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가 발등 찍는 도끼로 변했다. 불황기에 국내 조선업계의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해양플랜트’ 대량 수주의 부작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저가 해양플랜트 수주 영향으로 지난해 수익성 악화에 시달렸던 국내 조선업계가 올해는 발주사의 연이은 해양플랜트 인도 지연으로 더 큰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해양플랜트 저가 수주와 인도 지연으로 국내 조선3사의 경영악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이후 발주가 뜸했던 해양설비의 발주가 다시 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조선사의 해양플랜트 수주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고, 우리 조선업계도 과거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국내 조선업계는 2010년부터 글로벌 해양플랜트 수주를 거의 독차지했다. 2008년 말 이후 뚝 끊긴 상선수주로 조선사들의 곳간이 점차 바닥을 드러낸 가운데, 글로벌 오일메이저들의 심해자원 개발로 인한 해양플랜트 물량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대형 계약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부작용은 당시 수주된 해양플랜트가 본격적으로 인도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우리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 건조경험 미숙으로 인한 손익계산 실패로 엄청난 손해를 봤다. 경험이 없던 해양플랜트 계약을 ‘싸게 많이’ 이끌어낸 것이 독이 된 것이다. 해양플랜트 인도시점부터 우리 조선사의 경영지표가 반등할 것이라는 예측은 크게 빗나갔고 대우조선해양을 제외한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큰 폭의 실적하락을 경험했다. 현대중공업은 3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했고 삼성중공업은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80% 이상 급감했다.

올해는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저가수주로 인한 손실에다 발주사의 인도지연으로 인한 손실까지 겹친 것이다. 해양플랜트를 대거 수주한 국내 조선 ‘BIG3’ 중 지난해 유일하게 안정적인 경영성과를 냈던 대우조선해양마저 8년 6개월만에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유가하락→인도지연으로 이어져..
“유가 배럴당 80달러 수준돼야 인도지연 해소”

해양플랜트 인도지연의 원인은 지난해부터 나타난 유가하락으로 인한 결과이다. 유가하락으로 인해 해양플랜트를 통한 오일·가스 생산의 효율성이 급감했으며, 이로 인해 발주사들은 용선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과거 해양플랜트 발주가 최고점을 찍었던 2010~2013년은 유가가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한 조선업 연구자는 “오일메이저들은 유가에 따라 해양투자를 결정한다. 대략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 수준이 돼야 해양설비를 통한 에너지 생산이 수지가 맞는다는 계산인데, 현재 60달러선인 유가로는 해양 투자가 적자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새로운 용선처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중공업은 최근 오세아니아 선주로부터 수주받은 드릴십 2척에 대한 기간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동 계약으로 해당 드릴십 2척의 인도 예정일은 2017년에서 2019년으로 늦춰졌다. 여기에 일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용선처를 찾지 못한 상황이어서 추가 인도지연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중공업도 건조 중인 반잠수식 시추설비 3기가 인도 지연됐으며, 대우조선해양의 초대형 반잠수식 시추선 4척의 인도시기도 지연됐다. 이에 대해 국내 조선업계 관계자는 “모든 해양플랜트가 인도 지연된 것은 아니며 최근 해양플랜트 발주가 다시 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어 그리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해양플랜트 저가수주, 인도지연 영향..
올 1분기 현대重 1,924억, 대우조선 433억 영업손실

올 1분기 조선 3사의 영업실적을 보면 해양플랜트로 인한 손실의 충격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은 1,924억원의 영업손실을 냈고, 삼성중공업은 263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지난해 2분기 이후 영업이익의 폭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그나마 견조한 실적을 보여왔던 대우조선해양이 43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는 것이다. 분기 기준으로 대우조선해양이 영업손실을 입은 것은 지난 2006년 3분기 이후 8년만이다. 동사는 당기순손실도 1,724억원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증권가에서는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이 미래에 발생할 손실에 대한 충당금을 미리 반영한 반면, 대우조선해양은 손실 반영을 미뤄왔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 증권가 관계자는 “경영진 교체 시기에 맞춰 전임자 시절의 실적부진 요인을 회계에 선반영해 큰 손실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해양분야의 손실도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러한 영업손실은 조선업계의 신용등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5월 21일 현대중공업의 장기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대우조선해양은 ‘A+’에서 ‘A’로 강등했다. 나이스신평은 “조선사 전반의 수익성 하락과 운전자금 부담 증가, 해양플랜트 발주 위축 등을 고려할때 조선업의 불리한 환경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대규모 충당금을 설정한 프로젝트들의 제작이 본격화되고 수주부진을 고려할때 의미있는 수익성 개선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하고, “대우조선해양은 올 1분기 영업손실로 수익성이 떨어지고 해양플랜트 신규발주 등에서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선수금 10%-인도시 90% 헤비테일 방식
조선사에 부담, 계약변경, 인도지연 잦아..조선사는 철저한 ‘乙’

이처럼 해양플랜트의 인도지연이 조선업계 수익성에 크게 영향을 주는 이유는 발주사와 조선사간 결제가 ‘헤비테일(Heavy tail)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헤비테일 계약은 공사대금의 절반 이상을 인도시에 지급받는 방식이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헤비테일 계약은 계약과 설계단계에서 5~10%의 금액만 지급하고 인도시점에서 80% 이상 지급하는 방식으로 더욱 심화돼 조선사들의 재무구조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해양플랜트 건조시 비용의 대부분은 초기 단계에 발생한다. 건조과정을 계약-설계-스틸커팅-탑재-진수-인도 등 5단계로 구분한다면, 원자재를 구입하고 기자재 등을 계약하는 스틸커팅과 탑재 등에 건조비용이 집중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주사들은 계약금액의 5~10%만 조선사에 지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조선사는 선수금 감소와 건조기간 발생하는 매출 채권 증가에 직면하게 된다.

헤비테일 계약과 함께 발주사의 계약변경으로 인한 가격 재협상도 조선사에겐 대규모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이다. 인도시점에 80~90%의 잔금을 받는 조선사들은 발주사가 건조 중에 계약 변경을 요구하더라도 ‘을’의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공정 지연 등 계약변경시 발주처-조선사간 추가비용과 관련한 재협상에서도 칼자루는 여전히 발주사가 갖고 있는 것이다. 한 증권가 애널리스트는 “국내 조선소 대부분이 계약금의 70% 이상을 선박 인도시에 지급받는 헤비테일 계약을 체결한 만큼 인도 지연은 잔금이 늦게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는 매출 반영이 늦어지는 것이고, 이에 따른 고정비 부담 증가는 수익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고 말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도 “해양플랜트의 경우 선주들의 까다로운 검사와 처음 건조하는데 따른 생산 차질들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해양설비의 경우 장기적 관점에서 조선업을 책임지는 사업인 만큼 일부 적자는 감내해야 한다. 또 이들 해양설비의 인도 지연은 유가가 정상화 될 경우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으로 보여 지켜보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이후 국내 조선사 해양플랜트 수주 ‘0’
수주부진으로 협력사 경영 악화, 근로자 생계 악영향

이처럼 해양플랜트로 인한 부작용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해양플랜트는 여전히 우리 조선업계에게 놓칠 수 없는 ‘빅 마켓’이다. 지난해 11월 이후로 국내 조선사들이 수주한 해양플랜트는 단 한건도 없다. 저유가로 인한 해양플랜트 발주 침체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온 해양플랜트 수주침체는 우리 조선 야드가 입지해 있는 지역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조선사가 수주한 해양플랜트는 2010년 101억불에서 2011년 239억불로 급증한 이후 2012년 221억불로 기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2013년 190억불로 수주액이 크게 줄었고 지난해에는 46억불로 전년대비 1/4 수준으로 고꾸라졌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해양플랜트 건조와 관련한 협력회사와 근로자들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한 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대형 조선사 A사의 경우 협력사를 포한한 근로자수가 3,000명 이상 줄어들었다”고 증언했다. 해양플랜트 수주부진이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생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해양플랜트 발주 회복 움직임..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들어 해양플랜트 시장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어 우리 조선업계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지금과 같이 조선사의 수익성을 악화시킬 수 있는 계약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조선사들의 입장이다.
조선업계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이탈리아, 이스라엘, 태국, 나이지리아 등에서 펼쳐지고 있는 해양플랜트 입찰시장이 열렸으며, 국내 조선 3사 역시 동 경쟁에 뛰어들어 대규모 수주가 예상되고 있다.
5월 6일 트레이드윈즈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가즈프롬이 발주한 17만㎥의 LNG-FSRU 수주전에 현대중공업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며, 이탈리아 국영에너지기업 ENI가 발주하는 모잠비크 FLNG와 이스라엘의 FLNG 수주전에서 국내 조선3사가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조선사의 수주 가능성은 우선 긍정적이다. FLNG 분야에 워낙 뛰어난 건조 능력을 갖고 있는데다 그간 대부분의 글로벌 해양플랜트 발주분을 소화한 건조능력도 경쟁국에 비할바가 아니라는 것이 조선업계의 설명이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해양플랜트로 인한 손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조선사들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저가 수주와 인도 지연 등 과거 해양플랜트 수주로 인한 부작용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불리한’ 계약이 반복된다면 한 회사를 넘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만약 이번에도 상식밖의 저가 수주계약이 일어난다면 당장 조선업계 노조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면서, “조단위의 영업손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과당 경쟁으로 인한 저가 수주는 단일 회사 뿐 아니라 협력회사와 관련 근로자,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 대형 조선소 관계자도 “해양플랜트 수주가 이어졌던 당시 세계 최초로 건조하는 선박인 만큼 원가계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았다”면서 “하지만 최근 한 대형 조선소는 최근 해양설비 입찰 당시 사업성을 고려해 빠지는 등 철저한 원가계산 및 계약요건을 강화하는 등 보수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어 추가부실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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