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여옥患難如玉 2

이 글은 지난해 한국해양재단이 실시한 ‘제8회 해양문학상’ 수상작 중 수필부문 우수상을 수여받은 작품이며, 작가 김종찬씨는 1970년대 해군중위 전역이후 외항선에서 기관장 등 업무로 40년간 승선경력을 가졌다. 그는 2004년 부산시(부산문인협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이후 한국해양문학가협회 부회장(2005년)을 역임했으며, 2012년에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종찬씨의 2014년 해양문학 수상작 ‘환난여옥’의 전문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가 직접 경험했던 승선생활이 사실적으로 기록돼 있는데다가 안전과 직접 연관이 있는 선박의 엔진부문 점검과 고장, 수리를 맡고 있는 기관사의 직무와 애로 등이 잘 기록돼 있어 일독을 권할만 하다.

김종찬
김종찬
‘오션그린(Ocean green)’호는 그때까지 정기로 호주 타운즈빌에서 쇠고기를 싣고 인천이나 부산항에 입항했다. 그러다가 쇠고기 계약이 끝나고 부정기선Tramper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어떤 화물을 싣고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다. 냉동화물은 -25℃ 정도로 꽁꽁 얼리면 되지만 바나나, 사과, 오렌지 같은 과일 종류는 온도 맞추기가 냉동화물에 비해 훨씬 까다롭다. 특히 바나나는 운송 온도가 12.8℃∼13.3℃이다. 온도가 조금만 낮으면 냉해를 입어 까맣게 변하고 또 높으면 노랗게 익어 화물이 손상되고 만다. 얼마 전에 에콰도르에서 바나나를 싣고 부산으로 오던 어느 냉동 운반선에서는 자동온도조절장치 고장으로 운송 온도를 못 맞춰 바나나가 농익어 선상에서 모두 뭉크러지고 말았다고 했다.

오션그린 호는 선령 24년이나 된 낡은 배였다. 냉동사도 없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나도 승선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내가 망설이자 후임자를 못 구해 답답하던 부산 지사장은 이렇게 슬그머니 자존심을 건드렸다.    
“한번 부닥쳐보지도 않고 뭘 그리 겁부터 냅니까. 앞날이 창창한 해군 장교 출신이. 까다로운 화물을 싣게 되면 냉동사를 승선시켜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 항차 해 보세요. 정 힘들면 그때 내려도 되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젊은 혈기로 오션그린 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빈 배로 부산항을 출항한 오션그린 호는 뉴질랜드로 향했다. 동중국해의 겨울 바다는 계절풍으로 허옇게 들끓었다. 선체는 심하게 흔들리고 엔진의 맥동은 불안하게 와르릉거렸다.
 

다음 항차 지침서(Voyage instruction)가 왔다.
화물 선적항 : New plymouth, New zealand.
화물 양륙항 : Basra, Iraq.
화물 종류 : Butter 1200 M/T, Cheese 1050 M/T,  Powdered Milk 1000M/T.     

 
오션그린 호의 평균 선속은 12노트 정도였다. 뉴질랜드에서 이라크까지는 날씨가 좋다고 해도 한 달이 더 걸리는 장기 항해였다. 화물 운송 온도는 치즈 0∼1℃, 버터 -10℃∼-7℃. 파우더 밀크는 온도는 크게 신경 안 써도 습도는 적당히 조절해주어야 했다. 낡은 배라 화물창 자동 온도 조절장치가 어느 정도 정확하게 작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승선하긴 했지만 모든 것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내가 걱정을 하자 냉동화물선을 오래 탄 K 선장은 냉동 화물 중에서 가장 취급하기 쉬운 화물이라고, 너무 겁내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처음이라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K 선장은 1972년 내가 해군 소위로 한국함대에 배치되었을 때 대령이었다. 같은 함정에서 근무한 적은 없지만 하도 성질이 고약해 진해 바닥에서 초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별명이 ‘왕왕개 대령’이었다. 나중에 그 애기를 했더니 싱긋 웃으며 “내가 그렇게 악명이 높았어?” 했다. 상선에서 만나니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아내가 손을 잡아끌어도 교회에 따라가지 않았는데 바다 가운데서는 의지할 곳이 하나님밖에 없었다. 마음이 불안할수록 나도 모르게 성경을 펼치기 시작했다.
 

-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서, 큰 물을 헤쳐가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행사를 보고, 깊은 바다에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을 본다.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없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여라. 사람에게 베푸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감사하여라. 백성이 모인 가운데서 그분을 기려라. 장로들이 모인 곳에서 그분을 찬양하여라. - (시:107 23-32)

 
오션그린 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뉴질랜드 뉴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연말연시를 이 평화스러운 항구에서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뉴플리머스는 주로 낙농제품을 수출하는 항구였다. 1841년부터 영국 플리머스 출신 이민들과 원주민인 마오리 족들과의 전쟁을 치른 후 동거를 하면서 에그먼트 Egmount 산기슭을 따라 낙농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시내에는 마오리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외부인의 왕래가 별로 없는 이 도시의 주민들은 입항한 외국 배를 구경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오션그린 호를 구경하러 왔던 마오리 족 Skipper witipi 씨는 부인의 생일파티에 우리 선원들을 초대했다. 한국 사람들은 생선회를 좋아한다고 도미 생선회를 대접했다. 마오리 족들도 생선회를 먹는다고 했다. 마오리족들도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고 했다.

지방 신문 칼럼리스트인 에드워드 씨도 우리들을 초대했다. 그의 집 응접실에는 우리나라 인형이 유리 상자 속에서 장고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 회사 소속 냉동화물선에서 받은 선물이라고 했다. 에드워드 씨는 뉴플리머스는 너무 조용하고 사건이 없는 도시라 백지신문白紙新聞을 발행할 형편이라고 걱정했다. 얼마 전에는 한국 냉동화물선 선원이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에 간 일이 있는데 그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됐다고 했다.
멀리서 기차로 화물을 실어 날라 선적 기간은 보름이나 걸렸다. 선원들은 그 동안 해변에서 전복도 잡고, Coho way(연어 종류) 낚시도 하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공원의 호수와 양 목장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2월 31일 밤에는 <PARI TUTU> Tavern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망년회를 했다. 

 
 1월 8일, 오션그린 호는 보름 만에 뉴플리머스 항을 출항했다. 이라크까지의 항로는 태즈먼 해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해 -인도양 -아라비아 해 -호르무즈 해협 -페르시아 만 -아랍 스트림 -바스라였다. 중간 기항지 없이 이렇게 긴 항정을 항해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해에서는 계속 날씨가 나빴다. 비는 창대같이 퍼붓는데 톱 브리지 위에서는 포탄이 터지듯 천둥이 우르르 쾅쾅 치며 번개가 번쩍번쩍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밤톨만한 우박이 갑판 위에 마구 쏟아져 나뒹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인도양에 들어서니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상승했다. 아라비아 해로 올라갈수록 날씨는 더워지는데 페르시아 만에서 얼마나 대기를 해야 할지 몰라 청수도 제한급수를 했다. 오션그린 호는 선령이 오래된 배라 선실에 에어컨도 없었다. 식사 때면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지만 청수 제한으로 마음대로 세탁도 할 수 없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고 페르시아 만에 들어서니 왕래하는 배들이 많아졌다.
2월 12일 밤에 이라크와 이란의 경계인 강 하구에 투묘를 했다. 38일 간의 장기 항해였다. 걱정했던 화물창 온도는 다행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주기관은 날씨가 나쁠 때나 대기온도가 너무 높을 때는 부하한계(Torque reach) 영역에 들어갔다. 터보차저가 서징Surging을 해서 회전수를 더 이상 올릴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전문으로 이것저것 잔소리를 했다.
 

- 피스톤 링 고착된 것은 없느냐? 소기 압력은 얼마냐? 과급기 운전 시간은?…….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선저에 해양생물이 많이 붙어 빨리 드라이 독을 해야만 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합쳐져 흐르는 강 하구를 아랍 스트림(Arab stream)이라고 했다. 앵커리지에서는 육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기하는 배들만 깨알처럼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몇 번이나 헤아려 봐도 백 척이 넘었다. 오션그린 호도 얼마나 대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리점에서는 접안 계획에 대해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한국 선원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부식을 구하려 왔다. N 해운 소속 선원들이었다.
“여기 도착한 지 6개월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부식은 진작 다 떨어졌는데 여기서 싣자면 헬리콥터나 터그보트에 싣고 나와야하기 때문에 너무 비싸서 구입할 수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낚시질을 해도 이 바다에서는 고기 한 마리 안 잡힙니다. 구명보트를 내려 선저에 붙은 홍합이나 파래를 뜯어 반찬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모래가 설인데 누룽지를 끓여 제사를 지내야 할 판입니다. 제사상이나 차릴 수 있도록 이것저것 조금씩만 나누어 주십시오. 이 배는 냉동선이라 부식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싣고 온 화물은 치즈, 버터, 그리고 밀크 파우더라 부식거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장기 항해를 해서 야채는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우리 배가 생선이나 육류를 싣고 온 줄 알고 왔던 것이다. 미화 3백 달러를 내놓으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통사정을 했다.

“냉동선은 길어야 일주일 정도밖에 대기하지 않습니다. 양배추나 감자, 양파 몇 개라도 좀 부탁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야채 구경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밀크 파우더 조금만 줄 수 없겠습니까? 한두 말이라도 좋습니다. 우리 선원들은 지금 거의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사람이 음식에 굶주리면 이렇게 비굴해지나 싶었다. 형편은 딱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줄 수는 없었다. 당근, 양파, 감자 몇 개에 생선과 닭고기를 조금 나눠주었다.
당시에는 중동, 아프리카 산유국에 시멘트나 원목을 싣고 갔다가 한 항구에서 6개월 이상, 심한 경우에는 거의 1년 가까이 대기한 배들이 한두 척이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입항했다가 부식과 청수가 떨어져서 선원들만 죽을 고생을 했던 것이다.

오션그린 호는 나흘 만에 부두에 접안을 했다. 2월 16일 저녁 9시에 파일럿이 승선하여 바스라 항 부두에 계류하고 나니 17일 오전 11시였다. 밤새도록 아랍 스트림을 타고 올라오면서 주기 회전수를 Slow, half, full로 올렸다 내렸다 엔진을 마구 쓰는 통에 혹시라도 말썽이 생길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부두에 배를 붙이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라크는 사회주의 국가라 상륙도 할 수 없었다. 대리점 직원은 매일 배에 출근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해주는 것이 없었다.
“치프 엔지니어, 당신 우편물이 우체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뜸을 들여놓고서는 갖다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달라는 소리였다. 내 방 벽에 걸린 초록색 점퍼를 보더니 탐을 냈다. 아들에게 줄 모양이었다. 그걸 주었더니 이튿날 당장 가져왔다. 집에서 보낸 편지와 책이었다. 1월26일 바스라 도착 소인이 찍혀 있었다. 진작 도착했는데 사무실에 두고 일부러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역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화물창 온도에 주의해야 했다. 인부들은 춥다고 불평을 했지만 야간에 쉬는 시간에 냉동기를 돌려 온도를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D해운의 어느 배는 양고기를 싣고 왔다가 마지막에 남은 양고기 백여 톤이 녹아 하역을 거부당하고 클레임까지 물고 쫓겨나갔다고 했다. 2월 23일 오후, 무사히 하역작업이 끝났다.

출항 스탠바이를 하고 첫 주기 작동 명령이 내려왔다. 그런데 주시동공기변이 닫히지 않아 시동공기가 다 빠져버렸다. 재충전하느라 출항이 30분이나 지연되고 말았다. 어렵사리 출항을 하여 연료유를 받기 위해 아랍 스트림 중간에 앵커링을 했다. 이번에는 또 발전기 한 대가 말썽을 부렸다. 원동기는 돌아가는데 전압이 올라가지 않았다. 점검해 보니 여자기勵磁機에서 나가는 선이 한 가닥 냉각 팬에 걸려 절단되어버렸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절단된 부분을 잘라내고 단자를 새로 만들어 연결하면 응급수리가 될 것 같았다. 벙커 바지가 올 때까지 밤을 새워 수리를 했다. 시운전을 하니 전압이 상승하고 병렬운전이 가능했다. 수리 한 부분에 열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당장은 문제가 없었다. 곧 드라이 독을 한다니 그때까지만 견뎌주면 되었다. 아침 8시에 온다던 벙커 바지는 해질녘에 왔다. 밤새도록 기름을 받고 아침에 출항을 했다.
아랍 스트림을 다 빠져나오니 오후 3시였다. 꼬박 30시간 동안 눈 한번 못 붙였으나 수로를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호주 남단 태즈메이니아 섬 남쪽으로 가라는 전문이 왔다. 「450일간 Singapore Reefer에 Time charter」 되었다고 했다. 용선 계약서(Charter party)는 알려주지도 않고 선속船速이 느리다고 자꾸 질책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닦달을 해도 부하가 많이 걸려 주기 회전수는 더 올릴 수가 없었다. 아랍 스트림의 강물에서 선저에 붙은 해양생물이 좀 죽었나 했더니 홍합이 새까맣게 그대로 붙어 있고 파래는 길게 자라 거웃처럼 너불거리고 있었다.  
한 항차는 무사히 마쳤지만 다음 항차 무슨 화물을 실을지 또 걱정이 앞섰다. 이것저것 근심이 많으니 식욕도 없고 몸도 피곤했다. 자꾸만 오션그린 호에 잘못 나왔다는 생각만 들었다.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꿈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회사의 질책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신념대로 행동하라!”
밤잠을 설치고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코피가 터졌다. 금방 멎었지만 후끈거리는 기관실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또 터졌다. 솜으로 꽉 틀어막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뉴질랜드 Napier에서 사과를 싣고 동남아로 갈 예정이라는 전문이 왔다. 냉동사 승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고 주기 정비에 관해서만 시시콜콜 잔소리를 했다.  
선적항이 Napier가 아니고 Nelson으로 바뀌었다. 사과 2000톤을 싣고 홍콩에서 1700톤, 마닐라에서 300톤을 하역한다고 했다. 그리고 넬슨에서 잠수부가 선저에 들어가 해조류 제거 작업(Bottom scaling)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드라이 독은 연기된 모양이었다.
넬슨에서 사과를 싣는 동안 냉동사도 보내주지 않고 잠수부들의 사정으로 선저 소제도 하지 못했다. 본사에 항의 전화를 했더니 상무는 대뜸 “1급 기관사가 그것도 못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울고 싶은데 꿀밤 맞은 기분이었다. 당장 하선신청을 했다.
 

「과로와 신경과민으로 계속 코피가 터지고 있음. 자신 없으니 홍콩에서 기관장 교대 바람.」
 

난생 처음으로 사과를 싣고 출항을 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 밟는 기분이었다. 화물창 온도는 각 화물창별로 자동으로 기록되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물창과 쿨러 룸(Cooler room)을 드나들며 노심초사했다. 화물창 온도가 올라가면 제상작업Defrost을 해야 했다. 온도가 낮을 때는 주로 자동온도조절장치Thermostat에 문제가 있었다. 연가年暇 신청으로 홍콩에서 하선할 사람은 7명이었다. 회사 회신은 이렇게 왔다.
 

「홍콩 승선 8명, 하선 7명. 냉동사 승선, 기관장 적임자 없어 교대 불가하니 양지 바람.」
 

한번 정 떨어진 마음은 만사가 귀찮았다. 냉동사를 보내준다고 해도 한시도 더 오션그린 호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즉시 답신을 보냈다.
 

「홍콩에서 기관장 교대 불가하면 마닐라에서 필히 교대 요망함.」
 

홍콩에 도착했다. 넬슨에서 홍콩까지 18일 동안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지만 다행히 사과는 아무런 문제없이 하역을 했다. 홍콩에서 선원 교대를 하고 출항을 했다. 선장도 교대를 했다. 왕년의 ‘왕왕개 대령’ K 선장이 하선하고 L 선장이 승선했다. 신임 L선장도 해사海士 출신으로 예비역 소령이었다.
  마닐라 항 입항 전에 대리점에서 전문이 왔다.
 

「부두 사정으로 이틀 간 투묘 대기 예정임. 투묘 중 해상강도 행위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으니 야간 경계 당직에 만전을 기할 것.」
 

신임 L 선장은 선원들을 모아놓고 해상 강도 방지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최근 항해 중인 어느 냉동화물선에 침입하려던 해적들을 선원들이 계란과 토마토 사격으로 물리쳤다는 통지문에 왔다. 투묘 중에 접근하는 강도는 먼저 발견하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 기적을 울리고 물대포를 쏘면 강도들은 승선을 포기할 것이다. 철저한 경계근무를 당부한다. 이상.” 

오션그린 호가 마닐라 항에 도착했을 때 투묘 대기하고 있던 배는 스물세 척이었다. 초저녁에는 세관, 해안경비대 순시선이 계속 순찰을 돌다가 밤중이 되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무렵, 바로 옆에 닻을 내린 배에 스피드 보트 두 척이 도둑고양이처럼 자꾸만 접근하려고 집적거렸다. 그 배에서는 소방호스로 물대포를 쏘며 보트의 접근을 막았다. 개도 타고 있어 컹, 컹, 짖어댔다. 우리 배 선원들은 “아이고, 저 배 선원들 오늘밤 편한 잠 자기는 글렀구나!” 하고 남의 걱정을 하며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틈을 노려 강도들은 앵커 체인을 타고 우리 배의 선수 창고에 침입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양동작전을 폈던 것이다. 창고 문은 ‘필리피노 록(Filipino lock)’ 식으로 단단히 잠가 놓았지만 전문 강도들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직자가 강도들을 발견했을 때는 나무틀에 감겨 있던 새 뱃줄Hawser 한 바퀴가 다 풀려 바다로 내려가고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선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선수 갑판으로 몰려가자 팬티만 걸친 강도는 번쩍이는 일본도를 들고 망나니처럼 칼춤을 추며 위협을 했다. 그 동안에 남은 뱃줄은 다 풀려 끝매듭이 풍덩 바다로 떨어졌다. 창고 안에서 뱃줄을 풀어내던 강도도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두 강도는 원숭이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선원들에게 히쭉 웃으며 작별인사를 하고는 풍덩 바다로 점프를 했다. 그제야 선원들이 선수갑판에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보트가 너무 작아 뱃줄 한 바퀴를 싣고 갈 수는 없었다. 강도들은 바늘에 실을 꿰듯이 뱃줄을 보트 꽁무니에 물고서 마닐라 만을 가로질러 갔다.
당직 항해사가 기적을 울리고 VHF 16채널로 신고를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마닐라 만이 울리도록 숨 가쁘게 기적을 울렸지만 세관이나 해안경비대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세관본부와 해안경비대가 있었지만 다 한통속이었다.

(※이 강도 사건은 오래 전 어느 문예지에 단편 소설로 발표했음을 밝혀둡니다.)
배가 부두에 접안하자 고아원에서 나왔다는 수녀 차림의 여자들이 찾아왔다. 고아원 원장인 신부가 썼다는 닳아빠진 청원서 한 장을 내밀면서 선원들에게 불우 이웃돕기 헌금을 하라고 떼를 썼다. 하지만 마닐라 항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매스컴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 초반에 마닐라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국립대학 실습선이 마닐라 항에 입항했을 때였다.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의사와 간호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실습선을 찾아왔다. 그들은 국제적십자사 요원이라며 학생들의 헌혈을 요구했다. 인솔 교수는 국가 체면이 있어 헌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너도나도 팔을 내밀었다. 그런데 나중에 대사관 직원을 통해서 알고 보니 그들은 국제적십자사 요원이 아니었다. 사설 단체에서 나온 피 도둑이었다. 그런 행위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닐라에서도 후임 기관장은 오지 않았다. 후임자도 오지 않았는데 내리겠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마닐라에서 다시 하려고 했던 선저소제를 여기서도 못했다. 다이버들의 도구Brush 고장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본사에서 긴급 전문이 왔다.
 

「오션 다이내믹 호 주기 콘넥팅 로드 볼트가 풀려 폭발 사고 발생. 기관 정비 작업 시 안전 점검에 만전을 기하기 바람.」
 

이 전문을 읽고 나는 이렇게 속다짐을 했다.
‘주기 회전수는 못 올리더라도 대형 사고는 안 나야지! 기왕 하선을 못 했으니 회사의 질책을 받더라도 꾹 참고 끝까지 한번 버텨보자.’ 
며칠 동안이나 악천후가 계속되었지만 무사히 넬슨 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여태까지 못 했던 선저소제 작업을 했다. 잠수부들이 배 밑창에 들어가 사흘 동안이나 홍합, 삿갓조개, 청파래 등 해양생물을 긁어냈다. 하지만 출항 후 주기 회전수는 겨우 4∼5회전밖에 상승하지 않았다. 오션 다이내믹 호 사고 때문인지 회사에서는 연료 핸들을 더 올려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화물은 대만 기륭과 홍콩에서 다 풀어주었다. 6월이 지나고 7월이 되었다. 오션그린 호에 승선한 후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지만 어느 새 7개월이 지났다.
 

다시 뉴질랜드 Napier 항에 입항했다. 이번 항차의 화물은 사과 7만 상자와 잡화 5백 톤이었다. 사과는 홍콩 화물이고 잡화는 싱가포르 화물이었다. 화물을 싣는 동안 L 선장의 소개로 이본느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다. 이본느는 L 선장의 여자 친구인 수Sue의 친구였다. 이본느는 파울Paul이라는 열다섯 살짜리 아들이 있는 과부로 수와 함께 백화점에서 일했다. 수와 이본느의 백화점 일과가 끝나면 선장과 나, 그리고  파울과 함께 사슴농장 구경도 하고 극장에도 가고 중국 식당에도 갔다. 우리들은 잠시나마 골치 아픈 배의 걱정들을 잊어버리고, 그녀들은 똑같은 일상에서 생활의 변화를 얻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우리들의 친절이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홍콩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않았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받아 본 외국 여인의 편지라 약간 어리둥절했다. 남편 없는 가정이란 어느 나라 여인이나 다 이렇게 허전하구나 싶었다. 그녀의 외로운 마음과 쓸쓸한 생활이 편지 속에 절절하게 엿보여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어제 오션그린 호가 출항하는 것을 보면서 허전한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L 선장은 브리지에서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습니다. 우리는 배가 나피어 항에 며칠 더 머물렀으면 하고 아쉬워했습니다. 나와 내 아들 파울에게 베풀어준 친절 감사합니다. 지금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유달리 추위를 느낍니다. 나도 이제 여생을 같이 할 남편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운 밤에는 난로 곁에 앉아서, 여름날 해질녘에는 황혼을 바라보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상한 남편을. 새삼스럽게 남편이 있는 여자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당신 아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저녁 준비를 해야겠군요. 몸조심하세요. 안녕.   이본느 스미스.   

       
싱가포르에서 하역을 마친 오션그린 호는 Singapore Keppel Dock Yard에 입거入渠했다. 기관장이 된 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정기검사(Special survey)라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세상에서 기술을 팔고 살 때에 모르는 것처럼 서러운 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노후선이라 수리할 곳이 워낙 많아 열흘이나 걸렸다. 드라이 독을 마친 후에는 두어 달 동안 필리핀-홍콩 항로에서 잡화를 실었다.
필리핀 일로일로iloilo 항에서는 냉동사가 멋모르고 세관 초소에 신고도 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가 돌아올 때 ‘세관원의 밥’이 되고 말았다. ‘Business man’으로 몰려 카메라도 뺏기고 벌금 30달러도 물었다. 세관원들이 뻔히 알고 하는 짓이었다.

10월 하순부터 오션그린 호는 싱가포르-중국 다이렌大連 항로를 뛰게 되었다. 겨울철 지나해의 계절풍은 지긋지긋하다. 다이렌으로 올라갈 때는 계속 앞바람을 받았다. 10월 25일 싱가포르를 출항하여 다이렌에 도착하니 11월 7일이었다. 항구에는 닻을 내리고 대기하는 배들이 사십여 척이나 되었다. 오션그린 호도 화물이 준비되지 않아 닷새 동안 대기해야 했다. 날씨는 벌써 겨울 날씨였다. 오션그린 호는 난방 장치도 없었다. 선원들은 모두들 침실에 갇혀 히터를 켜고 전기모포를 둘러썼다.

열흘이나 대기한 후에야 이른 새벽에 갑자기 부두에 접안을 했다. 입항 수속관리들은 단정한 국민복 차림으로 아주 겸손했다. 접대품 담배도 사양했다. 부두에는 낡은 크레인이 녹슨 채 줄지어 서 있고 공장의 높은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매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건너편 언덕 위에는 닭장 같은 인민주택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이 되자 수많은 여공들이 부두를 지나갔다. 각각 다른 차림새가 선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길게 땋은 머리, 양 갈래로 묶은 머리, 화이트 컬러, 청색 근무복. 지게차나 화물 트레일러 운전수는 대부분 두터운 누비옷을 입은 여자들이었다.

배에서 일하는 하역인부들은 자기 식기와 수저를 가지고 다녔다. 식사 때가 되면 통선에 음식을 싣고 와 배에서 배식을 했다. 인부들은 식권을 주고 각자의 밥그릇 국그릇에 밥과 반찬을 받았다. 현문 앞에는 새파랗게 젊은 공안公安 두 명이 지키고 서서 출입자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친절한 하역인부들에게 담배나 비누를 주면 안 받는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안 본다 싶으면 두꺼비 파리 삼키듯 얼른 받아 소매 속에 감추었다.

쥐색 제복을 입은 제약청 직원이 약을 팔러 왔다. 한국 선원들이 좋아하는 청심환, 백봉환, 지보삼편환, 육신환, 호골주, 녹용, 웅담, 보신제補腎劑 등이었다. 청심환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제일 비싼 것은 백랍으로 포장한 동인당同仁堂 제품이고 제일 싼 것은 닥종이에 싼 방씨우황청심환이었다.
화물 검수 지도원이 감기가 들어 춥다며 내 방에 좀 있자고 했다. 감기가 든 게 아니고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이렌 외국어 대학 영문과를 나왔다고 했다. 영어는 유창하게 잘 했고 일본어도 조금 했다. 꿀물을 한잔 타 주었더니 금방 아첨장이가 되어버렸다. 근래 들어 한국 배들이 많이 들어오고 한국 선원들은 모두 친구들이라고 했다.

그는 작년에 결혼 했는데 아직 아이는 없다고 했다. 자유연애에 대해서 묻고 또 처녀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그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 나라도 대통령의 어록語錄을 국민들에게 외우게 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국민들이 대통령을 싫어할 것이다”라고 했더니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2월 23일 밤이었다. 돌아가던 발전기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갑자기 정지했다. 크랭크 케이스 카버가 깨지며 유증기(Oil mist)가 연기처럼 뿌옇게 쏟아져 나왔다. 피스톤 크라운이 절단되었던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SMS(Safety management system), Engine maintenance program, Machinery history Record, 같은 안전 정비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기관의 운전 시간이나 부품의 사용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노후선일수록 더욱 그랬다. 중고선中古船을 인수하면 대부분 옛날 기록을 없애버리기 때문이었다. CMS(Continuous Machinery Survey) 가 있어 중요 기기는 매 4년마다 한 번씩 개방 검사를 받았지만 부품의 사용시간은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운전 중에 발전기 피스톤이 절단되는 어처구니없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오션그린 호는 냉동화물선이라 발전기가 3대였다. 2대로 불안하게 냉동기를 돌리며 마닐라 항에 입항했다. 마닐라 항에 입항 하자마자 로크 암(Rock arm)등 손상된 부품을 수리하기 위해 육상 공장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왔다. 12월 24일 밤이었다. 밤중에 또 소동이 벌어졌다. 기관실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기관실 창고에 있던 도둑을 잡아서 본선 경비원(배의 안전을 위해 고용한 현지인)에게 인계했다. 그런데 도둑이 경비원을 뿌리치고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도망을 가버렸다. 사실은 도둑과 한 통속인 경비원이 슬쩍 놓아주었던 것이다. 현문을 지키는 경비원이 도둑을 모를 리 없었다. 옆에는 승감(乘監 : 세관원)도 있었는데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도난품 조사를 해보니 하필이면 당장 오버홀을 해야 할 발전기 부속품이 많이 없어졌다. 피스톤 링, 베어링 등. 나는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둑을 놓치지만 않았으면 잃어버린 부속품을 되찾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화가 나서 경비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너도 한 통속이지? 일부러 놔 주었지? 누군지 알지? 잡아 와. 경비가 하는 일이 뭐야? 놓아준 도둑 못 잡아오면 잃어버린 부속품 값 모두 너희 회사에서 물어내야 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목을 잡고 흔들자 경비원이 캑캑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옆에서 승감이 그만하라고 말렸다. 나는 세관에게도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왜 보고만 있었어? 너희들 다 한 통속이지?”

내가 화가 나서 펄펄 뛰고 있는데 지프차가 한 대 왔다. 건장한 세관원이 여러 명 타고 있었다. 배에 올라오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달랑 들고서는 지프차에 태웠다. 나는 근처에 있는 본부 세관 (Customs H/Q) 영창에 갇혔다. 살인미수 죄라고 했다. 경비원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는 것이었다. 분통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갇힌 몸이 바락바락 악을 쓸 수도 없었다. ‘민나 도루보!’라는 일본말이 생각났다. 모두 한 통속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고 했는데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침에 과장이라는 사람이 출근해서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기분은 알겠다. 하지만 경비원의 목만 심하게 조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잃어버린 부속품은 조사를 해 보겠으니 진술서에 서명해라. 찾게 되면 언제라도 대리점을 통해 연락해 주겠다.”
그는 내가 말한 대로 타이프라이터로 영문 진술서를 작성해 주었다.    
 

Republic of the philippines
City  of  Manila
AFFIDAVIT
 

I, KIM JONG CHAN, 32 years of age, a korean national, chief engineer of the vessel MV OCEAN GREEN, after having been duly sworn to in accordance with law do hereby depose and say.
 

That on or about the 24th day of December 1980, at approximately 03:00 in the morning the engine store room was ransacked by about four or more persons while the vessel is on docked at pier 15, south Harbor Manila.
 

That seven (7) sets package of brand new piston ring for generator engine were taken by the ransackers.
That one of our crew took hold of the perpetrators and turned him over to the security guard on board.
That after a few minutes, the suspects were gone together with the loot.
 

 That we confronted the security guard but he denied to have received the person of the suspects.
That I am executing this in order that proper action be taken to our complaint.
Done this 24th day of December 1980 at National Customs police Head-quarters, South Harbor, Manila.
 

KIM JONG CHAN (Signature)
Affiant
Subscribed and sworn to before me this 24th of December 1980, South Harbor, Manila.
(Signature)
Administering officer

                                                    
그는 겸손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속으로는 내 입장을 아주 딱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가톨릭교도인 성싶었다. 지프차로 나를 직접 배에까지 태워다 주고 떠날 때 말했다.
“Merry Christmas!”
 

절단된 발전기 피스톤과 잃어버린 부속품을 긴급으로 청구해서 받느라고 마닐라 항에서 3일간이나 대기했다. 부속품을 받자마자 출항하여 수리작업을 시작했다. 조립이 끝나고 시운전을 했다. 엔진은 이상이 없는데 이번에는 병렬이 되지 않았다. 점심도 굶고 배전반을 점검했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기관장이 모르니 주배전반의 전기 회로를 보고 고장 개소를 찾을 수 있는 실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 무렵에야 ACB 회로의 저항이 소손된 것을 발견했다. 저항을 교환하고 병렬을 시도했으나 금방 저항에 열이 났다. 꼬박 40시간을 뜬 눈으로 보내고 냉수로 배를 채웠다. 설상가상으로 파도가 거칠어져 선체를 통나무 흔들 듯 마구 흔들었다. 너무 지쳐서 그냥 아무데나 드러눕고만 싶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배전반에 달라붙었다. 밑에서 위로 바라보니 탄 코일이 보였다. NVT(No voltage trip) magnet coil이 소손되었던 것이다.

‘머리 숙이면 보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NVT 마그네트 코일과 저항을 교환하니 그제야 병렬이 되었다. 며칠 동안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거리다가 발전기 수리를 마치고 나니 마음에 병이 난 모양이었다. 그 동안에는 아파도 아파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식욕도 없고 온몸에 열이 났다. 입술도 부풀어 오르며 부르텄다. 정말 아파서 드러누울 것만 같았다.    

지금쯤은 교대를 하고 편안하게 호텔에 묵고 있을 시간인데 또 한 항차를 더 하게 되었다. 후임자가 탑승한 싱가포르 에어라인이 김포 공항을 출발했다고 해서 이제야 집에 가는구나 하고 가방을 다 싸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광주 상공에서 기체에 이상이 생겨 김포로 회항했다는 것이 아닌가. 훨훨 날 것만 같던 마음이 금방 신경성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숨이 막힐 것같이 답답했다. 항로는 싱가포르에서 중국 선터우汕頭였다. 남중국해의 겨울 날씨는 올라갈 때는 계속 앞바람이다. 거친 파도가 뱃머리를 후려칠 때마다 선체는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몸서리를 쳤다. 하도 험한 꼴을 많이 당하다보니 이제 ‘기왕 버린 몸’ 이라 두려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신경성 소화불량으로 자꾸만 헛구역질을 했다. 
- 비행기 고장도 같은 사람들에게 두 번씩이나 일어나지는 않겠지! 이제 정말 한 항차만 남았다. 참고 견뎌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마지막 항차에는 다행히 아무 사고도 없었다. 
1월 31일, 나는 싱가포르에서 싱가포르 에어라인을 타고 김포 공항으로 귀국했다. 승선 4개월 만에 하선하려던 것이 10개월이나 더 붙잡혀 1년 2개월이나 근무했다.
환난여옥患難如玉
대학을 졸업할 때 은사님이 주신 말씀이다. 
“앞으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모진 고생을 하더라도 젊을 때의 환난은 거친 돌을 갈고 다듬어 옥을 만드는 수련기간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견뎌라!”
오션 그린 호에서 보낸 1년 2개월 동안 하루도 맘 편한 날 없는 근심과 사고 연속의 나날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고난의 세월이 내 인생을 단련하는 시간들이었다.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