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주제 낭만적 분위기 국민애창가곡

강릉출신 함호영 作詩, 홍난파가 첼로협주곡 주제 빌려 작곡
2001년 경포호 아래 호숫가에 노래비…바로 옆엔 詩碑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어기야 디여라차 노를 저어라

순풍에 돛 달고서 어서 떠나자
서산에 해 지면은 달 떠 온단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가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노래비
노래비

‘사공의 노래’는 강릉 경포대를 주제로 한 낭만적 분위기의 국민애창가곡이다. 요즘 같은 때 부르면 계절의 맛이 난다. 노랫말은 봄 바다지만 가을바다로 바꿔 불러도 정취에 맞는 감성적 곡이기도 하다. 달맞이를 하며 시 한수 읊는 걸 최고의 풍류로 아는 우리 민족 정서와 잘 어울린다. 
테너 엄정행, 테너 박인수, 바리톤 오현명, 베이스 김요한 등 유명 성악가들이 부른 이 노래는 작곡연대와 곡을 만든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법으로 볼 땐 1930년대 중반 작품이다.
 

작곡공부 학생들에게 표본적 역할
언제 부르고 들어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사공의 노래’ 악상은 국민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조금 느리게Andantino, 4분의 3박자, 사장조, 못갖춘마디 여린내기로 나가는 두 도막 형식의 유절가곡有節歌曲이다. 반주는 같은 음형의 화성이 잇달아 이어진다. 화성의 쓰임은 주요 3화음에서 머문다. 중간부분에서 악상변화를 주기위해 두 마디 단위로 4박자-3박자-4박자-3박자 순으로 바뀐다. 선율흐름은 온음계적으로 까다롭지 않지만 노 젓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곡 구성이 잘 돼있어 작곡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표본적 역할을 해준다.

이 노래는 강릉출신 시인 함호영 시에 작곡가 겸 지휘자 홍난파(1898년 4월 10일~1941년 8월 30일)가 1932년 드보르작 첼로협주곡 1악장의 주제를 빌려 만든 곡이다. 고향 강릉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잘 나타냈다는 평가다.
경포호 바로 아래 호숫가에 노래비가 있다. 경포대 아래로 난 길 건너 경포호에 나무다리부두를 만들어 호수 쪽 끝에 노가 걸쳐진 배를 띄웠다. 호수 쪽 끝 물 속의 둥근 돌에 ‘사공의 노래’ 가사가 하늘을 향해 새겨져있다. 감상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온다. 배에 서서 노래비를 보면 두둥실 떠가는 뱃사공이 된다. 경포호수 명소가 된 노래비는 1980년 제1회 TBC(동양방송) 신인가요제 금상을 받은 가수 윤천금 씨(65·‘천사 같은 아내’ 등 취입)가 앞장서 2001년 세워졌다. 윤 씨가 젊은 시절 방황하던 때 품어준 강릉을 위해 진재중 강릉KBS PD, 함 시인 유족들과 힘을 모아 세웠다.

배경지인 강릉 경포호수 전경
배경지인 강릉 경포호수 전경

길가 부두초입엔 노래비를 세운 경위를 안내하는 또 하나의 비가 있다. 2001년 함 시인 막내아들 함태헌 씨(사업가)가 제작비를 지원했다고 돼있다. 시비는 호수 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입구에 희고 둥근 돌기둥을 어린이 키 높이만큼 비스듬히 자른 모양이다. 노래 말이 새겨진 시비 건너 쪽의 검은색 석비 앞면엔 ‘사공의 노래’ 제목만 새겨져있다. 그 뒤엔 2001년 10월 1일자로 “작사가 함호영의 시선은 강릉을 향해 열려 있었다. 달빛을 실은 배처럼 강릉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그의 노랫말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강릉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윤천금, 김남중, 권상탑, 진재중은 그의 예술혼과 맑은 인품을 기리고자 노래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은다. 선생의 예술혼과 강릉에 대한 애정을 조각 작품으로 현상화한 것은 최옥영이 맡았다. 함호영 선생의 차남 함태헌이 노래비 제작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충당하고 강릉시장 심기섭이 뜻을 같이해 강릉을 상징하는 경포호수에 또 하나의 달을 맞는 배의 모습으로 이 노래비를 띄운다”고 적혀있다.
 

함호영, 미국 하와이로 이민
‘사공의 노래’가 유명한 가곡임에도 작사자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작사자이름이 함호영, 함효영, 함호용, 함오용 등 악보집마다 다르다. 한때 인터넷에 ‘사공의 노래’ 저작권 양수자를 찾는다는 공고가 떴다. 한국가곡연구소가 ‘외국인을 위한 한국가곡집’을 펴내는 과정에 ‘사공의 노래’ 저작권 연고자가 저작권협회 등에 등록돼 있지 않아서였다.

함호영(1868년 6월 5일~1954년 3월 27일)은 대한제국 때인 1905년 부인과 함께 몽고리아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이민 가 사탕수수농장노동자로 일하며 41점의 농장일지를 남겼다. 양반의 후예로 한학자였던 그는 박봉에도 1909년 대한인국민회에 가입, 애국공채를 여러 번 사기도 했다. 하와이 사탕수수이민 1세대인 그의 일가가 남긴 자료들이 2013년 5월 밝혀져 눈길을 끈다. 농장일지, 편지, 각종 영수증, 증서, 책 246종, 복식 63점, 유물 36점 등은 UCLA출신인 그의 외손녀(줄리엣 오) 부부가 2006년 기증한 것이다.

함 시인은 1899년 진사의 딸인 최해나(경기도 광주태생, 1882~1979년)와 결혼, 하와이에서 4남6녀를 낳아 길렀다. 미국 곳곳에 후손들이 있고 성남시 이매동엔 딸 함태경(81)씨가 살고 있다. 함태경 씨는 분당 정자동 가곡동호회 ‘라 돌체비타’ 회원으로 매주 노래연습을 한다. 마우이섬 부네네 지방총회장을 지낸 함 시인은 우리나라 제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과 6촌간으로 두 사람의 편지가 화제를 모았다. 둘의 관계는 자식대까지 이어져 양쪽 일가는 300여 통의 국문 또는 영문편지를 주고받았다. 함태영의 아들로 1983년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 테러사건 때 숨진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형제의 미국 유학과 결혼생활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홍난파, 연주가·작곡가·교수로 활동
‘사공의 노래’를 작곡한 홍난파(본명 홍영후, 필명 나소운)는 연주가, 작곡가, 교수, 빅타레코드사 음악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마치고 1909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 음악공부에 전념했다. 1911년 14세 때 산 바이올린을 갖고 독학하다 조선정악전습소에 들어가 김인식 선생 지도로 본격적인 바이올린 공부를 했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성악과 2기생으로 졸업, 다시 바이올린과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5년 졸업과 동시에 모교 바이올린교사로 후진들을 키웠다. 1918년 일본으로 가 동경음악학교(현재 동경예술대)에서 2년간 수학했다.

1920년 단편소설집 ‘처녀혼’, 1923년 장편소설 ‘폭풍을 지난 뒤’를 발표해 문학적 재질도 인정받았다. 1922년 음악연구기관 연악회를 만들어 작곡·연주·평론활동을 시작하고 기관지 ‘음악계’(우리나라 첫 음악잡지)도 창간했다.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독주회도 가졌다. ‘봉선화’, ‘성불사의 밤’, ‘그리움’, ‘옛 동산에 올라’, ‘봄 처녀’, ‘사랑’,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의 가곡과 ‘고향의 봄’, ‘해바라기’, ‘할미꽃’, ‘웃음’, ‘병정나팔’, ‘엄마생각’, ‘옥토끼’, ‘무지개’, ‘낮에 나온 반달’, ‘달맞이’ 등 동요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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