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조선 상생방안
5월 6일 콤파스는 정부의 임시 공휴일 선포로 열리지 못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여행이나 소비하면서 놀라고 권장하니 말이다. 그만큼 경기가 안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양대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 이들 선사에게 배를 빌려준 외국선주들과의 용선료 인하 협상이 결렬되면 법정관리의 수순을 밟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국 선주들이 과연 산은과 금융위의 최후통첩을 수용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간판선사들의 운명이 외국선주들의 처분에 달리게 되었으니 안타깝다. 요즘 해운종사자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해운업이 극도로 어렵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지상에 넘치기 때문이다. 얼마전 해양대학 4학년 선배가 후배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별 볼일 없을 때 해양대학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서글펐다고 한다.

어느 교수의 말이다. “해운업체와 조선업체에 더 이상 돈을 빌려주어선 안 되겠다”는 금융기관의 소리도 들린다. 섬나라와 다름없는 우리나라가 무역 없이도 경제가 지탱할 수 있을까? 무역을 하려면 해운이 필요하고, 해운에 설비를 제공하는 것이 조선인데......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선, 해사산업에 대한 부정적이 인식부터 바뀌었으면 한다. 요즘 일본의 해운과 조선업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경제구조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일본이 장기불황에도 건재할 수 있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지, 벤치마킹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일본도 1960년대에 우리보다 더욱 혹독한 해운합리화를 했다. 당시 해운업체와 조선업체들의 부채비율이 무려 1,000%가 넘는 등 집단도산의 위기를 맞았으나 단기처방이 아닌 장기대책으로 산업을 구조적으로 개편하여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 조선소들은 일감이 부족한데도 국내선주들이 경쟁력 있는 선대를 갖출 수 있도록 30%의 도크를 남겨두었다고 한다.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재 기재부와 금융기관들이 정책을 세우느라 한창이다.

그러나 그들로선 채권확보 수준의 대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도 당사자인 해수부는 빠져 있는 상태에서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차제에 근본적인 대책이 수립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한진, 현대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1984년의 해운산업합리화도 실상은 해운업을 살리기보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다. 물론 은행의 속성상 채권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갠 날 우산을 빌려주고 비올 때 뺏어가는 것은 정설에 속한다. 이런 폐단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앞으로는 시중은행보다 국책은행 위주로 선박금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책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들이다. 계속 들어보자. 이참에 친환경적이며 국제경쟁력을 갖춘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을 20척 발주하여 독자적인 얼라이언스를 운영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해운발전의 계기가 되고 수주절벽을 맞이한 우리 조선업체에도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해운과 조선이 따로 놀고, 화주와도 거리가 있는 비효율적인 관계를 견지해 왔다. 이번에 해운, 조선, 화주가 전정한 상생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 한중간에 다니고 있는 카페리들이 노후하여 20척을 신조대체하고 있는데, 해운조선 불황타개책에 일조하기 위해서도 우리나라 조선과 금융을 이용하면 좋겠다. 내항업계도 마찬가지다. 내항선주들도 지금 선대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연안해운 발전을 위한 조선해운 합리화가 필요하다. 한중 카페리선사들이 20척을 모두 중국조선소에 발주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조선소와 중국 조선소의 가격차가 30%나 되기 때문이다. 국내발주가 성사되려면 카페리선사나 조선소에 대한 지원대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작금의 우리 해사산업 상황이 심각하다. 상생하지 않으면 공멸한다. 현재 금융위와 기재부가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정작 주무부서인 해수부는 소외되어 있다. 우리도 일본처럼 해운조선심의회를 만들어야 한다. 임기응변의 단기처방보다는 산업정책적인 장기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현재의 장기불황 요인은 선박대형화다. 발레막스선과 초대형 컨테이너선에 무슨 효율이 있겠는가? 이로 인해 선박구조의 불균형과 항만의 비효율이 심각하다. 조선소들도 대형선을 건조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설투자와 출혈경쟁을 강요받고 있다. 경제논리에도 안 맞는 경쟁사를 따돌리기 위한 과독점 행위일 뿐이다. “이 때도 지나가리!”라는 말이 실감난다며,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여 잘 극복하면 반드시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는 토론회 진행자의 말로 위안을 삼는다. 

 
고대 한중 해상교통로와 한중 교류
제21회 바다의 날 기념 선상세미나 및 중국문화탐방 행사가 5월 9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산동반도 일대에서 펼쳐졌다. 탐방단으로 참여한 96명의 해운가족들은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한중 직항로의 최단거리는 180킬로미터로 서울에서 영동 정도의 거리지만, NNL로 인해 약간 사선항해하여 위해항에 도착했다. 백령도와 산동반도 간은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지만, 결코 만만한 바다는 아니었다. 조류와 계절풍으로 거친 풍랑과 조난을 각오해야 했고,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던 고대에는 목숨을 걸고 건너 다녀야 했다. 심청이 용왕의 제물이 되어 몸을 던진 인당수 같은 거센 물길도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바다를 우리는 카페리를 타고 편하게 건너가자니 조상들에게 미안했다. 짐을 풀고 위동항운 뉴골든브리지호의 브리지로 올라가 오토파일럿, 레이더, 스테이빌라이저 같은 항해기기들을 견학했다. 여성 항해사의 설명이 똑 부러진다.

이어 ‘고대 한중 해상교통로와 한중 교류’와 ‘여객선과 안전’을 주제로 한 선상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배는 계속 항해하여, 이튿날 아침, 위해 여객부두에 닻을 내렸다. 한중항로를 횡단하여 12시간 만에 중국 땅에 닿은 것이다.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위해시내와 연태를 거쳐 봉래로 향했다. 고대 한반도와 중국대륙 간의 해상교통로는 서해북부 연안항로와 중부 횡단항로, 남부의 사단항로로 구분된다. 근친원공近親遠攻의 외교전을 벌인 고구려는 물론,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백제와는 해상교통로가 일찍부터 개설되었고, 후발주자인 신라도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간의 3국간 교역을 중계할 정도로 해상물류를 주도했다. 해상력이 국가 태동의 원천이 된 고려도 건국 초기부터 송도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번성했고, 만주의 거란과 여진으로 인해 육상교통로가 막히자, 항로 다변화를 시도하여 동남아와 대식의 선단들이 드나들기도 하였다. 후기 조선시대에는 명, 청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해상교류가 줄어들었거니와 공도空島정책에 의해 더욱 약화되었으며, 그후 국력이 쇠퇴되며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하였다. 이날의 세미나 내용을 훑어보았다.
 

1. 봉래와 한중항로
이번 문화탐방의 하이라이트는 봉래방문이었다. 봉래의 옛 이름은 등주로, 이곳은 봉래각과 등주수성이 유명하다. 중국의 3대 정자중 하나인 봉래각과 고대 중국의 수군기지였던 등주수성을 둘러보았다. 장보고사적탐사단이 다녀온 후 추천한 곳이다. 봉래각에 오르니 발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봉래각을 둘러싼 수성이 내려다보인다. 등주수성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할 때 병선兵船들을 발진하던 수군거점으로 성문이 바다로 향해 있다. 서해북부 연안항로는 여기가 시발점이요 종점이다. 황해도와 평안도 연해로부터 요동반도 연해를 거쳐 노철산수도와 발해해협을 가로질러 산동반도에 이르는데, 중국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수군을 산동반도에서 출동시켜 이 항로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항로는 산동반도 서북쪽으로 발해만 연안을 따라 요동반도에 이르는 노선에 비해 묘도군도를 따라 발해해협을 건너는 것이 지리적으로 훨씬 가깝고, 또한 발해해협에 징검다리와 같은 섬들이 박혀 있어 당시의 선박으로도 큰 위험 없이 도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바다 건너 삼신산에 불로장생의 선약이 있다는 서복의 말을 믿고 동남동녀 3천명을 배에 태워 딸려 보냈는데, 당시의 서복 선단은 등주(登州 봉래)-발해해협-요동남안-압록강 하구-대동강 하구-서남해안-동남해안 및 제주도-일본으로 간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중국과 한반도의 연안항로를 이용한 셈이다.

우리가 이용한 항로는 인천에서 위해까지의 서해중부 횡단항로이다. 서해중부 횡단항로는 황해도에서 서해를 가로질러 산동반도에 도달하는 항로를 말하며, 양 지역의 최단거리는 대청도와 성산각 사이의 98해리이다. 이 항로는 시인거리를 넘어서는 항해환경 때문에 선박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선사시대에는 결코 쉽게 통행할 수 없는 노선이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침공할 때 소정방蘇定方의 선단이 산동반도 성산을 출발하여 인천 앞바다 득물도(덕적도)에 도달했다. 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한 또한 사례는 엔닌의 귀국항로로, 그의 행적 일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잘 나타나 있다. 엔닌은 무역선을 타고 산동반도 적산포에서 출발하여 서해를 횡단하여 충남 격렬비열도 부근에서 남진, 남해안을 돌아 일본 규슈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연의 고장 유방과 기수의 반딧불이 동굴
봉래를 거쳐 산동성의 중심에 있는 연의 고장 유방에 도착하여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연 박물관이 있는 양가부楊家埠 민속촌에 들렀다. 손으로 만든 각양각색의 연들을 보며, 연의 원조가 우리나라인줄 알았는데, 중국이 재빠르게 차지해버렸다. 방패연과 가오리연을 만들어 동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함께 날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연의 연고지가 중국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이어 기수로 이동하여 기나라의 천혜요새 천상왕성에 올라갔다.

기나라는 제나라와 노나라 틈에서 나라를 겨우겨우 유지하다가 결국은 제나라에게 쫓겨 높은 산꼭대기로 옮겨 항쟁하였다고 한다. 그때 기왕이 백성들과 함께 쌓은 산성이 바로 천상왕성이다. 케이블카로 정상에 오르니 너른 평지가 나오는데, 정말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기나라는 점차 쇠퇴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산속 깊이 도피하여 적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어도 그곳에서는 나라가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순장한 기왕의 무덤을 보며 인생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기왕은 한족이 아닌 동이족인데, 그의 성씨가 제비강姜씨였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족들이 강태공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마치 뿌리를 찾은 기분이다. 기마족 후예답게 연병장이던 정상의 공터에서 마상쇼가 벌어졌다. 마상에서 무예를 뽐내는 모습이 평원에서 말을 달리던 몽골 병사들이 연상된다. 이어 중국의 특대형 용동인 반딧불이 동굴이 있는 용강산 기슭에 위치한 지하대협곡에 갔다. 지하대협곡의 침침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기기묘묘한 석순들이 우리를 압도한다. 배를 타고 깜깜한 동굴 속으로 깊이 들어가니 천정에 반딧불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도회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반딧불이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어떻게 이 동굴까지 날아와 천정에 붙어 있을까? 곤히 자고 있을 반딧불이의 단잠을 방해하여 미안하구나! 이런 것도 놓치지 않고 관광상품화 하는 중국인들이 놀랍다. 
 

3. 천마도와 마기산 등정
이번 중국 문화탐방에서 천마도와 마기산을 등반한 것은 특별한 체험이었다. 지하대협곡을 나와 산과 물이 뛰어난 결합을 이룬 천마도 풍경구로 향했다. 해발 662미터의 마기산이 맑은 자연호수 천호天湖에 비친 그림 같은 모습에 이끌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마기산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산으로 올라가니, 그곳에 송나라때 쌓은 산성이 우리를 기다렸다. 한창 금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여자 장수 양楊장군을 기리는 마상쇼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마상쇼가 서둘러 중단되고 모두 급히 대피하기 시작했다. 전복이 우려되어 케이블카 운행이 통제되었고, 백여명의 탐방단원들은 퇴각하는 군인들처럼 가파른 산길을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조난이나 부상을 당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1시간반 남짓, 한 사람 한 사람 산자락으로 내려올 때마다 무사귀환을 축하하는 박수소리가 터졌다. 모두가 큰 부상 없이 하산한 것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 같다. 산 밑으로 내려 왔음에도 계속되는 돌풍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버스가 마기산 입구까지 오지 못해 전동차를 타고 내려오며, 평생 경험 수 없는 스릴이었다는 어느 탐방단원의 말에 안도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떠올랐다. 
 

4. 청도신항 황도
천마도를 나와 청도로 향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청도에서 보내게 되어 있다. 고속도로를 달려 마라톤코스인 42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교주만대교를 건너 청도 신항인 황도항를 지나갔다. 바다 가운데 끝없이 펼쳐진 교주만대교를 건너가려니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해안이지 구분할 수가 없다. 참 길긴 길다. 이윽고 황도컨테이너 터미널에 이르니 갠트리 크레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나마 항만견학을 할 수 있어 있어 다행이다. 트레일러들이 고려해운, 장금상선, 천경해운이라는 상호가 찍힌 컨테이너를 싣고 수없이 지나간다. 청도에서는 독일총독부였던 영빈관과 신호산 관람에 이어 맥주박물관을 들러 청도맥주의 역사를 보고나서 청도항에서 위동페리의 뉴골든브리지호에 올랐다. 고층건물들이 여기저기 솟아나는 청도가 멀어진다.
 

5. 서안평, 비사성, 당은포
중국탐방을 하며, 개인적으로 고대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물류거점과 전략요충이었던 서안평에 대한 관심이 컸다. 서안평은 오골강(압록강) 입구로, 의주 맞은 편이라고 하니 단동 근처라는 생각이 든다. 3년전 고구려유적 및 백두산 탐방때 들른 단동과 단동 동북 15킬로미터에 있는 호산산성에 갔었는데, 분명 고구려의 박장성에 틀림없음에도 중국 산성으로 변조되어 아쉬움을 달랬다. 호산산성은 박작성이고, 단동 인근은 서안평이 틀림없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서안평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낙랑이 치열하게 싸웠는데, 서안평을 차지한 후 고구려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련과 여순 사이의 요동반도 끝자락에 있는 비사성을 선박금융교육 수강생들과 대련해사대학과 안중근 의사 순국지인 여순감옥에 방문했다가 들렀다. 이곳은 발해와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난공부락의 산성이었으며, 1,000명으로 1만명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전략요충이었다. 또한 병선의 동태와 진격로를 파악할 수 있는 망대와 같은 성이었다. 고대 한중항로의 주요항인 당은포는 현재의 화성군 송산명 고포리 마산포로, 대부도 앞의 전곡항과 탄도항 부근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은 비교적 수심이 깊고 간만의 차도 크지 않아 배들이 접안하기 편리하고, 무엇보다 주변에 섬들이 많아 외해의 파도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양항이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가 당은포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당은포와 경기만 일대를 장악한 나라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상세미나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 보았다. 탐방 여행은 역사와의 대화요 낯섦과의 만남이며, 미지의 세계를 훔쳐보는 요술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익하고 보람 있는 선상세미나였다. 
 

3년후 ‘한국은 없다’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한민국 민낯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공병호 저 3년후 ‘한국은 없다’. “추락하는 한국, 보이지 않는 미래-어떻게 파국을 피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해 지금 우리가 직시할 것들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또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그가 제시한 해결책들은 다음과 같다. “직시하되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더 정직해야 한다. 과거의 성공 공식은 반복되지 않는다. 어렵고 불편한 길을 선택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뭐든지 되는 쪽으로 제도를 혁파해야 한다. 성역화된 규제를 풀 비상한 개혁조치가 필요하다. 공공부문에 대해서도 과감한 정비가 필요하다. 노동시장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유연화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입 증가율의 둔화에 맞춘 지출구조 조정, 조세 및 준조세 부담 증가는 신중해야, 정치의 제역할,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 이상을 해야 하고, 환경변화에 따른 의식의 전환이 필요함도 주문하였다. 우리가 나아갈 길, 즉 정답은 나와 있기에, 실천 의지가 관건이다. 시간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역사는 나라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3년 후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을지 없어질지는 오직 우리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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