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10일 정오, White Star Line사 소속 4만 6,500톤급 ‘Titanic호’가 Southampton을 출항한 다음 프랑스의 Cherbourg항, Ireland의 Queenstown에 들려 여객을 승선시킨 후 1,316명의 여객과 승무원 885명 총 2,201명을 태우고 대서양으로 진입, 역사적인 처녀항해에 나선다.
영국의 명문 Harland and Wolff 조선소가 회심작으로 건조한 본선은 이중선체(double skin)였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불침선박(unsinkable)이라고 불렀다. 취항에 앞서 1912년 초부터 Belfast에서 충분한 기간에 걸쳐 시운전을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본선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처녀항해시 본선에는 선주인 Bruce Ismay 회장과 미국의 금융재벌 John Jacob Astor 4세 부부를 포함 다수의 백만장자들이 승선 중이었다.

빙산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출항당시 선장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속항해를 계속하다가 출항 4일째인 4월 14일 밤 11시 40분, 전방 마스트에서 근무 중인 2명의 견시원lookouts이 어둠 속에서 빙산Iceberg을 발견하고 곧 급변침을 했지만 본선의 우현 선저부위가 대파됐다. 길이 약 90m에 이르는 파공을 통해 침수가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침몰했지만 구명정 부족으로 전원 탈출이 불가능했고 4월 15일 12:45분 마지막 구조신호를 타전하고 본선은 선수부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여 당일 새벽 02:20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조난신호를 타전했을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 ‘California’호가 있었지만 통신사가 당직실을 비우고 있었던 관계로 무응답이었고 조금 더 먼곳에서 수신한 ‘Carpathia’호가 뒤늦게 달려왔지만 결국 여객 807명, 승조원 696명등 총 1,513명이 사망했다, 

‘타이태닉’호 하면 우리는 선수船首에서 양팔을 벌리고 있는 로스(케이트 윈슬렛 분)와 뒤에서 껴안고 있는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애틋한 러브스토리(제임스 카메룬 감독)를 연상하지만 해운인들은 1,513명의 고귀한 인명을 북대서양에서 희생시킨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하고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지적이 있지만 이는 한마디로 전적으로 인간의 자만自慢이 초래한 재앙이었다.
과거 30년 동안 선박이 침몰한 사고가 없었는데 여객수에 맞추어 구명정을 갖춘다는 것은 낭비다, 타이태닉호는 침몰하기에는 너무나 큰 선박이다, 지난 30년 동안 정기여객선과 유빙이 충돌한 사고가 전무했다 등등 설계자와 조선소, 그리고 운항선사들의 과도한 자신감과 오만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고였다.

타이태닉호가 사고는 불침의 선박이라는 과신, 안전보다 스케쥴을 더 중시한 매니지먼트의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나아가서 빙산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 아니라 불침선박을 자처한 오만과 유빙이 흘러다니고 있는 해역을 고속으로 항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이해, 즉 리스크에 대한 인식 부족이 바로 침몰의 주인인 것이다. 타이태닉호의 비극이후 100년 동안 리스크를 경감시키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이어졌지만 원인이 인적과실이든 기계적 고장이든 불가항력이든 재난사고는 여전히 빈발하고 있다

타이태닉호 사고에 관해서는 Patrick Prior 저-The man who left the Titanic, Capt. Collins 저-The sinking of the Titanic, 101 Things You Thought You Knew About The Titanic등 많은 보고서와 저서들이 있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외견상 견시를 소홀히 한 체 고속으로 항해를 하다가 유빙에 부딪쳐 침몰한 비운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 명료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미국과 영국에서 사실관계, 유빙과 충돌한 원인, 구명정 문제(당시 본선에는 20대의 구명정 뿐), 캘리포니아호의 구조 활동, 타이태닉호의 구조신호탄과 조난신호의 수수 문제 등 광범위한 이슈를 두고 54일간에 걸쳐 마라톤 청문회가 개최됐지만,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래’와 같은 여러 의혹들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①비운의 Edward Smith 선장이 전방에 유빙이 있다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감속하지 않고  전속항해를 감행한 것은 최고속선에 수여하는 Blue Riband의 획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뉴욕에 정시 도착하여야 한다는 선주로부터의 압력 때문이었다.
②Edward Smith 선장은 선장 재임기간 중 군함과의 충돌등 사고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장으로 채용한 이면에는 모종의 사유가 있다
③이 배의 침몰로 인해 도산직전에 처해있던 White Star Line사는 보험금 1,250만 달러(타이태닉호의 신조가격은 1,000만 달러)를 수령, 도산위기를 면하였다
④California호가 4마일 밖에서 타이태닉호의 침몰을 미리 알고 대기상태로 있었다.
⑤White Star Line 회장은 구명정에 올라 생존하였는데 설계자는 사망했다. 우연인가?

이러 저러한 ‘설’들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태닉호 사고에 관한 원인조사의 핵심은 왜 감속하지 않았는지, 왜 구조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등 해기적 측면과 선주의 경영에 관련된 부분이었으며 확인되지 않은 의혹들의 내용도 그러한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각종 청문회의 주제 역시 사고의  원인(remote cause-遠因)과 근인(proixmate cause-近因)을 규명하기 위해 본선과 육상의 관리부문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조사기구의 주역들도 그 방면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조사의 어느 과정에도 정치권이 개입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사고에 대한 원인조사가 본연의 과제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타이태닉호 사고는 SOLAS(해상인명안전협약) 라는 국제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2014년 4월 한국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한 지 얼마되지 않아 뉴욕타임스지에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The truth shall not sink) 라는 제목 하에 이른바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광고가 실린 적이 있다. 그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사고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요구하는 ‘진실’이 자신들이 믿는 진실을 미리 정해두고 그것을 진실로 인정하라고 한다면 이는 사회적 분란과 갈등만을 초래할 뿐 사고의 재발방지라는 조사의 기본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사고의 조사 과정에서 난무하는 이른바 가짜뉴스(Faked news)의 폐해도 도를 넘고 있다. 미국 잠수함과 충돌했다거나 정보기관의 의혹을 덮기위한 고의적 사고라는 등 ‘진실논란’이 여전히 사그러 들지 않고 있으며 국민의 상처를 또 한번 덧내는 근거없는 갖가지 루머들이 지금도 떠돌아 다니고 있다.

대형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일벌백계, 성역없는 수사, 실체적 진실규명 등을 강조하지만 정확한 사고원인과 진실을 완벽하게 규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조사의 전문성과 객관적인 접근방법 여하에 따라 진실에 그 만큼 더 가까이 근접할 수 있을 뿐이다.
드러난 사고의 형태만을 보고 누구의 잘못이라고 예단한 가운데 어느 특정시각, 계층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사고의 배후에 내재 혹은 잠재해 있는 독소적 요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 가장 쉬운 타깃 즉 속죄양을 찾는 것이 이제까지의 관행이었다. 선장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퇴선하는 것만 비판의 대상이 될 뿐 왜 선장이 그랬어야 했는지, 긴급상황 하에서 당연히 퇴선명령을 내렸어야 할 선장이 왜 주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탓하기만 바쁠 뿐 무엇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등을 포함해서 사고에 이르는 이른바 원인과 근인의 연결고리는 묻혀진 채 해운외적 논쟁만 계속되고 있다. 사고가 정치적으로 조명될 경우 원인조사나 고귀한 희생을 통한 교훈도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혹시 정치환경이 바뀌면 이미 해기적, 기술적 조사를 마친 초기단계 조사부터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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