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화 60년이다. 인생 60년이면 차분하게 지난 날들을 음미해 볼 시기이지만 한국컨테이너 정기해운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금년초 4개에서 내년 봄이 되면 3개로 축소되는 운항동맹(얼라이언스)은 재편의 서막일 뿐 소수대형화를 향한 M&A, 통합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며 그 종점은 언제일지 모르는 시장의 회복시기가 될 것이다. 몇 개 선사의 문패가 유지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약육강식과 체력전을 견뎌내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금년 상반기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들 가운데 흑자를 낸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 과거 해운불황시기에도 대다수의 선사들이 수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정책적으로 Flag company를 존속시키고 있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수출입 물량의 수송을 외국선사에 의존하더라도 굳이 Flag company를 유지할 실익이 없다는 정책적 판단에 의거 M&A 혹은 매각을 통해 사전 준비한 시간표에 따라 조용히 시장에서 철수시킨 국가도 있다.
 

끊어진 항적
조선, 해운, 철강 등 5개 업종에 국책은행의 부실 여신규모가 120조, 그중 조선과 해운만 50조라는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8월 30일 한진해운의 자구안이 채권단 회의에서 부인되고 31일 오전 한진해운 이사회는 법정관리 신청을 의결하면서 무역의 대동맥이자 한국 주력 컨테이너선사가 예고도, 준비도 없이 하루 아침에 공중 분해되는가 하면 50만개에 달하는 1만 8,000여 화주의 컨테이너가 공해상에서 하이재킹을 당했다고 표현될 정도로 글로벌 물류시장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한진해운의 컨테이너선 97척, 벌크선 44척 등 총 141척의 거대 선단이 공해상에서 표류하는가 하면 운하를 통과하지 못해 희망봉을 둘러가야 했고 연료가 떨어져 오도가도 못하는 등 세계 정기해운 170년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영국 BBC 방송까지 한진해운사태가 보도되는 가운데 해외 주재원들이 신변의 위협을 당하는가 하면 죄 없는 선원들은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이역만리 해상에서 호소를 하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고 그들이 달라는 기회는 무엇인가? 이것이 해운대국이라고 하는 한국해운정책의 참 모습인가...

한진해운의 주식 비중이 한국 상장주식 전체의 0.03%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장의 충격은 미미하며 이미 예상해왔던 것이라던 8.31 주역들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8개 부처로 구성된 사태수습을 위한 범정부 T/F가 서둘러 구성됐으며, 국내 주요항만의 중소협력업체 약 457개사를 위한 지원기금 2조 5,000억 이상을 조성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번 사태는 화주, 선주, 해외선사, 항만 등 물류 인프라는 물론 무역, 금융, 보험업계를 포함한 글로벌 공급 체인에 엄청난 혼란과 함께 전 세계 고객들과 협력사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한마디로 신중하지 못했고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한국해운의 신뢰도에 심각한 타격을 초래한 엄청난 ‘실수’이자 ‘오판’의 소산이었다.

밖에서는 8. 31조치 직후부터 한국 컨테이너 정기해운의 장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국내에서 나타난 단기적 혼란의 수습에만 급급했을 뿐 아니라 한진해운의 우량자산(?)을 현대상선에 인수시키면 불원 한국정기해운의 정상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M/S(시장점유율) 5%(3%/한진해운+2%/현대상선)가 유지될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2%도 지켜내기 힘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장기 체불상태에 있던 운항관련 직접비들이 속결되었고 평소 외상거래가 가능했던 용역들이 현금베이스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전적으로 부담이 증가한 부분은 혼란으로 인한 재조작비rehandling와 대략 2주정도로 추정되는 지연손해가 단기적 피해라고 할 수 있다. 8.31 조치로 인한 금전적 손실의 규모는 혼란의 정도와 비교할 때 그렇게 엄청난 규모는 아닐지 모르나 우려되는 것은 8.31의 주역들이 굳이 외면하고 있는 계수화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이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고 한국의 주력이자 제 7위 글로벌 컨테이너선사의 항적은 사실상 궤도에서 사라져가고 있으며 머지않아 세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진 기회
정책금융을 담당하는 은행을 우리는 Policy bank(정책금융)라고 한다. 상업적 베이스에서 운영되고 있는 민간은행과 달리 정책의 지원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국책은행의 주 기능이라고 전제할 때 글로벌 제 7위의 국적 정기해운선사의 위상이 대주주의 의식이나 행동이 미흡하면 곧 도퇴시켜도 될 정도로 정책적,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인지.
아쉬운 점은 글로벌 해운시장의 지각 변동과 재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정기해운 시장을 정상화하고 한국해운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다시 오기 힘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과거 지나친 라이벌 의식 때문에 함께 자리를 하는 것 자체도 꺼려했던 양대 선사의 최근 상황이 글로벌 20대 선사 중 재정 건전도 측면에서 공히 최하위에 머물러 있는 현실 하에서 국책은행의 주도아래 구조조정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정책에 근거한 정상화라면 수용할 밖에 없는 처지였다. 7월초까지만 하더라도 현대상선의 사태를 수습했던 방식이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한진해운에도 그대로 적용될 경우 정책 주도하에 자연스럽게 National champion이 태동할 것으로 기대했고 전 세계도 그것이 정상화의 바른 길이라고 예상했었다.

한진해운은 현재 3% 수준의 글로벌 M/S를 보유한 중견선사이지만 태평양 노선에 주간 22척 배선에 대략 3만 3,000개의 컨테이너를 운송하는 7%의 M/S를 갖고 있는 태평양항로의 주력선사이자 아시아-유럽 노선에서 약 5%를 점하고 있는 제 7위 선사다. 여기에 17위의 현대상선을 합병할 경우 공급능력 100만teu의 세계 제 5위 대형선사로 부상,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할만한 선두주자(credible global player)가 될 수도 있었다.
 

다가오는 시련
적어도 향후 몇 년간은 침체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정기선 해운시장에서 “기업을 살리겠다는 대주주의 의지가 미흡할 경우 해당 기업을 도퇴시킨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원칙이라고 국내외에서 받아들일 경우 운항동맹 참여가 필수인 시장하에서 해외의 잠재적 파트너 선사들이,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한국선사의 Counter-party risk를 어떻게 평가할지.
원칙에 입각한 이번 사태가 글로벌 공급체인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컨테이너 정기해운에 대해서도 예외없이 도산이나 법정관리를 허용함으로써 밑도 끝도 없는 구제금융 정책에 종지부를 찍자는 것이라면 글로벌 컨테이너 업계를 위해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모두가 살려고 하면 다 죽는다’는 교훈을 글로벌 해운시장에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원칙이 한국만의 원칙으로 끝난다면 글로벌 업계는 적극 환영할지 모르나 한국의 정기해운업계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글로벌 선두주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남아있는 회사마저 건재하지 못하면 정기선 해운의 특성상 한국의 정기해운산업은 사실상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 정기해운의 장래를 좌우하는 결정권이 국내 해운계나 정책당국의 손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운항동맹 체제는 존립을 위한 필수조건이나 가입했다고 해서 생존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재정 건전도나 서비스 측면에서 세계 최강의 운항동맹이라 할 수 있는 머스크와 MSC의 2M은 이번 한진해운사태를 통해 입지를 크게 보강했으며 머스크의 주가가 25% 급등하는 등 최대 수혜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로 인해 2M은 휴항 중인 머스크와 MSC의 선박 12척을 발빠르게 태평양 노선에 투입하면서 현대상선을 통해 내년 4월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던 태평양 노선의 보강을 현대상선이 아닌 한진해운 사태를 통해 이미 실현 중에 있다. 2M 입장에서 굳이 현대상선의 힘을 빌려야 할 필요성이 그 만큼 감소되었고 지난 7월 중순 현대상선과 체결한 MOU가 법적 구속력이 약한 느슨한(loose-knit) 것이 사실이라면 운항동맹의 참여 여부는 2M의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설사 2M의 1차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3대 규제당국, 특히 중국 상무부의 심사라는 2차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이 2014년 6월, EC(유럽연합)와 FMC(미국연방해사위원회)가 이미 승인한 유럽 Top 3의 운항동맹 P-3를 무산시킨 배경은 시장에서의 M/S라기보다는 아직 취약한 자국의 컨테이너선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글로벌 컨테이너 시장에서 한사람이라도 경쟁자를 더 줄여야 시장회복이 그만큼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며 중국 Super-Cosco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최근의 국제정세 하에서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에 몽니를 부릴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있는 시기다. 만일 2M이 한국선사의 영입을 그렇게 마뜩하게 생각지 않고 중국 상무부와 교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정기해운의 항적은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8.31 조치의 주역들은 사인私人이 아니고 공인公人이기에 일국의 정책을 담당한 책임자들이기에 부실한 경영책임을 문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해운의 미래이고 글로벌 시장에서 지켜야 할 한국해운의 신뢰와 위상이다. 특정기업의 전략적 가치와 한 때 해당기업을 관리하고 있는 오너 혹은 대주주의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 관한 평가는 별개로 다루어야 하는 것 아닌지, 코레일의 경영진이 잘못한다고 해서 KTX 여객열차를, 지하철의 지휘부가 경영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메트로 지하철을 폐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정책의 필요성이고 정책부서가 존재하는 이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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