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해운업계에 몸을 담그게 되면 아마 누구나 해운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박 운송과 해운업의 경기 사이클(shipping cycle)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필자 역시 해운업계에 입문하면서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보다 깊은 지식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해운기업의 역사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한 참고서를 찾아 보기는 어려웠다. 지난해 노르웨이 출장 중 우연히 접하게 된 호엑(Leif Høegh & Co.)이라는 노르웨이 선사에 관한 책 ‘HOGH Shipping through cycles’은 나의 갈증을 풀어주는 좋은 책이었다. 긴 역사를 가진 노르웨이의 선발 해운사의 부침과 더불어 해운업의 특성, 또 해운 경기 사이클 등 필자가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많은 의문들을 해소시켜 주었다. 여기서는 호엑사의 기업사를 훑어 보고 해운업의 경기 사이클에 대해서도 논해 보고자 한다.

 
2. 노르웨이 해운사 호엑
-설립

라이프 호엑(Leif Høegh)이 호엑사를 세우고 사업을 시작하던 1920년대는 1차 대전 후 디플레이션을 겪으며 선박의 과잉공급으로 많은 선박이 폐선되던 시기였다. 또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이고 석유가 에너지원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노르웨이의 선사들은 원유 수송에 뛰어 들기 시작했고 호엑도 1927년 유조선을 발주할 생각으로 평생의 멘토인 덴마크의 선박왕 뮐러(A.P.Møller)에게 조언을 구했다. 뮐러는 “가급적 빨리 너의 사업을 시작하라. 그것이 내가 당신의 나이에 한 것이고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라고 조언한다. 호엑은 자금을 모아서 디젤 엔진을 갖춘 8,200tdw(=dwt)의 소형 유조선을 주문했다.

노르웨이 언론은 유조선의 과잉공급을 들어 호엑을 비난했지만 1929년 호엑의 첫 유조선 바그(Varg)는 NOK(노르웨이 크로네) 478,000의 이익을 낸다. 호엑은 1930년 13,750tdw의 두 번째 유조선을 발주하며 10년간 TEXACO에 장기용선계약을 맺게 된다.
1933년은 호엑에게 적은 비용으로 선대를 확장하는 좋은 기회였으며, 유조선에 이어서 건화물 선박을 구입하여 비즈니스를 다각화하게 된다. 호엑은 1935년까지 3대의 건화물선을 구입하였고 1937년까지 탱커의 선대를 두 배로 확장한다. 호엑은 화물 정기선 운송사업(cargo liner services)으로도 손을 뻗치게 된다. 탱커는 단기적인 이익을 얻게 해 주지만 정기선 운항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원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1930년대의 경기 불황 가운데 국제유조선선주협회(International Tanker Owners Association Ltd.)가 1934년 5월2일에 발족하였다. 이 기구는 석유 회사들이 탱커 풀(tanker pool)을 이용하도록 도모하고 계선을 할 경우에는 보상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1936년 6월에는 해양상선법(Merchant Marine Act)이 제정되는데 이것은 미국이 국적선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주요 무역항로의 운항을 맡기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 법은 호엑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었다. 호엑은 영국의 파트너로 실버자바태평양 항로(The Silver Java Pacific Line)의 국제정기운항에 참여하게 된다.
1930년대 말까지 내연기관 선박들이 종전의 스팀선을 대체하였으며 많은 건화물 교역이 정기선운항으로 바뀌게 된다. 노르웨이는 세계 선대의 7%를 차지하며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선사국이 된다. 호엑은 1939년 43세의 나이로 8척의 유조선과 5척의 건화물선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노르웨이는 당초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에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노르웨이의 상선은 독일의 공격을 받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3700명의 선원과 594척의 선박을 잃었다. 작은 나라로서는 큰 피해였다. 14척의 호엑의 선단 중 6척도 침몰하였다. 이 가운데 호엑머천트호(Hoegh Merchant)는 호놀루루로 항해하던 중 일본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한다.

2차대전 중 독일은 노르웨이를 정복하고 노르웨이의 선주와 선원에게 독일에 협조할 것을 강제하였다. 호엑은 비밀리에 해운저항운동에 참가한다. 그러던 중 런던에 있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전후의 복구를 위한 UMA(United Maritime Authority)라는 조직의 책임자로 임명이 된다. 호엑은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을 한 이후에는 영국에 있는 UMA 사무실에 노르웨이의 대표로서 약 1년간 일하였다. 노르웨이로 복귀할 때까지 런던에 있는 기간은 호엑에게 노르웨이와 영국의 정계, 해운업계의 리더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전후 회복기 (1946-1974년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마샬플랜(American Marshall Aid Program)으로 220억 달러의 자금을 서유럽의 전후 경제회복에 투입하였다. 서유럽에 재건의 붐이 일어났다. 독일과 일본은 다시 경제강국으로 부상할 기회를 잡게 되고 경기가 활성화된다. 첨단기술로 무장된 대형선박과 낮아진 용선비는 경제적인 부흥을 타고 해상 운송의 규모를 큰 폭으로 키웠으며 1946년에서 1970년까지 6배로 성장하게 된다.
1948년부터 해운 경기가 점차적으로 하강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경제가 다시 호전되었다. 호엑은 전후 경제부흥을 바라보며 정기선에 투자를 하였다. 그리고 32,000tdw의 대형탱커를 주문하였다. 1954년 8월 호엑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전쟁의 호황으로부터 얻은 경험은 시장 추세를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경기가 하락하는 시장에서는 매매와 용선에 대해 신속히 대응해야 하지만 성장하는 시장에서는 용선 확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호엑사의 침몰된 6척의 선박과 43명의 선원 추모 명판
호엑사의 침몰된 6척의 선박과 43명의 선원 추모 명판
해운 시장은 1954년에 바닥을 쳤다. 호엑은 한국전의 교훈을 상기하여 1955년에는 세 척의 32,000tdw 선박을 주문하고 1959/60년에는 탱커선단의 장기용선계약을 한다. 1958년 호엑사는 노르웨이의 제2의 선사가 된다. 그리고 선대를 원유/광물복합선(combined oil/ore-carrier)과 벌크(bulk)선으로 다각화시켰다.
1967년에는 세계적으로 선단이 공급 과잉의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7일만에 끝났지만 수에즈운하는 8년 동안 문을 닫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동에서 유럽으로 가는 항로는 70%나 더 길어지게 되고 용선자들은 안정적인 수송선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200,000tdw 이상의 탱커의 주문이 늘어나게 되며 해운업계는 호황을 맞게 된다. 1970년은 해운업이 피크에 이른 해가 되었다. 호엑은 VLCC 대신에 원유/광물복합선, 자동차/벌크선, 자동차 운반선, 가스운반선 등, 20척의 선박을 주문하면서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자동차의 경우 1950년대에 독일의 폭스바겐사가 급성장을 하면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수출이 활기를 띠게 된다. 그리고 귀환 항로에 적절한 화물을 싣고 오기 위하여 자동차/벌크 복합선을 주문하였다.

호엑의 정기선은 변화하는 시대에 안정성을 주는 사업이었다. 미국과 유럽을 잇는 실버 태평양 항로 사업(Silva Pacific line service)에 이어 1951년에는 미국과 아랍을 잇는 미국-걸프만/인도항로(US-Arabian gulf/ India service)의 사업을 시작한다. 특히 서아프리카 항로(West Africa Line)는 호엑에게 이익을 주는 사업은 아니었지만 장기적으로 그 지역을 개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 당시 서아프리카 협회(West Africa Lines Conference (WALCON))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아프리카 지역의 서방 파워로 인하여 가입이 힘든 시기였다. 호엑의 서아프리카 협회 가입은 노르웨이라는 작은 국가의 선주로서 얻은 쾌거였다.

호엑의 경영 방식도 바뀌게 된다. 호엑은 매일 아침 10시에 참모 미팅을 주관하였다. 미팅 전에는 매일 운송 상태를 보고받고 로이드 보험사의 리스트와 중개상의 전통문을 읽고, 미팅을 하는 가운데 서로 질문을 하고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결정된 사항은 각 부서의 매니저에게 하달이 된다. 창업자의 경영방식에서 전문경영자의 경영방식으로 사업 운영 방식이 바뀐 것이다.
 
-오일 쇼크와 불황기 (1974-1987년대)
1973년과 1979년의 두 번에 걸친 오일파동은 세계경제를 불황으로 몰았으며 서방세계의 산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과 서부유럽에서는 탈산업화가 진행되었으며 생산의 중심은 대만과 한국으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유정의 개척, 짧아진 항로와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은 1978년을 기점으로 하여 석유 운송이 줄어들게 하였다. 더욱이 변동금리와 환율의 요동은 선주들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1979년과 1983년 사이에 해운업계는 커다란 공급 과잉을 겪으며 깊은 불황에 빠져 들었다. 

 
-회복기와 세계화 (1987년 이후)

1987년에서 1990년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가 정립되며 경제가 회복되면서 해운업계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저가 운송과 기준 이하의 선박들로 인하여 많은 해상 사고가 일어났다. 특히 기름 유출과 오염 사고는 미국과 유럽에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가 되었다. 마침내 1990년에는 미국의 석유오염방지법(Oil Pollution Act)이 제정되었으며 오염을 일으킨 선주에게 재정적인 책임을 부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탱코(Intertanko)는 벌크선에 대하여 더 높은 강도를 가진 선박의 설계를 요구하게 되었다. 숙련된 선원의 부족을 겪으면서 호엑은 노르웨이인 외의 외국선원을 고용하고 교육하게 이른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호엑은 2세대 경영을 거쳐 3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설립자 라이프호엑(Lief Høegh)

호엑은 심근 경색으로 1974년에 사망할 때 그의 선대는 43척으로 노르웨이에서 5번째의 대형 선주가 되었다. “불황은 해운업의 속성이다”(“Depressions are inherent to the shipping business”)라는 그의 생각이 늘 경제 사이클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호엑이 동시대의 다른 선주들과 달랐던 점은 경제이론과 해운 사이클에 대하여 지속적인 연구를 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탱커에 투자하였으며 동시에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얻은 이익을 탱커가 아닌 다른 선박에 투자하였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아내 페니가 35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첫 아들은 뇌기능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인터내셔널리스트(internationalist)로서 자유무역을 지지하였던 호엑은 골프와 사냥, 요트를 즐기며 정치인, 은행가, 산업계 등 다양한 분야의 리더들과 친분을 유지하였고, 노르웨이 해운산업에 많은 공로를 세워서 1964년에는 노르웨이 왕 오라프5세 (Olav V)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3. 해운 경기 사이클
해운사 호엑은 많은 해운경기의 사이클을 경험하였다. 초창기에는 해운경기가 바닥을 치자 석유가 주 에너지원이 되면서 원유의 수송이 늘어나 해운경기를 살렸다. 잘 나가던 사업은 생각지도 못한 제2차세계대전으로 시련을 겪지만 전후 경기가 회복되었다. 잠시 호황을 누리는가 싶더니 해운경기는 다시 침체되기 시작했는데 한국전쟁이 터져 경기는 다시 회복되었다. 선단의 과잉공급으로 해운경기가 바닥을 치고 어려움을 겪지만 중동전쟁으로 다시 해운업계는 호황을 맞이한다. 호엑은 “불황은 해운업의 속성이다” 라고 말하며 해운 사이클을 잘 극복하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해운 사이클은 해운업의 속성인 것이다.

 
-수요-공급설
해운 경기 사이클에 대한 가장 호소력이 있는 이론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해운 경기 사이클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선박의 수요가 커지면 선박의 과잉 주문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불황이 온다는 것이다. 해운 사이클은 대략 7년의 주기로 나타나지만 정치 경제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띄며 무엇보다 사람의 심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해운 사이클은 플레이어의 기술, 운 그리고 심리전으로 승부하는 포커에 비유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2]
해운 사이클로 인한 여러 해의 어려움은 해운 경기의 회복으로 메워진다. 여유가 있는 선주는 가뭄을 이겨내지만 그렇지 못한 선주는 고사하는 위험을 안는다. 해운인은 이러한 해운 사이클을 예상하면서 새로이 형성되는 세계경제의 요인들을 잘 해석하며 끊임없이 불황에 대처해야 한다.

수요-공급설은 해운경기사이클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는 이론을 제공하지만 충분한 설명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해운 경기는 다른 산업이나 국가경제에 비해 사이클의 진폭이 크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필자는 “소채찍효과(Bull Whip Effect)”라는 공급체인관리(supply chain management )의 이론을 적용하면 해운경기의 커다란 진폭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채찍효과설 (Bull Whip Effect)
채찍을 휘두를 때 손잡이 부분을 조금만 움직여도 채찍의 끝은 크게 움직이게 된다. 이러한 증폭 현상은 공급 측면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자율 변화나 정치적인 변화가 소비에 작은 요동을 일으키게 되면, 공급 고리의 단계마다 증폭이 되어 공급 측면의 끝에 있는 원자재 공급자는 매우 큰 폭의 물량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급 고리에 있어서 소비자에 가까이 있는 공급자는 소비자 요동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느끼지만 소비자와 멀리 떨어져 있는 다운스트림(downstream)의 공급자는 수요의 진폭을 크게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장에 생산장비(equipment)를 납품하는 업체는 공급체인에 있어서 제일 하위에 위치하게 되므로 최상위에 있는 소비자의 작은 미동으로도 큰 폭의 경기변동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해운 사이클도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 해운업은 다운스트림에 있는 공급자의 위치에 해당되며 정치, 사회, 경제의 작은 변화가 해운의 수요자인 생산자들에게 경기 변동을 일으키고 이것은 증폭되어 해운업계에 큰 폭의 영향을 주며 요동을 치는 듯한 해운 경기 사이클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4. 마무리하며
호엑은 해운업을 시작한 뒤 줄곧 정치 경제적인 변화와 이로 인한 해운 경기 사이클을 겪으며 성장해 왔다. 호엑은 탱커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선대의 다각화, 장기용선계약 그리고 정기선 항로를 개척하며 경기 사이클을 극복하였다. 때로는 생각지도 않던 중동전과 한국전 등으로 호황을 맞기도 하였다. 호엑은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경제 사이클을 읽으며 선대를 다양화하고 해운업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하였다.

해운선사 호엑의 책을 읽으면 “톤수의 과잉공급(oversupply of tonnage)”이라는 말이 자주 나타난다. 선박의 과잉공급은 지금뿐 아니라 1920년대에도, 그 이후에도 줄곧 일어났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호엑은 해운 사이클은 세상의 경제가 돌아가며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이고 해운경제의 생리라고 생각하였다.
선박 운송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이었던 필자에게 호엑이라는 노르웨이 선사에 대한 책은 나름대로 해운업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호엑이 인생을 마감한 1974년도에 이사회에 보낸 새해 인사말은 해운사의 운영이나 경기 사이클에 대처하는 그의 경영 철학을 알려 준다.
“새해의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느껴집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오직 이것입니다. 운송할 화물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우리의 주된 의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적인 상황은 언제나 그래 왔듯이 늘 변화합니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며 이제 다시 시험대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많은 직원들은 특히 이런 역경의 시기에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1.HOEGH Shipping through Cycles, Dag Bakka Jr., Kagge Forlag As, Oslo, 2008. (호엑의 기업사)
2.MaritimeEconomics.3rdEdition,MartinStopford,Routle
 dge,LondonandNewYork,2009.(해운경기의 수요-공급설)
3.ClockSpeed,CharlesH.Fine, Basic Books, New York, 1998. (공급체인관리의 소채찍효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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