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콤파스에 연세대 유종해 명예교수가 나와 ‘한미 공조체제와 우리안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북한의 핵실험과 ICBM급 미사일 개발 및 발사로 우리의 안보가 우려되는 시점에 새 정부 들어 사드배치로 인한 쟁점화까지 맞물려, 과연 우리안보의 근간인 한미공조가 견실한지 궁금하여 한미협회 부회장 유종해 교수를 연사로 초청하였다. 이에 앞서 콤파스 좌장인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자전적 회고록 ‘묵암 제해록(默庵 濟海錄)’의 출간식을 간소하게 가졌다. 90평생을 바다와 더불어 살며 해운입국을 꿈꾼 묵암 박현규의 삶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겨있다. ‘음수사원(飮水思源)과 낙과사수(酪果思樹)’,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와 과즙을 먹을 때 나무의 고통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해사산업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묵암 같은 선각자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강사 유종해 부회장은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시간주립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연세대 교수로 부임하여 행정학교수와 행정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한국행정학회 회장과 이북5도청 함경북도 행정자문위원장을 맡았으며, 석학들의 모임인 태평관 기영회의 종신회원이기도 하다. 이날 발표된 전문을 게재한다.
 한미공조체제는 한국전쟁이 종전되면서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건재한 우리안보의 기본 틀이다. 최근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제는 한미연합사체제이다. 이 체제는 다년간 한미 양국이 연구한 최선의 결과물로 가장 우리나라 안보를 위해서 이상적인 장치라고 알려져 왔다. 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한미공조의 실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전과 미군의 참전
한국전쟁(1950.6.25-1953 7월)에서의 미군의 참전은 우리에게 구세주救世主 같은 일이었다. 여기에는 두 개의 기적이 있었다. 첫 번째 기적은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참전했는데, 아무리 트루먼 대통령이 신속하게 UN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어도 소련이 당시 출석했더라면 거부권을 행사하여 유엔군의 참전은 절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유엔군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16개국 194만 1,000명의 용사가 “전혀 모르는 나라, 한 번도 만나본적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이다. 두 번째 기적은 맥아더장군이 행한 인천상륙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仁川 상륙작전은 기적적인 전략으로 인천의 자연조건을 극복하여 이루어진 작전이다. 이 작전으로 한국전을 단시일 내에 끝내고 UN군의 승리를 가져온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 작전을 기해서 ‘귀신 잡는 한국 해병대’가 탄생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전사자 수를 보면 머리가 수그려진다. 미 국방부의 기록에 따르면 미군의 전사자수는 3만3,686명(미국재향군인회는 5만4,246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과 비전투 사망자 2,830명 합계 약 3만6,940명이며, 실종자가 2만4,495명, 포로 8,343명 부상자가 약 10만 명(9만2,134명)이다. 이 많은 미군이 UN군의 이름으로 물설고 땅 설은 우리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러므로 우리와 미국은 두말할 필요 없이 완전한 혈맹血盟이다.
 

한미연합군사령부 지휘체계
한미연합군사령부 지휘체계


한미동맹
1953년10월1일 조인되고 그 이듬해 1954년11월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군사동맹)으로 한미동맹이 탄생되었다. 이 조약은 다시 말할 나위 없이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이 되었다. 한미상호 방위조약은 이승만대통령의 대단한 공로이다. 이때 대한민국은 6.25남침으로 아무것도 없는 폐허의 상태였다. 이승만대통령은 휴전을 매듭짓고 우리나라의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이 한미 방위조약을 외교력(반공포로 2만3천명 석방 등)을 동원하여 맺고 현재까지 이 동맹관계가 지속되어 우리의 경제발전 GDP 1조4000억 달러와 세계경제순위 11위(2016년 기준)를 이룩하는데 절대적 공헌을 한 것이다.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설립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집행기구로 종전 후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사령부가 만들어져 한국의 안보를 책임졌다. 한미연합군사령부(Combined Forces Command)는 유엔군사령부체제보다 새롭게 1977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ecurity Consultative Meeting)에서 서종철 국방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 간에 창설되었다. 이어 1978년 7월 27일 제11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연합국사령부의 조직 및 기능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였고, 그 후 1978년 군사위원회의(Military Committee Meeting)에서 전략지시 1호에 따라 11월 7일 용산 미군기지 내에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임무 및 유엔군사령부와의 관계 설정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창설로 그동안 유엔군사령부가 수행해 온 한국방위업무를 한미연합군사령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평시합동참모본부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한반도 전쟁억지를 위한 위기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대비계획을 발전시키는 연습을 통해 한미연합전력을 운용하며 한국방어 임무의 수행을 준비한다. 유엔군사령부는 1950년 7월 7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정전협정에 대해서만 계속 책임지고 한미연합군사령관은 정전협정의 유지 관리에 관한 한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에 따르도록 설정되어 있다. 
 

편제 및 구성
한미 양국의 국가 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ational Command and Military Authority)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한미연합군사령관에게 전략을 지시하고 임무를 부여한다. 한미 간 동률 보직 원칙에 따라 사령관에 미군 4성 장군, 부사령관은 한국군 4성 장군으로 보임하게 되어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1) 통제권 이양의 역사

전시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은 한국전쟁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7월 14일자 공한을 보내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한 것이 작전통제권 이양의 역사의 시초이다. 정전협정 체결 후에는 1954년 11월 17일에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여 유엔군사령부에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
이에 따라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한 이후 한미연합군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1994년 11월 30일에 한미교환각서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을 한미연합군사령부로부터 한국군으로 이양하였다.
 

2)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
2007년 2월 23일에 열린 한미국방부장관회담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 4월 17일 부로 한미연합군사령부로부터 한국군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8년 8월에 한국군 주도로 을지 프리덤 가디언 훈련을 실시하고, 그 후에도 계속 대규모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를 북한은 계속 반대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와 로켓 발사 등과 전시작전권이양문제는 긴밀한 관계가 있으므로 향후에 이 문제는 한미양군 간 협의가 계속될 것이 기대된다.
 

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문제
촛불시위 세력과 현 여당(민주당)의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 사드는 큰 진통거리가 되고 있다. 이를 풀어 보기로 한다.
장소 문제는 일부 성주주민의 반대(당시 야당의 선동이 주효하였다.)에 당면하였다. 장소도 한번 옮겨 현 위치(롯데 골프장)로 왔다. 설치비용도 미국이 부담하느냐, 혹은 한국이 부담하느냐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정부는 미국이 부담하고 우리는 장소만 제공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의 노골적 내정 간섭과 방해가 있다. 사드를 설치하면 미국의 Radar가 중국 전역을 감시하기 때문에 설치를 반대한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롯데백화점에 대한 부당한 처사와 중국 유커의 한국방문 규제 등은 한중관계의 큰 골칫거리로 되어있다.

어쨌든 한미영수회담이 지난 6월 말에 있었고, 그 자리에서 한미동맹을 격상할 것이 합의되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우리 안보를 위해서 즉 한미연합사체제가 유효하다면 당연히 사드를 설치함이 우리 안보의 올바른 방향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기에서 한미협회 박진 회장의 글 「미중관계와 북핵문제」를 소개한다. 박진 회장은 하버드대학교 그레함 엘리슨 교수의 결정의 본질(Essence of Decision)을 소개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강력한 미국과 굴기하는 중국의 세력이 자칫하면 전쟁을 할 위험성도 있는데, 이 현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라고 하고, 여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양국 지도자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세계 1, 2위의 경제력을 가진 미국과 중국의 두 정상이 지난 4월 플로리다에서 만났는데, 그때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①중국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북핵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고, ②중국이 풀지 못하면 미국이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는데, 잘 안 될 때에는 미중 간에 충돌이 올 것을 경고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미중 관계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할이 긴요하다고 박 회장이 말했다.
 

맺는 말
최근 한국에는 촛불시위가 있었고, 그 결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성사되었다. 지난번 4월의 대선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되어 지금도 각료의 인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에 대한 반대 의견을 지금까지 견지해 왔다.
지난달(5월)더빈 민주당 상원원내총무가 사드문제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적지 않게 실망했다고 한다. 비 오듯이 날아올 북한의 로켓공격에서 한국 그리고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지켜줄 사드에 대해 그렇게 애매하고 소극적인 것에 놀랐다고 한다. 또 더빈 상원의원이 귀국하여 동료의원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이해할 수 없고 놀라워했다고 한다(조선일보 6월15일).

지난 6월 10일 의정부에서 미2사단 창설 100주년과 내년 평택 이전을 기념하여 친선공연이 계획되었으나 반미세력의 반대로 열리지도 못했다. 미2사단은 한국에 주둔한 지 52년이 되고, 한국전에서 7,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공로 있는 부대이다. 그곳에는 빈센트 브룩스(Vincent Brooks) 한미연합사령관 등 미국 측 다른 책임자들도 있었다.

  이 일과 얼마 전 성주의 사드 기지에 주유하기 위해 들어가려는 미군 트럭을 현지 시위대들이 못 들어가게 한 일 등, 이런 일련의 일들은 문재인 정부의 사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정부의 태도로는 위의 박진 회장이 주장한 중국 정부와의 강력한 협상뿐만 아니고 우리의 가장 중요한 한미공조의 파트너인 미국을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한미공조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된다. 그러나 한미공조체제는 문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깰 수는 없는 튼튼하고 복잡한 관계이다. 지난번 6월 29일에 있었던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이 확인된 것이 다행으로 생각한다.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미군의 주둔은 필요하고, 2) 한미공조체제로서 한미연합사는 공조의 최선 방식이고, 3)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한미연합사에 두고, 4) 사드는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한국민과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의 압력으로 우물쭈물할 때 북한의 오판을 불러드릴 수도 있다, 5) 끝으로 우리정부와 유관단체는 중국을 잘 설득해야 할 것이다.
 

‘아아! 영원한 스승 이준수 학장님!’
상보象步 이준수李俊秀 교수가 지난 6월 20일 타계했다. 마치 남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평생 다른 사람을 섬기며 도왔고, 해양대학 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서라면 몸이 부셔져라 일한 분이었기에 그를 아는 모든 이가 한 마음으로 깊이 애도했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너무도 잘 알았기에 모든 사람을 마음에 품고 이해하며 섬겼기에 그의 순수함과 진실함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제1회 바다의 날 기념 선상세미나 및 중국탐방에서 백두산에 올라 감개무량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피 끓는 애국청년 같이 상기된 모습으로 천지를 내려다보며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던 패기가 지금도 느껴진다. 또한 일본탐방때 시코쿠 마쓰야마 뒷골목의 선술집에서 정종을 한 잔 들며 지난날을 회상하시던 모습도 이젠 추억이 되어 버렸다.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길 떠나는 자식이遊子吟 배 위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迎母漂上作인 당나라 맹교孟郊의 시이다. 길 떠나는 아들이 입을 옷을 손수 바느질하며, 여린 풀 같은 자식이 행여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봄 햇살 같은 어머니 마음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아들의 노래이다.

......유학을 떠나는 날, 나오라고 하셔서 아침 7시쯤 학장실에 가보니, 선생님께서 단아한 모습으로 붓글씨를 쓸 준비를 하고 계시더군요. 선생님께서 먹을 갈라고 하셔서 먹을 갈아드렸더니, “남자가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매, 학문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뜻의 한시漢詩를 제게 적어주셨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스에마쓰 선생님이 “한국에 다녀와라, 그래야만 스트레스가 풀려 연구도 잘 될 것이다”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그 시가 떠올라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연을 스에마쓰 선생님이 듣고, ‘부산釜山의 홍상洪樣’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기억에 남는 제자’라는 신문 칼럼에 기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즉, 부산에 가면, 그곳엔 이준수 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제자를 유학 보낼 때마다 위와 같은 한시를 써서 보내기 때문에, 제자들이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에마쓰末松 선생님은 ‘부산釜山의 이준수선생李俊秀先生은 동양東洋의 군자君子’라고 다른 사람에게 선생님을 소개하셨습니다.......

이상은 해양한국 1991년 6월호에 실린 ‘사제師弟 간의 대화對話’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이준수 교수이고, 나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해양대학 홍창희洪彰禧 교수이다. 영원한 스승 상보 이준수 학장의 성품을 드러내는 진솔한 글이었다. “아아! 이준수 학장님, 정말 그립습니다” 여기저기서 고인을 회고하며 추모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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