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통해야 세계로 나간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재난해 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필자와의 협의를 통한 관련내용 연재는 이번호가 마지막이다.  <-편집자 주>
 

너무 동적인 靜石의 출발
조중훈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2월 11일(음력)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아버지 조명희와 어머니 태천즙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미동공립보통학교(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해원양성소(현 한국해양대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훗날 수송외길을 고집한 기업인이 되었다.

조중훈은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과학과 수학 성적이 뛰어났다. 공작과 기계에 남다른 호기심과 재능이 있어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뜯어보곤 했다. 이러한 조중훈이 걱정스러웠던 그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동(動)한 것을 경계하고 정(靜)한 성품을 더해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석(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꿈과 모험심이 가득한 어린 정석은 정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동적이었다.

10대째 서울토박이로 살아온 조중훈의 집안은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서 형편이 넉넉했지만 휘문고보를 다니던 1930년대 중반,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대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종로 일대 포목상들의 수입이 괜찮다는 친구의 말만 듣고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어 포목점을 차렸으나 얼마 못가서 대규모 자본과 조직적인 판매망으로 공세를 펴는 일본 도매상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다. 풍족하던 조중훈의 집안은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 정도가 되어 고심 끝에 학교를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고 진해에 있는 ‘해원(海員)양성소’를 선택하였다.
 

세계의 바다를 누비게 될 첫 걸음
오늘날 해양대의 모태인 해원양성소는 선원이나 선박정비사를 키우는 기술학원에 가까웠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도 가르쳐주는데다 한 달에 8원이 넘는 봉급까지 주는 그곳은 어린 조중훈에게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해원양성소에서의 생활은 배가 뭔지, 항해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혹독했지만 조중훈은 힘든 줄 모르고 신이 나 있었다. 기계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술을 익히는데 몰두한 결과,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고베에 있는 후지무라조선소에서 일할 수습생으로 발탁되어 열 입곱 나이에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서도 손재주를 인정받은 그는 고베뿐만 아니라 오사카와 히로시마 등지의 공업지대로 스카우트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40년 조중훈은 마침내 조선소 수습을 마치고 일본 운수성으로부터 2등기관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우선사 소속 외항선에 올라 중국 톈진과 상하이, 홍콩을 비롯해 동남아 각지로 항해했다. 이 항해를 통해 조중훈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조선이 얼마나 좁은지 실감했다.

‘지금은 일본 배를 타고 왔지만 언젠간 나의 배, 조선의 배를 타고 오리라.’그가 훗날 한진해운, 한진중공업으로 세계의 바다를 누비게 된 것은 그때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문물을 접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조중훈은 1942년 여름, 해원양성소를 나와 열일곱 나이에 현해탄을 건넌지 5년 만에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썼다 고쳤다를 반복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객지에서 한 푼 두 푼 모은 밑천을 쥐고 엔진 재생을 전문으로 하는 자동차수리업을 위해 ‘이연(理硏)공업사’라는 공장 설립을 서둘렀다.
 

한민족의 전진 - 한진 설립
당시 자동차는 목탄을 연료로 썼는데 연소할 때 나오는 카본 때문에 엔진 수명이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늘어나는 자동차에 비해 수리공장은 턱없이 부족하여 기계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던 그는 엔진재생업이 전망 있다고 판단했다. 조중훈이 사장 겸 기술자로써 밤낮없이 일한 덕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찾는 고객이 늘어 그해 겨울에는 보링기계를 한 대 더 들여놓고 직원도 열 명이 넘게 될 무렵,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3년 8월 조선총독부는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을 군수지원체제로 편입시키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자동차 정비공장으로 번듯한 모습을 갖춰가던 이연공업사는 설비를 군수업체에 넘기고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징용 영장까지 날아들었으나 용산에 있는 철도공작창에 기술직으로 들어가 가까스로 징용을 피했다.

1945년 여름, 일제에 회사를 빼앗기고 강제징용을 피해 공장에 들어갔다가 나온 조중훈은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당시 인천 항동집 근처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카바이드를 취급하는 무역회사가 있었는데 한동안 그곳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인 사장은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을 배운 조중훈에게 회사를 넘겨주었다. 이연공업사를 정리할 때 받은 약간의 보상금과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트럭을 한 대 장만해 1945년 11월 1일 마침내 ‘한진상사’간판을 내걸었다.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을 담은 스물다섯 청년 조중훈의 사업 보국 의지가 빛나는 이름이었다.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난 인천항에는 상하이에서 온갖 물자가 밀려들었다. 조중훈이 인천을 사업의 근거지로 정한 것은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진상사를 설립한 후 무역업 등록을 하고자 했으나 무역업 허가에 많은 규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격 요건을 구비한다 해도 ‘배경’이 없으면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에 조중훈은 인천항을 드나드는 화물선을 보며 운송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산업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생고무와 식용유를 비롯해 거의 모든 생필품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 각지에서 들어왔기에 한진상사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물자를 서울로 실어 나르며 착실하게 성장했다. 조중훈은 헐값으로 배와 트럭을 사들여 직접 수리하면서 장비를 늘려 나갔고 2년이 지나자 보유 화물차가 15대로 늘어났으며 수송업 면허도 정식으로 받았다. 한진상사는 창업 5년 만에 트럭 30대와 화물운반선 10척을 보유한 작지만 탄탄한 회사로 기반을 다질 무렵, 또 한 번의 시련, 6·25가 터졌다.

운수업과 무역업을 통해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던 한진상사는 전쟁이 일어나자 문을 닫아야 했다. 태평양전쟁에 이어 6·25가 사업을 또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조중훈은 재기를 서둘렀다. 폐허 위에 천막으로 세운 가건물에 다시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고 전쟁 전에 쌓아놓은 신용으로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트럭을 몇 대 장만하여 전후복구 물자 하역으로 꿈틀대는 인천 땅에서 다시 일어섰다. 2년쯤 지났을 때는 6·25 직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인천항 부근에는 한진상사와 비슷한 규모의 운송업체가 50곳이 넘는 바람에 또 한 번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미군물자 대리수송 - 첫 3PL
조중훈은 불안한 전후 상황에서 돈을 벌려면 달러를 벌어야 함을 직감하고 미군이 인천항으로 반입해 수십만 평 규모의 부평 보급창을 거쳐 의정부, 동두천 등지의 부대로 운반하는 군수품에 주목했다. 그러나 당시 미군들은 한국 업체의 수송 능력은 고사하고 근본적으로 한국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군수물자가 인천에 하역되면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트럭 위에 올라타 보급품을 아래에 있는 아이들에게 집어던지는 ‘얌생이’들이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한국인은 도둑질만 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미군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조중훈은 군용 캔맥주를 미군과 계약한 큰 업체의 하청을 받아 대리수송을 해주는 일을 하면서 미군부대에 출입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미군 물자 대리수송은 오늘날 물류 개념으로 보면 수송 부문을 아웃소싱하는 ‘3자 물류'이다. 

당시로서는 캔맥주 운송권을 따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지만 조중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미군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야만 했다. 매일같이 업무가 끝나면 직원들을 데리고 부두로 나가 미군들이 하역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미군 트럭에 문제가 생기면 고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조중훈의 이름 석 자가 미군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고 그에게 신뢰를 갖게 되었다.

미군들에게 결정적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부암장 송별회’였다. 한 번 알게 된 미군 장교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별장인 부암장에 초대해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이곳에 특급 호텔의 요리사를 초빙해 풀코스 식사를 대접했고 그 자리에서 사업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저 친구 대 친구로 맛있게 저녁이나 먹고 가라는 것이었다. 펜타곤에서도 수송장교 출신이면 조중훈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고 본국에 돌아가 국방부 고위직이 된 미군 수송장교들은 훗날 조중훈이 베트남에서 엄청난 기회를 잡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해외 첫 사업의 성과 - 퀴논항의 항만하역
1965년 어느 날,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은 베트남에 파병과 함께 한국용역군납조합을 만들기로 했다며 조중훈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6·25때 일본이 군수경기를 타고 막대한 외화를 번 것처럼 베트남전에서 우리나라도 사업 기회가 있을 것으로 내다본 조중훈은 흔쾌히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간접적으로 주워듣는 베트남 소식만으로는 사업구상이 불가능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 국방부와 접촉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는 미국 펜타곤으로 향했다. 펜타곤에 돌아온 미군들은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조중훈을 격려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워싱턴에서 40일 넘게 머물면서 그는 베트남 상황을 낱낱이 파악한 후 사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해 12월, 조중훈은 경제시찰단을 꾸려 동남아 순방에 나섰다. 좁은 창으로 넓은 퀴논항을 내려다보니 항구는 미국과 홍콩 등 각지에서 물자를 싣고 온 대형 선박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정박하고 있었다. 순간 조중훈은 직감적으로 하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체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사업아이템을 잡았다. 귀국하자마자 인천과 부산 하역장에서 화물 처리과정을 파악하고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하역요율표를 구해왔으며 미국 브루클린을 비롯한 주요 국제항구의 하역 자료를 수집하는 등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조중훈은 퀴논을 베트남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사이공은 안전에 대한 위협이 컸지만 퀴논에는 한국의 맹호부대가 가까이 있어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퀴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예상대로 군수물자 하역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조중훈은 군수물자를 적군일지도 모를 베트남 업체에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한진상사에 맡겨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군 수송책임자는 하역 경험이 없는 한진상사에 수의계약으로 일을 맡길 수 없다며 공개입찰에 참여하라고 일축했다. 조중훈은 한진상사에 맡겨주면 100일 안에 작업을 시작해 사흘에 한 척씩 하역을 처리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하루에 1만 달러의 벌금을 내는 대신 하역비를 국제기준가의 세 배로 달라고 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조중훈은 주월미군사령부에서 계약금 790만 달러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조중훈은 선발대를 진두지휘해 군수품 하역을 시작했다. 잠도 자지 않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갑판과 부두를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첫 임무로 주어진 1,500톤을 운반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2시간이었다. 미군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정도면 1주일은 족히 걸렸을 작업량이었다. 작업 현장은 전장 그대로였다. 월맹군의 기습을 의식한 공포감, 보급물자를 약속시간 내에 운반해야 한다는 강박감, 달러를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의욕이 어우러진 숨막히는 드라마였다.

한진의 깔끔한 일처리는 베트남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선박 접안시설이 부족해 늘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퀴논항은 한진의 손길이 닿으면서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군수품을 실은 선박이 외항에서 하역을 기다리는 일도 없어졌다. 군수물자는 부지런한 한진 직원들 덕분에 신속하게 전선의 각 부대로 전달되었다. 수송을 관리하는 미군들은 엄지를 추켜세웠다.

베트남에서 성과를 거두고 도약의 기회를 얻은 조중훈은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갈 사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송을 통해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수송보국’의 창업정신에 입각해 탄생한 사훈은 「創意와 信念」, 「誠意와 實踐」, 「責任과 奉仕」, 즉 ‘창의와 신념’으로 사업을 일으키고 ‘성의와 실천’으로 사업을 발전시키며 ‘책임과 봉사’로 사업의 성과를 나누고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담고 있다.
 

부실의 대한항공공사 인수, 무모한 도전
베트남에서의 성공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조중훈은 해운업 진출을 검토하고 있었다. 해상운송으로 미국이나 유럽과 대규모 무역을 하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운업에 진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컨테이너 전용 민자부두를 착공하고 30억 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중훈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달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항공공사는 당시 20여 개의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는 골칫덩이였다. 기계 고장 등으로 툭하면 결항과 연발착이 발생해 공신력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정부가 항공공사를 설립한 것은 1962년이었다. 해방 후 민간자본으로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항공사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국영으로 전환했으나 정부도 더는 끌고 갈 수 없을 정도로 경영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조중훈은 부실덩어리 항공공사를 인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정부의 요청을 세 번이나 정중하게 거절했다. 항공업에 뛰어들 것이라면 항공공사처럼 부실한 공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을 가지고 항공사를 설립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거절했으면 정부도 포기하리라 기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렀다.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국력이 뻗치는 것이라고 여겼던 대통령은 “국적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보는 게 소망”이라며 항공공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조중훈은 대통령의 바람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회사의 임원들은 적자투성이 항공공사를 인수해서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가 거셌지만 그의 간곡한 설득 끝에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조중훈은 대한항공의 내부 틀을 잡아나가는 동시에 과감한 투자에 착수했다. 기종을 늘리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펠러기가 아니라 성능 좋은 4발 제트기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항공기 도입을 결정한 다음에는 국제선 항로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외국 항공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국제선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했다. 그는 서울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두고 미주노선과 유럽노선의 거점을 잡았다.

1971년 1월 미국과의 항공협정을 개정해 미주노선 취항을 인가받은 조중훈은 4월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정기 화물기를 띄우기로 했다. 항공공사를 인수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미 간 무역 규모가 크지 않은 시절이어서 취항일정을 정하고 나서도 실어 나를 화물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가발이었는데 이는 부피에 비해 무게가 가벼워 화물기로 실어 나르기에 적격이었다. 조중훈은 실무자들에게 가발업체를 찾아 물량을 확보하라고 지시했지만 가발업체들은 대부분 중소업체들이었고 어렵사리 찾았다 하더라도 갓 화물노선을 개설한 대한항공을 불신하는 바람에 힘겨운 설득 끝에 대한항공 KE801편 화물기가 처음으로 태평양 횡단에 성공하게 되었다.

대한항공은 항공화물 운송 사업을 진행하면서 특수화물 분야에서 몇 가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2년 일본 도쿄에서 쿠웨이트로 77톤에 달하는 송유관 33개를 한 번에 수송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항공과 플라잉타이거 등 대형 항공사들도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작업이었다. 1983년에는 미국 댈러스에서 서울까지 살아있는 동물 418마리를 수송하기도 했다. 서울대공원에 수용될 동물이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며 대서특필했다. 가발로 시작된 화물은 오늘날 반도체와 휴대전화로 바뀌었고, 대한항공은 화물운송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도약했다.
 

화물운송 세계 최고의 항공사에서 여객기 운항까지
미주노선에 화물기를 성공적으로 취항시킨 조중훈은 경험을 축적하며 여객기 운항을 준비했다. 1972년 4월 19일 오후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은 태평양 횡단의 첫 임무를 띤 대한항공 KE002편 B707 여객기가 활주로에 바퀴를 내리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교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대한항공이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세계 항공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자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쾌거였다. 화물노선과 달리 여객노선은 취항 초기부터 탑승률이 예상보다 높았다.

대한항공이 잇달아 국제선을 개설하면서 세계적인 항공사로 발돋움할 무렵, 세계 항공업계는 대형기를 이용한 대량수송체제로 전환되고 있었다. 바로 ‘하늘의 궁전’으로 불리는 B747 점보기의 등장이다. 총 450만개의 정밀부품으로 이루어진 B747은 기체 높이가 19.3미터로 6층 건물과 맞먹었고, 길이는 70미터, 전폭은 60미터에 달하는 당대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전대미문의 거구였다. 이는 최대 50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고 25톤의 화물을 따로 탑재할 수 있었으며 속도는 시속 625마일로 성능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자금 부담이 만만치 않고 점보기를 운용할 기술과 여객 수요 확보도 문제라는 지적으로 또 다시 반대에 부닥쳤으나 점보기 도입은 대한항공의 사활을 좌우할 중요한 선택이었기에 결국 1972년 9월 5일 점보기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대한항공의 점보기가 태평양을 날아다니게 되자 조중훈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1971년 가을, 조중훈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로부터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해달라는 긴급한 요청을 받았다. 에어버스는 유럽의 신생 항공기 제작사로 항공기를 갓 생산한 상태였고 성능과 안전 테스트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해 세계 어느 노선에도 투입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가 프랑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심각한 외교문제가 걸려 있었고, 결국 프랑스 정부가 관계를 개선하려면 에어버스 항공기를 구매해달라고 한 것이다. 조중훈은 에어버스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파리 취항을 이끌어냈다. 유럽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리면서 대한항공은 세계일주 노선망 구축에 한 발 더 다가섰다.
 

한진해운 닻을 올리다
베트남 퀴논항에서 미국 화물선의 하역을 지켜보며 컨테이너에 매료된 조중훈은 귀국하자마자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컨테이너선으로 우리나라 해운의 현대화를 이룩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967년 7월 조중훈은 대진해운을 설립했다. 당장 컨테이너선을 도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컨테이너 하역과 일관수송에 필요한 항만시설을 구축하고 장비를 확보해야 했다. 당시 국내에는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없었기에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뛰어들었다. 컨테이너 시스템이야말로 수송을 현대화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72년 국내 해운사상 최초의 컨테이너선인 ‘인왕호’를 확보하였고 예상대로 컨테이너선은 대진해운의 성장을 이끌었다.

1974년 5월, 그토록 기다리던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준공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조중훈은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에 착수했다. 컨테이너선 운항에는 막대한 시설과 장비, 영업망, 그리고 전문적인 경영기법이 필요했다. 조중훈은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1970년 총대리점 계약을 맺은 미국 씨랜드가 갖고 있던 세계 주요 항구의 시설과 장비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1977년 한진해운이 닻을 올리게 되었다.

이듬해 일본에서 컨테이너선을 인수한 조중훈은 자신의 호를 따 ‘정석호’로 명명했다. 서울, 인천, 부산, 포항, 제주, 광양, 군산 등 국내 주요 도시 이름을 단 선박들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한국의 도시를 알렸다. 1985년부터는 뉴욕, 롱비치, 요코하마, 지룽, 사바나 등 해외 기항지 이름을 사용했다.

조중훈은 1차 오일쇼크 이후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인 중동 산유국들이 대대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함에 따라 4년 사이 3배 이상 물동량이 늘어난 중동항로를 주목했다. 중동항로에 물동량이 늘어나자 중국, 일본 등 주로 아시아권 해운사들이 취항하던 이 항로에 미국, 영국 등의 대형 해운사들이 가세하면서 경쟁이 가열되고 운임 덤핑까지 나타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8년에는 오일쇼크로 물동량마저 감소세로 돌아섰다. 결국 중동항로를 포기하고 한일항로에 진출하였으며 이후 극동-북미 항로 길도 열게 되었다. 극동-북미 항로는 당시 전 세계 컨테이너선의 30%가 이 항로를 오갔고 한국 수출입 화물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1986년에는 북미동아항로에도 취항했다. ‘뉴욕호’를 비롯해 당시 최신형 컨테이너선 6척을 북미동안항로에 집중 투입했다. 기항지는 홍콩, 지룽, 부산, 고베, 요코하마, 롱비치, 뉴욕, 사바나 등이었다. 이로써 조중훈은 태평양의 바닷길을 활짝 열었다. 15년 전 화물기로 태평양의 하늘 길을 열었을 때의 감회를 다시 한 번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 옛날 식민지 청년으로 일본 배를 타고 상하이에 갔을 때 ‘반드시 우리 배를 타고 오겠다’던 다짐은 중국해가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 뉴욕에서 실현되었다.

1978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세계 해운업계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해상 물동량이 북미항로에서만 40퍼센트 가까이 감소하는 등 불황은 1980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경쟁이 격심해지고 운임이 크게 하락해 대부분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해 항로에서 철수하거나 도산했다. 게다가 국제카르텔격인 ‘해운동맹’이 해체되면서 해운시장이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4년 미국에서 신해운법이 발효되자 선사 간 동맹이 약화되고 동맹 안에서도 운임경쟁이 가능해져 저운임이 중요한 경쟁수단이 되었다. 저운임을 유지하면서 수지를 맞추려면 원가를 낮추어야 했다.
 

항공사식 경영을 한진해운에 접목
조중훈은 한진해운의 조기 경영정상화를 위해 대한항공의 지원을 결정했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항공사식 경영’을 한진해운에 접목한 것이다. 항공화물은 운항원가가 높아 경비절감으로 원가를 낮추는 노하우를 쌓아왔다. 조중훈은 그 노하우를 한진해운에 도입하기로 했다. 운항 정시성을 유지하기 위해 종합통제담당을 신설하고, 한진해운 미주지역의 관리기능을 대한항공과 통합해 영업과 운영 기능을 제외한 관리기능을 통합 운영했다. 이는 판매증대에 도움이 되었고 영업소 인건비와 운영비를 35% 이상 줄일 수 있었다. 매출도 1년 사이 1.5배 가까이 늘었다. 기존 배선방식도 선박과 기항지를 줄여 원가중심 스케줄로 바꾸었다. 그 결과 빠르게 화물을 인도할 수 있어 서비스가 향상되고 연료비가 절감되어 월평균 38억 원 적자에서 1년 사이 10억 원대 흑자로 전환되었다. 또한 항공수송의 생명인 정시성을 해운에도 적용했다. 대한항공이 100대가 넘는 항공기 운항을 24시간 감시해 정시운항 하도록 통제하는 시스템을 한진해운에 도입한 것이다. 정시운항은 화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1989년부터 7년 동안 정시율이 80%를 웃돌아 영국화주협의회로부터 정시성 부문 세계 최고 해운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진해운의 경영이 정상화되기 시작한 1987년, 정부로부터 대한선주를 인수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대한선주는 국내 최초의 국영기업이던 해운공사가 민영화해 출발한 매머드급 해운사였으나 1980년대 중반 해운 불황이 계속되면서 과당경쟁과 운임 하락의 악순환에 빠져 누적적자가 7,500억 원에 달했다. 대한선주를 인수하는 것은 기름통을 끌어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조중훈은 정부와 업계의 고충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대한선주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특별금융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마라톤 회의 끝에 ‘부실기업 정리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원칙에 따라 총부채 7,000억 원 중 4,000억 원을 떠안기로 했다. 기업 이익보다 국익이 우선한다는 원칙으로 눈앞의 부채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투자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파격적인 수용이었다. 결국 1988년 대한선주(당시 대한상선)는 한진해운에 인수합병되어 한국 최대 해운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업은 절대 손대지 않겠다’며 조중훈은 수송외길을 고집했다.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수송외길을 걸으려 해도 당시 국내 기간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사옥도 짓고 길도 닦아야 했고 배가 들어오게 하려면 부두도 만들어야 했다. 건설과 토목은 수송외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조중훈은 20~30년을 내다보고 미래를 위해 필요한 시설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사업을 통해 국익과 공익에 기여한다는 조중훈의 의지는 사회간접자본 구축으로도 실현되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가 물류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관련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함을 절감하고 인천항 건설, 공항청사 확충, 영종도 신공항 건설, 전천후 항공유 수급시스템 구축, LPG 충전소를 설치하였고 한일개발 계열사를 설립하여 움라지 도로공사를 수주하면서 오일쇼크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신뢰를 지켜낸 진정한 기업인이자 개척과 혁신을 넘나드는 경영자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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