擧重機는 近代 荷役의 始祖

우리 역사 속의 물류 발자취와 물류 선인들의 행적을 ‘물류’라는 프리즘으로 살펴본 책 ‘역사속의 물류, 물류인’이 올초 발간됐다. 민생경제 차원에서 역사속 물류의 흔적을 훑어본 이 책의 내용중 장보고를 비롯한 박지원, 김정호, 정약용, 최봉준, 임상옥, 정주영, 조중훈 등을 물류선인으로 소개한 내용이 주목할만하다.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의 물류에 대한 의지와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속 물류선인’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이에 필자와의 협의를 통해 관련내용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최초 '컨' 부두. 자성대 컨테이너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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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생활의 시련 속에서도 실학을 집대성하고 19세기 초 조선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정치,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인이었으며 뜨거운 애민정신과 비판정신으로 늘 역사와 백성을 생각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물류활동의 효율화를 실천한 선각자로서 수원성 축조 시 대량의 중화물을 용이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근대 하역기기의 원조가 되는 거중기擧重機를 발명하여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감하게 한 물류활동의 선각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실현되지 못한 개혁사상 - 조선 후기의 고민
다산 정약용은 유형원·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이용후생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이익, 이중환, 안정복 등 실용학파의 저서를 탐독했다. 한편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고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가 되었다. 이 무렵 이벽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에 연루되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 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田論』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최필공·홍교만·홍낙민, 그리고 형인 약전·약종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를 연계하여 현실성 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다산 정약용의 초상
다산 정약용의 초상
만능 과학자 - 물류기기 발명
1789년 27세에 벼슬을 시작한 다산은 1795년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그에 대한 신임이 각별했던 정조는 다산과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하나가 수원 화성 축조였다. 다산은 1792년 화성을 설계했다.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해 성의 높이나 거리 등을 측량함으로써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도록 했다. 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꾼들이 힘겹게 돌을 지고 나르는 것을 목격한 다산은 2년 뒤 거중기를 만들었다. 많은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고 싶지 않았던 다산과 정조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거중기는 오늘날 기중기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려 운반하는 장치로써 물류에서 큰 역할을 하는 하역기기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과학자였다. 천문 기상 의학 수학 기하학 농학 지리 물리 화학 등 그의 관심사엔 한계가 없었다. 1789년 27세 때 설계한 한강 배다리는 배 60여 척을 강물에 띄우고 2,000장이 넘는 널빤지를 깔아 만들었다. 배로 건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화성시 현륭원에 갈 때 이용했다.
 

애민사상이 경세학 출발점
  다산 경세학은 당시 사대부 관리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치세의 학문이었던 주자학은 사대부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데만 치중했지, 그 나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백성의 삶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백성의 삶은 토지를 경작해서 얻어지는 농산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공급량은 거의 일정한데 자연재해, 양대 국난, 자연적인 인구 증가 등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국가존립을 위한 조세가 토지와 농산물 생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백성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산이 그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경기 암행어사로 민간에 잠행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직접 보고서, 강진 귀양살이 때 국가권력과 아전의 횡포를 직접 듣고서 토해낸 글들이다.
 
다산은 당시의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다. 민을 사랑한 그의 삶에는 항상 못 살고 고통 받는 민생의 그늘을 제거해 그들의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유배 3년째인 1803년 가을 강진에서 지은 시 ‘애절양哀絶陽’은“갈밭의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그지없어 관청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통곡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온 거야 있을 법도 하다지만 예부터 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어라. 시아버지 장례 치르고 갓난아긴 젖 먹이는데 三代의 이름이 軍籍에 올랐다네. 달려가서 호소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텨 섰고 里正이 호통 치며 남은 소마저 끌고 갔다네. 아이 낳은 죄라고 남편이 한탄하더니 칼 갈아 들어간 뒤에 방에는 피가 흥건하여라.” 이 시는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한 백성의 애절하고 슬픈 사연을 적은 것으로 이 노래를 통해 다음과 같이 폐부를 찌르는 민초 백성들의 아픔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다산이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에만 골몰하며 밥그릇 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영·정조 76년간에 걸쳐 기틀을 잡아가던 개혁의 노력은 1801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500년 역사의 마지막 개혁의 몸부림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목민관의 개혁실천
다산은 목민관으로서 유배객으로서 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도目睹하고 바로 잡고자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금정도찰방으로, 이어 황해도 곡산부사 등 일선 관리로 재직하면서 그는 어진 목민관이 되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하였다.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연천 현감 김양직과 삭령 군수 강명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두 사람은 뇌물을 받고 노비를 풀어주고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또 세금을 빼돌려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고 국가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 지방 수령이 할 수 있는 온갖 악정은 빼놓지 않고 다하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마음 놓고 백성들에게 탐학 질을 하는 데는 정조 임금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김양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길 때 묏자리를 봐준 지관地官이었고 강명길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주치의를 역임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폭정을 알면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훌륭한 목민관이 되겠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던 다산은 때마침 곡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명 '마마'라 불리는 천연두가 창궐하자 이에 대한 치료법을 적은『마과회통 麻科會通』12권을 지었다. 그 자신 일찍이 천연두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하여 스스로를 '삼미자 三眉子'라 불렀고 슬하에 9남매 중 요절한 대부분이 어려서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다산은 당시엔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의 치료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을 때 치료해 준 이헌길李獻吉에게서 책을 빌려 그 근본원인을 탐구하고 중국의 관련서적 수 십권을 뒤져 초고를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차례나 고쳐 12권의 <마과회통>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 인명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의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의원이 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인데 몇 십 년 만에 한 번씩 발생하는 천연두 치료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아도 기대할 이익이 없는 데다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밤이나 비가 올 때면 등잔불이나 삿갓을 급히 찾다가도 아침이 되거나 비가 그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듯이 천연두에 대한 세간의 얄팍한 연구를 비판한 다산은 楚亭 朴齊家와 함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평등하고 다양한 직업관
또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다양한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이용후생학파).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 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 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 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화물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유통경제의 발전을 염두에 두어 물류기반을 선행조건으로 제시한 물류학자로서의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중상주의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다중 공유시설인 물류기반시설의 설치, 관리를 국가가 직접 개입할 것을 주장하여 민생의 발전에 무관심하던 국가의 의무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천적 철학관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성의 축조 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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