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만난 한반도의 어제와 오늘

9월 18-23일 ‘바다의 날’ 기념 제 19차 선상세미나
대련, 여순감옥, 백두산, 고구려 유적, 압록강 등 탐방


세월호 참사로 인해 미루어졌던 ‘바다의 날’ 기념 제 19차 선상세미나 및 백두산 고구려 문화탐방행사가 9월 18일부터 23일까지 5박 6일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해운항만물류업계 임직원 및 가족·단체 130여명이 참석했으며 대인훼리의 ‘대인’호에서 선상세미나를 갖고 대련을 기점으로 단동·집안의 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 등 대표적 명소를 둘러보는 숨 가쁜 여정이었다. 한반도의 숨은 역사와 문화를 찾아 떠나는 백두산 및 고구려 문화탐방기를 적어본다. 

대인호 탑승
대인호 탑승
 
9월 18일-인천항에서 대련항까지 16시간
이번 여행은 대인훼리의 ‘대인’호를 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해사문제연구소의 명찰을 단 130여명의 일행을 실은 1만 2,365톤급 ‘대인’호는 오후 5시경 인천항을 출발했다. 인천항에서 대련항까지는 카페리로 약 16시간 거리다. 출항 20분쯤 지나자 선상에서 멀리 인천대교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노을이 번지는 멋진 풍광이었다.

석식을 먹은 후 간단한 다과와 함께 선상세미나가 열렸다. 건국대학교 중문과 이수웅 명예교수의 중국문화와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 진지하고 차분한 강의가 진행됐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광개토대왕 비문의 논쟁, 백두산과 우리 민족의 역사 등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준 시간이었다. 숙소였던 다인실은 다소 답답하고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다행히 날씨가 흐리지 않아 배의 흔들림은 거의 느끼지 못하였다. 선내의 왁자지껄한 들뜬 분위기가 밤 늦게까지 이어지면서 낯선 소리에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야 했으나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 못 드는 괴로움을 진정시켰다.
 
선상세미나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수웅 교수
선상세미나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수웅 교수


9월 19일-항일지사의 혼이 서린 여순감옥
아침 9시경 ‘대인’호가 대련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대련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도시임을 엿볼 수 있었다. 한창 건설 중인 고층빌딩과 대형쇼핑몰이 눈에 띄었으며 잘 정비된 도로와 가로수 등으로 깨끗한 신도시의 이미지를 주었다. 날씨는 한국과 비슷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대기 중인 전용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리자 첫 탐방지인 여순감옥에 도착했다.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감옥으로 유명하다. 러시아가 1902년 최초로 감옥을 건설했으나 러일전쟁 후 일본군이 점령한 뒤 증축되어 감방 275개로 2,000여명을 수감했다고 한다. 현재는 역사유적지가 되어 일반인들에게 전시관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이날 감옥 입구에는 한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간단한 보안검사를 거쳐 한국어 안내 표지판을 따라 좁은 복도로 이동하자 여순감옥의 수감생활을 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검신실, 감방, 고문실, 사형장, 강제노동소 등 항일지사들이 일제의 무자비한 박해를 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순감옥 앞에서 단체사진
여순감옥 앞에서 단체사진

안중근 의사의 독방에는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여순감옥에 투옥된 후 처형됐다. 옥중에서 자서전 안흥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하던 안 의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교수형을 당한 곳에는 모친이 가져온 수의를 입고 의연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한 안 의사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특별 기념관에는 안 의사의 유품과 서예 등이 전시돼 있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안 의사 뿐 아니라 신채호 선생(1880-1931), 이회영 선생(1867-1932)도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다 순국했다.

개인적으로 여순감옥 하면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만 떠올렸는데 막상 이 곳에 와보니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중국의 무수한 항일지사들이 똑같이 감옥에서 고통을 받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중국도 우리와 비슷한 침략의 아픔을 겪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들어올 때와 달리 차분한 마음으로 감옥 밖으로 나가는 길, 교도소의 붉은 담장과 철조망 너머 파랗고 화창한 가을 하늘이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9월 20일-생명력의 기이함, 이것이 백두산이다
“따르르릉” 새벽 4시 호텔방에 모닝콜이 울렸다. 어제 여순감옥을 견학한 이후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려 통화지역의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서다. 8시간 이상을 버스만 타서 파김치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오늘의 탐방지는 바로 민족의 명산인 백두산 천지다. 천지를 오르는 길은 3가지 코스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북파코스로 여기서 이동하려면 최소한 5시간 이상이 걸린다. 빵과 우유의 간단한 도시락을 챙겨 아침 일찍 전용버스에 올라탔다.

백두산
백두산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창밖을 내다보면 온통 옥수수밭 천지다. 곳곳에 예쁘게 물든 단풍이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흰 자작나무와 탄광촌, 쓰러져 가는 가옥 등도 눈에 띄었다. 강원도 농촌과 같은 시골길을 끝도 없이 달리다 보면 가끔 허름한 휴게소가 나오는데 화장실이 차마 이용하기 곤란한 느낌을 주어 한 번 경험한 이후로는 웬만하면 차 안에서 물을 마시지 않게 됐다. 

높이 2,750m의 백두산은 말 그대로 ‘흰 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화산활동으로 부식토가 산 정상에 하얗게 쌓여 붙여진 이름이며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백두산을 장백산 신으로 봉한 이후에 '장백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백두산에 간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천지를 봐야할 텐데...’였다. 이름처럼 백 번에 두 번 볼까 말까할 정도로 보기 힘들다고 한다. 날씨가 맑아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두산 입구에 다다랐는지 공사 중인 펜션과 상점건물 등이 창밖으로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백두산 입구는 잘 꾸며놓은 국립공원 혹은 거대한 놀이동산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국인 뿐 아니라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명산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입장권 카드를 제시하고 줄을 서서 전용버스를 차례로 탑승했다. 버스는 잘 정비된 아스팔트길을 따라 재빠른 속도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로 옆의 숲은 그 자체가 천연 식물원으로 호랑이, 노루, 멧돼지, 반달곰 등 야생동물과 야생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 ‘ECO’라는 글귀와 자연보호 팻말이 눈에 띄었으며 1,500미터쯤 올라왔을 때는 귀가 멍멍해져 침을 삼켜야만 했다.

20분 정도 올라왔을까 드디어 백두산이 검은 산자락의 위용을 드러냈다. 영화 <트랜스포머>처럼 금방이라도 로봇으로 변신할 것만 같은 긴장감에 더해 <반지의 제왕>에 나온 거대종족의 도시에 들어온 느낌에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날씨가 돌변했다. 그토록 맑았던 가을하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고 카메라를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휴게소에서 산 12원짜리 우의를 가방에서 꺼내 대충 걸쳐 입었다.

백두산의 풍경은 기이함 그 자체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고 1년 내내 쏟아진다는 비룡폭포(장백폭포)의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울렸으며, 뿌연 김이 펄펄 나는 유황온천지대는 특유의 달걀 썩은 냄새로 코를 자극시켰다. 멀리 산머리에는 흰 눈이 쌓여 있고 발 밑에는 이름 모를 노란색 야생화가 피어나 있었다. 사계절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듯 황홀한 느낌은 백두산에 UFO라던가 정체불명의 괴생물이 나타나도 전혀 낯설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추위가 점점 몸 속에 스며들고 있을 때쯤 ‘이제 천지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가이드에게 물었다. 웬걸, 눈 때문에 도로가 얼어붙어 천지까지 가는 지프차가 운행하기 어렵다는 맥 빠진 답변이 돌아왔다. 갑자기 천지에 대한 알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산입구로 돌아가니 마치 백두산이 요술을 부린 듯 날씨는 다시 화창해져 입고 있던 우의를 벗어 던졌다.
 

9월 21일-산성의 나라 ‘고구려’
고구려 유적지를 탐방하는 날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연한 가을 날씨가 야외탐방에 딱 이었다. 통화에서 고구려 유적지가 모여 있는 집안으로 버스는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집안은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고구려 대표 도시 국내성의 터였으며 약 1만 2,000여개의 고구려 무덤들이 발견된 곳이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동네에 위치한 광개토태왕비와 태왕릉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과정에서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공원처럼 주변경관이 잘 꾸며져 있었다. 기와지붕과 방탄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광개토태왕비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한 때 동북아시아 최대 정복군주였으나 이제는 유리장 안에 갇혀 하늘로 향한 기상이 끊긴 것 같은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비석 앞에는 중국 돈, 한국 돈 할 것 없이 복을 빈다는 뜻으로 지폐가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야성미 넘치는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돌덩이가 우뚝 솟아 있다. 인공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은 투박한 인상이다. 높이는 6.39m, 무게는 37톤으로 추정된다.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비문 4면에는 총 1,775자의 글자가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150여자다. 고구려 건국과정과 광개토태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등이 기록돼 있다.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국, 일본, 중국 간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진실을 담은 기록문이기도 하다. “옛날 시조 추모왕(주몽)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이시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라는 비문의 첫 문장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국임을 당당히 선언하고 있는 듯 했다.

광개토태왕릉
광개토태왕릉

태왕비와 가까운 곳에 있는 광개토태왕릉은 허물어진 유적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웅장한 자태가 잘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대형돌들은 사라지고 피라미드 상단부만 작은 돌들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돌계단 정상에 올라 내부를 살피자 직사각형의 돌무덤 2개가 덩그라니 남아 태왕부부의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면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수왕릉은 거의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장수왕릉은 밑변 길이가 32미터, 높이가 13미터에 이르며 네모반듯한 거대한 돌들이 피라미드식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각 면마다 거대한 받침돌이 3개씩 놓여 있었는데 현재 1개는 소실되었다.

장수왕릉
장수왕릉

이어 고구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동굴 벽화로 향했다. 오회분 5호묘는 유일하게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되는 벽화고분이다. 내부가 좁아 20여명의 인원이 줄을 서서 차례로 들어가야만 했다. 깜깜하고 좁은 동굴 안에서 손전등을 키자 고구려의 특징적인 그림이 화려한 색상으로 벽마다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현무, 백호, 청룡, 주작 4개의 사신도와 더불어 소머리신, 해신, 달신, 불신, 대장장이신. 수레바퀴신 등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으며 일부 신들의 눈은 빛나는 보석으로 박혀있었다. 바닥에는 귀족과 부인, 애첩으로 추정되는 3개의 관이 놓여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무덤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세계관을 그리고 있었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5호묘는 1,50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떤 염료를 썼는지 아직도 색감이 잘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이산화탄소가 생겨 퇴색되고 있다고 하니 제대로 된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야외에서 유적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강행군이 계속되자 허기가 급습해왔다. 압록강 근처 식당에서 석쇠 불고기로 점심을 먹고 기운을 차렸으며, 압록강변 카페에서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은 평생 잊지 못할 맛이 되었다.

환도산성
환도산성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수도 방어의 요지 환도산성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기도 하다. 해발 676미터, 총 길이 7km에 달하는 환도산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최대한 견고하게 쌓은 성으로 국내성과 운명을 같이 한 중요한 산성이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험한 곳에 산성을 쌓고 강한 적들을 물리쳤으며 장기간 농성하기 위해 우물을 만들었다. 언덕에 쌓은 점장대에 올라가자 성 안팎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웅장한 산들이 넓은 들판을 방패처럼 둘러싸 있었고, 그 앞으로 퉁구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였던 환도산성에는 이제 옥수수밭만 무성하다.

환도산성을 끝으로 단동으로 이동하는 길,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환도산 자락을 보며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하얀 뭉게구름과 구불구불 부드러운 산자락을 따라 앞에는 들판과 숲, 압록강이 펼쳐져 있다. 풀 뜯는 소와 오리와 닭떼들도 정겹다. 노 젓는 뱃사공을 태운 강물은 햇빛을 반사하며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고구려의 영화는 잠들었지만 시간은 도도하게 흐르는 듯 하다. 달리는 버스에서 오랜만에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었다.

밤이 다되어 단동 시내에 도착했다. 단동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신의주와 맞닿아 있는 접경도시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도시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집단체조를 하고 있었다. 상점과 식당의 화려한 네온싸인이 압록강에 길게 비치었다. 그러나 맞은편 북한은 암흑과도 같았다. 저녁식사는 ‘고려관’이라는 대형 북한식당에서 먹었다. 미모의 북한 아가씨들이 서빙을 하고 전통무용과 노래 등의 공연을 선보였다.
 

9월 22일-압록강과 북한
새벽 6시경, 호텔 뒤편 산책로를 걸었다. 압록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있자니 멀리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중국인? 북한사람? 알 수 없다. 어쨌든 충분히 수영으로 도달할 만한 가까운 거리에 북한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압록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이 많았으나 요즘은 북한이 인구조사를 한 달에 한번 실시해 탈북자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압록강변 북한마을
압록강변 북한마을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호텔조식으로 나온 좁쌀죽으로 배를 채우고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는 러시아 인형, 북한식 물건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유람선이라고 하기에는 허름한 보트였다. 보트가 흰 거품을 내며 한반도에서 가장 길다는 압록강 물살을 헤쳐 나갔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 머리의 색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트가 점점 북한 경내와 가까워지자 옥수수밭과 시골집, 강아지에 쫓겨 날아가는 새, 강변에서 조개를 캐는 북한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흔한 강가의 농촌 풍경이다. 북한 군인들은 우리의 손인사에 익숙하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역시 손인사로 답했다.

대련항에서 ‘대인’호를 타는 것으로 이번 여행은 끝이 났다. 집에 있는 가족을 생각나게 하는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장시간 배와 버스를 타는 것은 장거리 비행에 버금가는 고통이었으나 너무 편한 것에만 몸이 익숙해져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빠르게 발전 중인 대련과 단동,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느끼게 한 집안 등 중국의 도시들과 압록강과 북한의 모습을 생생하게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며, 1,500년 전 고구려의 흔적을 잠시나마 느낄 뿐 아니라 무심히 흐르는 시간의 영원성을 확인하는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백두산 천지에 대한 알 수 없는 갈망과 애정의 씨앗도 가슴에 심기는 순간이었다.

 

 
 
“세월호 여파 회복…국제여객선 안전시스템 남달라”
인천-대련항을 주 3회 왕복운항하는 대인훼리의 ‘대인’호는 1988년 7월에 건조된 선령 26년의 노후선에 속하지만 한중 공동으로 시행하는 엄격한 안전관리시스템을 통해 안전운항을 해오며 양국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9월 18일 저녁 ‘대인’호 브릿지에서 지난해 6월부터 ‘대인’호를 진두지휘해 온 최준우 선장을 만났다. 36년 경력의 그는 한국해양대 부설 해양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올해 17년째 여객선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인’호를 소개해 달라
‘대인(M/V DA-IN)’호는 1만 2,365톤급으로 여객정원 555명, 화물적재능력 142teu 규모의 로로선이다. 1995년 항로 개통과 동시에 첫 투입된 이래 현재까지 운항 중인 선령 26년의 배다. 선령이 오래되었어도 철저한 안전관리시스템 하에 관리가 잘 되어왔다. 내년 3월경에 선령 17년 정도의 배로 교체해 취항할 예정이다. ‘대인’호에는 현재 한국인 8명, 중국인 37명 등 총 45명의 선박직이 근무하고 있다. 화물은 전자제품, 임가공품. 농수산물 등이 주를 이룬다.
 

-세월호 사고 이후 강화된 여객선 안전관리에 대해
바다여행은 안전하다고 평가받았는데 이번에 국내선 사고가 발생해서 국제여객선까지 피해를 보았다. 세월호에서 제대로된 퇴선명령만 내렸으면 인명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그러나 국제여객선이 다르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대인’호는 국제 여객선 안전규정에 적합한 설비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매년 중국선급(CCS)과 한국선급(KR)으로부터 선박안전검사를 받고 있으며 모든 훈련, 교육, 설비를 정기적으로 일주일, 1개월, 3개월, 6개월마다 실시하고 있다. 유사시 사고 대비 퇴선 훈련도 매주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관리가 훨씬 강화되어 한 달에 3~4번씩 점검을 받다보니 초반에는 피로도가 쌓였으나 지금은 정립이 되어 괜찮아졌다. 올 여름에는 세월호 여파에서 회복되어 충분히 여객들을 승선했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항해가 있다면
항해 도중 기관실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실습기관사가 훈련대로 대응해주어 화재를 잘 진압했다. 배를 복구해서 최종항해를 마쳤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여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먼저 ‘대인’호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하다. 세월호 여파로 바다여행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나 안전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국제여객선은 아무 문제없이 바다여행을 즐길 수 있으니 자주 찾아와주시면 좋겠다. 서해안의 노을과 아침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권해드리고 싶다. 특히 내년에 배가 교체되면 첫 해외여행일지도 모르는 중국 승객 분들에게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좋은 인상을 받게 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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