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여 슬퍼 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1974년 김추자 첫 취입…이듬해 정훈희, 칠레국제가요제 입상
록 블루스 고고풍…가수 현미, 2014년 1월 ‘무인도’ 악보 도난

파도여 슬퍼 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 말아라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해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아 캄캄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해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아 캄캄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경남 통영에 있는 무인도 소지도 전경
경남 통영에 있는 무인도 소지도 전경

대중가요 ‘무인도(無人島)’는 1970년대 가요지만 그렇게 묵은 맛이 안 든다. 가사와 멜로디가 세련됐다는 평이다. 4분의 3박자, 록 블루스 고고 풍으로 경쾌하면서도 어떤 대목에선 무게가 있어 노래흐름에 균형이 잡혀있다. 

이종택 작사, 이봉조 작곡, 정훈희가 부른 ‘무인도’는 1974년 김추자가 맨 먼저 불렀다. 정훈희가 칠레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면서 그녀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칠레가요제에 김추자가 나가는 것을 이봉조 아내인 현미가 반대해 정훈희를 데려갔다는 얘기가 전해져온다. 김추자는 그 무렵 국내 최고인기여가수로 이봉조와 염문설이 나돌았다. 이런 사연으로 정훈희가 1975년 칠레가요제에 나가 3위 입상과 함께 작곡상, 인기상까지 받았다. 정훈희가 무대에서 스페인어와 우리말로 이 노래를 부를 때 작곡을 한 이봉조가 지휘를 해 눈길을 모았다. 정훈희 무대의상은 이봉조 선생의 요청으로 한복이었다. 
 

칠레 대통령, 입원한 정훈희에게 위로화환
칠레가요제 에피소드로 정훈희가 가요제 직후 음식과 기후 등이 맞지 않아 병원신세를 져야했다. 아우구스트 피노체트 당시 칠레 대통령은 장출혈과 신경쇠약으로 입원한 정훈희에게 위로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무인도’는 후배가수들도 리메이크해 부를 만큼 생명력이 길다. 2012년 5월 20일 방송된 MBC ‘일밤-나는 가수다 시즌2’에서 A조, B조 하위권을 차지한 6명의 가수들이 ‘고별 가수전’을 펼치면서 박미경이 불렀다. 박 가수는 초등학생 시절 정훈희가 한복을 입고 이 노래를 열창하는 모습에 가수 꿈을 꿨고 결국 ‘나가수’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가요계의 원조 디바 박미경은 노래를 열창, 데뷔 27년차 가수로서의 원숙함을 보여줬다. ‘무인도’는 인순이 등도 취입했다. 2013년 9월 가수 현미(1938년생)가 ‘무인도’를 불러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서 2011년 8월 27일 토요일 밤 7~9시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묘역 옆 잔디밭 특설무대에서 3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노무현 대통령 탄생 65주년 기념 봉하음악회’ 때도 정훈희가 초대가수로 ‘무인도’를 불렀다.

이 노래에 얽힌 또 다른 에피소드로 ‘악보 도난사건’이 있다. 2014년 1월 19일 오후 서울 동부이촌동 현미씨 집(아파트)에 도둑이 들어 남편이 작곡한 ‘무인도’ 악보, 생전에 썼던 펜 등을 가져가버렸다.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금고에 보관해왔던 것으로 가짜보석 등과 함께 털린 것으로 알려져 흥미롭다.
이봉조(1932년생)는 1987년 8월 31일 무대에서 내려오다 계단에 넘어져 말 한마디 못하고 5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고인은 박춘석, 길옥윤 등과 함께 196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우리나라 대표적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경남 남해출신인 그는 주한 미8군 나이트클럽에서 ‘이봉조 악단’을 결성, 연주했다. 1962년에 발표한 ‘밤안개’가 현미가 불러 빅히트하면서 작곡가로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가 발표한 노래들은 당대 톱가수들에 의해 공전의 히트를 했다. ‘밤안개’(현미), ‘맨발의 청춘’(최희준), ‘무인도’, ‘꽃밭에서’(정훈희) 등이 있다. 그는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무인도가 실린 LP 음반
무인도가 실린 LP 음반
그는 가수 현미와 결혼하면서 당대의 스타커플로 화제를 모았다. 이봉조-현미 부부는 아들(가수 고니, 이영곤), 조카(가수 노사연, 탤런트 한상진), 며느리(가수 원준희) 등이 연예계에 진출하면서 연예인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무인도’를 부른 정훈희는 1951년 부산서 5남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나 음악가집안에서 자랐다. 피아니스트 겸 가수였던 아버지(정근수), 밴드마스터였던 작은 삼촌(정근도), 기타리스트 및 색소폰연주자인 오빠(정희택, 정운택 등 4명), 가수인 여조카(J, 정희택 딸)가 있다.

그는 부산여상을 다니던 1967년 오빠 소개로 이봉조를 만나 ‘안개’를 취입, 가수로 데뷔했다. 16살 때였다. 비음(코소리)의 미성을 가진 정훈희는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뒤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데뷔 후 ‘강 건너 등불’ ‘별은 멀어도’ ‘사랑이 미움 되면’ ‘꽃길’ ‘꽃봉투’ ‘그 사람 바보야’ ‘풀꽃반지’ ‘나오미의 꿈’ ‘진실’ ‘빗속의 연인들’ 등 히트송을 쏟아냈다.

1970년대 음악팬들 관심을 끈 국제가요제에 첫 입상자이자 상을 가장 많이 받은 가수다. 1970년 42개국이 참여한 일본 도쿄 야마하가요제에서 ‘안개’로 입상했고 이듬해 그리스국제가요제에선 ‘너’를 불러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치고 유일하게 상을 받았다. 1972년엔 또 한 차례 도쿄 야마하에서 ‘좋아서 만났지요’로 가수상을 받았고 1975년 칠레가요제에선 ‘무인도’로 3위와 최고가수상을 받았다. 이들 곡은 모두 이봉조가 작곡했다. ‘꽃밭에서’는 1979년 다시 참가한 칠레가요제 입상곡이다. 최고가수상을 받았지만 대마초파동으로 조용히 다녀와 이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는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얽혀 방송출연정지를 당했다. 1년 뒤 풀리긴 했으나 재기무대가 순탄치 못했다. 미모 덕분에 가수 배호와의 염문설 등 스캔들도 있었다.

그는 1980년 록밴드 ‘라스트찬스’ 리더 김태화씨와 약혼했고 성격차이와 정훈희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재결합, 1983년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과 음악활동을 다시 시작해 1989년 둘째아이를 가진 만삭상태에서 듀엣으로 녹음한 ‘우리는 하나’를 내놨다. 데뷔 30여년 만인 2008년 오랜 준비 끝에 ‘삐삐코로랄라’, 인순이와 호흡을 맞춘 ‘No love’ 등이 실린 ‘40주년 기념앨범’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엔 2900여개 무인도 있어
노래 ‘무인도’는 어떤 곳이며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 이 곡은 사람의 삶을 무인도와 파도, 태양 등에 접목시켜 만들어졌다. 가사 속에 나오는 고독, 침묵, 사랑도 같은 맥락이다. 무인도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만조 때 수면 위로 드러나는 자연적인 땅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을 말한다. 국제법상 한 세대만 살아도 무인도로 본다. 조선시대엔 하급관리인 고자(庫子)가 쌀을 70섬 이상 축내면 무인도로 귀양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엔 2900여개의 무인도가 있다. 섬이 가장 많은 전남이 국내 무인도의 60%에 가까운 1700여개가 있다. 무인도는 소유주에 따라 국·공유지와 사유지로 나뉜다. 현재 순수국유지가 1320여개, 지방자치단체와 공사 등의 공유지가 1270개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면적으로 보면 61%가 사유지다. 일부 무인도는 풍광이 좋고 임야 등 활용도가 높아 감정가보다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간암도(2만5431평)는 2009년 경매 때 감정가(5885만원)의 5.6배인 3억3000만원에 팔렸다. 정부는 ‘무인도서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2008년 2월부터 시행 중이다. 관리유형 지정대상 무인도들이 이 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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