학자들의 비중도 늘어나고, 산학협동 정신도 다소 약화되어 가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1982년 창립 이후 해운학회가 어려울 때마다 산학협동 정신에 입각하여 학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그러나 내가 전문 연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논문을 발표한다거나 투고하는 것은 아니었고, 학회의 학술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정적 지원이나 산학협동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발 벗고 나섰다.

기억에 남는 일로는 선상물류국제포럼 개최 시 관련 여객선업체에 협조를 요청하여 3등선실을 예약하고 1등선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준 일이다. 해운학회가 주관한 선상해운물류포럼은 2004년 평택→일조→곡부→태산 등을 돌아보는 일정에 89명이 참가하였는데, 장금상선과 황해페리가 협찬해주었으며, 2005년 위해→봉래→청도 등을 관람하는 일정에 49명이 참가하였으며, 창명해운과 위동항운이 협찬해주었다. 2004년과 2005년 선상물류포럼의 여행비는 각각 20만원과 21만원으로 매우 저렴하였다. 이는 선임을 3등 운임을 기준으로 책정하고, 여객선사로부터 1등실로 등급 조정을 받고 해운선사로부터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해운물류학회의 명예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회 회장과 사무국장 등이 협조를 요청하여 여객선사와 해운선사들로부터 협찬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

한국해운학회는 2000년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평가사업에서 『한국해운학회지』(현 『해운물류연구』)가 등재후보지로 선정된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에 따라 2002년 11월에는 학회명을 한국해운물류학회로 개명하였고,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영문학술지 Asian Journal of Shipping and Logistics를 2009년 창간하였다. 국제학술대회는 2000년, 2002년(제2회광양항국제포럼), 2004년(동해항국제심포지엄), 2006년(제4회광양항국제포럼), 2008년, 2009년(동해항국제컨테이너터미널마케팅페어), 2010년(제6회광양항국제포럼) 등 거의 격년제로 주최하였다. 이러한 국제대회는 공동주관기관의 지원 예산 외에 학회가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할 예산이 있었지만, 학회는 그럴만한 재정적 능력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학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김성준은 해운선사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 왔는데, 나는 고려해운, KCTC, 장금상선, 창명해운 등 도움을 줄만한 업체를 동원해 지원해주도록 했다.

한국해운물류학회의 사업에서 재정적으로 부담이 가장 컸던 것은 네덜란드의 Elsevier사에서 영문학술지를 호스팅(hosting)하는 문제였다. 2009년에 창간된 영문학술지를 발간하는 데 연간 3천만원 이상이 소요되었다. 영문학술지의 편집주간을 일했던 김성준은 이를 마련하기 위해 STX장학재단의 지원금을 받는 등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내게 도움을 요청해 와서 나는 장금상선의 정태순 회장과 한국선급의 오공균 회장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정태순 회장과 오공균 회장은 “선배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도와드려야죠” 하면서 기꺼이 도와주었다. 이러한 도움 덕분에 한국해운물류학회의 영문학술지 Asian Journal of Shipping and Logistics는 발간된 지 1년만인 2010년에 SCOPUS에 등재되었다. 물론 내가 영문학술지에 학술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지만, 아시아를 대표하는 해운전문학술지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탠 것으로 학술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해운물류학회의 창립 발기인이자 현직 명예회장으로서 학회의 성장과 발전과 함께 해 왔다. 그 덕분에 나는 한국해운학회 기념논총(2004년 4호)을 증정 받았고, 제9회 해사문화상(2000)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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