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운공사의 원양 컨테이너항로 개설

현재 운항중인 LNG연료선박(오프라인 기사에서 더 많은 도표*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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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해양대학 교수 직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름대로 연재하였다. 그때는 주로 사안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한국해운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해운발전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필자가 판단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양한국에 연재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붓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지식과 자료 및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필자의 주견들이 일부 가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표현이 불충분하여 그분의 참가치를 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책임과 잘못으로 생각하고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고 싶다.

6. 원자재 국적선 운송체제
1. 주요 원자재의 수송상황

1974년 당시의 우리나라의 수입 주요원자재(원양부문)의 수송상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1) 원유
대한석유공사(현 SK정유)의 원유는 합작투자 상대방인 걸프 측의 자회사가 100% 운송권을 10년간(1977년까지) 보유하여 운송 중이었다.1) 호남정유(현 GS 칼텍스)의 원유는 호남정유가 100% 출자한 호남탱카가 원유의 전량 운송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에 투입된 우리나라 선박은 12만 중량톤급 2척 뿐이었다. 경인에너지(현 한화석유)의 원유는 원유 공급권을 가진 외국투자 상대방이 100% 운송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1975년 중에는 계약이 만료될 상황이었다.
 

2) 철강 및 비료 원료와 수입양곡
(1) 철강원료

포항제철의 철강원료의 운송권은 일본에서 건설관계 차관을 들여오면서 일본선사에게 넘어갔으나, 대한해운공사 및 대양선박 등이 선박을 확보하여 그 중 일부를 하도급 형태로 운송하고 있었다.
 

(2) 비료원료
북미로부터 수입하였던 인광석 및 유황의 운송권은 100% 일본선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1975년 중에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재계약이 논의되고 있는 중이었다.
 

(3) 수입양곡
제분협회와 사료협회 등 주로 민간부문에서 수입하는 양곡은 국적선 운송체제가 확립 안 된 스폿마켓(spot market)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부가 수입하는 양곡은 미 PL 4802)에 의하여 도입되는 것이었으므로 50%는 미국선박에 의하여 운송되었고, 잔량을 조달청이 계약단위별로 입찰하였는데 입찰참가자격이 국적선사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적선 수송체제가 그런대로 확립되어 있었다.
 

2. 원자재 국적선 운송체제의 정비
위의 원자재 운송과 관련된 총리실의 방침은 부정기선 부문의 대단위해운회사로 지정된 범양전용선으로 운송권을 집중시켜, 이 물동량을 바탕으로 범양전용선을 세계적인 부정기선 해운기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뜻대로 되지는 아니하였다. 이하 원자재별로 간단히 언급한다.
 

1) 원유
대한석유공사의 원유운송은 장기운송계약이 진행 중이었고 범양전용선이 정기용선 형태로 참여하고 있어서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적극 검토하기로 하였으나, 그 후 석유파동의 여파로 상황이 급변하면서 아세아상선(현 현대상선)이 운송하게 되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후술한다. 호남정유의 원유유운송은 호남탱카가 자사 원유 100%를 국적선으로 운송할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인더스트리얼 캐리어(industrial carrier) 형태였지만 그대로 인정하였다. 특히 호남탱카의 경우 마침 석유파동으로 VLCC(very large crude oil carrier)의 선복이 과잉되어 선가가 폭락하자 이 선박들을 매입하여 쉽게 국적선 운송체제를 갖추었다.

경인에너지의 원유운송은 1975년에 계약이 만료되므로 범양전용선이 보유하고 있는 5만톤급 원유선 4척3)을 투입하도록 총리실의 중재로 협상하였으나, 경인에너지는 범양전용선이 제시한 장기운송계약 운임이 스폿 시장 운임보다 비싸다는 이유(1973년의 석유파동으로 인한 영향으로 원유의 스폿마켓 운임이 완전히 폭락한 상태였음)를 들어 계약에 반대하고, 한화그룹의 자회사로 성운물산이라는 해운회사를 설립하여 탱커를 수입하여 운송하는 자가 운송 체제를 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인에너지는 범양전용선과의 계약을 피하기 위하여 스폿시장 운임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일단 이렇게 하여 운송권을 확보하고 나서 적정한 시기에 정상운임으로 되돌릴 심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번에는 합작선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운임 정상화에 실패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회사가 없어지고 말았다.
 

2) 포항제철의 제철원료
전술한바와 같이 일본선사가 수송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적선 운송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국적선사가 운송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대한해운공사, 한진해운, 현대상선 대한해운 등이 주요 참여 선사였는데, 총리실의 조정을 거부하고 포항제철이 독자적으로 국적선 운송체제로 자진해서 전환시킨 점이 특징이다.

포항제철의 원료인 철광석과 원료탄의 수송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일화가 남아있다. 정부에서 제철원료의 국적선이 운송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잇따르자 포스코가 울며 겨자먹기로 국적선으로 운송권을 넘기려하자, 이번에는 일본선사가 운임을 내려서(덤핑수준은 아니지만) 오퍼하였다. 포스코가 이 운임을 수락하고자 하자 박대통령이 포스코에 10%정도의 차라면 국적선에 주도록 생각해보라고 권고하였다고 한다. 그런과정을 거쳐 1970년대말까지는 포스코 원료 수송의 국적선 운송체제가 완비되다시피하였다.
 

3) 비료원료
마침 영남화학 및 진해화학의 원료운송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총리실과 농수산부에서 적극 개입하여 범양전용선이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4) 양곡
총리실과 농수산부가 적극 알선하여 대한제분협회 및 대한사료협회와 범양전용선 간의 부분 장기운송계약에 성공하여 국적선사의 운송체제가 부분적으로 확립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부정기 대단위 선사인 범양전용선으로 운송권을 몰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는 당초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주요 원자재의 국적선 운송체제를 확립하였고, 주요 원자재 수입업자들이 그 후 수입 원자재의 운송은 국적선에 의한 운송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깊이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원자재 국적선 운송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총리실의 노력은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원자재의 국적선 운송체제만 달성하였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므로, 반드시 특정회사에 집중시켜야 할 필요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특히 강조할 사항은 포항제철 원료인 철광석과 연료탄의 운송에 대하여 포항제철의 박태준(朴泰俊) 사장은 총리실의 국적선 운송제의에 대하여 전혀 응하지 아니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회사 자체의 계획으로 국적선 운송방침을 정하여 그런 방향으로 계속해서 매진하였다. 포항제철의 이 같은 제철원료의 국적선 운송 체제의 확립은 우리나라 원양 벌크선 운항사업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특히 범양전용선은 위의 원자재 중 비료원료와 양곡을 운송할 선박으로 1975년에 처음 실시된 계획조선으로 2만 3,000 중량톤급의 벌크선 4척을 건조하였고, 이들 선박으로 왕항(Out Bound)은 정기선, 복항(In Bound)은 부정기선으로 운송하는 항로를 개설하였다. 왕항 정기선은 우리나라에서 합판산업이 발전하면서 합판의 대미수출이 급증하자 레트라 라인(Retra Line)이라는 회사가 이 항로에 정기선을 배선하여 일본에서의 철재를 바닥에 적재하고, 한국에 와서 합판을 그 위에 적재하여 미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였다. 포항제철이 정상적으로 조업하면서 철재도 한국에서 적재하게 되었는데, 범양전용선은 이 수출화물을 웨이버를 이유로 한국선으로 운송하게 하고, 복항에는 양곡과 비료원료를 운송하는 시스템을 완성할 수 있었다.
 

7. 대한해운공사의 원양컨테이너 항로 개설
1) 지금은 완전히 일반화된 컨테이너 운송체제가 원양정기선 항로에 도입된 것은 1966년에 미국 정기선사인 SEALAND사에 의하여 북미대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소위 대서양항로에 대형컨테이너 전용선을 취항시키면서 시작되었고, 바로 그 다음해에는 역시 미선사에 의하여 태평양항로에 배선이 시작되면서 제3의 교통혁명으로 불리게 된 컨테이너 혁명이 일어났다. 제도의 종전의 재래정기선 운송제도와 비교한 비교우위가 너무 월등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가 등장하자마자 폭팔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첫 개척자인 SEALAND사는 폭팔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고 돈을 엄청나게 벌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갑자기 일어나자 세계 원양정기선 업계에 난리가 났다. 이현상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세계원양정기선 전체가 SEALAND사 한사의 독점체제로 바뀔 날이 올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SEALAND사가 하는대로 따라 투자 하자니,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 규모가 재래정기선사의 규모의 10배가 넘는 투자를 하여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과잉투자로 인하여 정기선 업계 전체가 대 혼란에 빠져들어 모두가 공멸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투자를 않으면 그대로 앉아서 망할 것이고, 투자를 해도 과잉투자로 망할 것이 확실하니 진퇴양난의 늪속에 빠져든 것이다. 고심 끝에 일본같은 곳에서는 일본정부의 유도로 소위 6대선사끼리 협의하여 일본경제규모에 맞는 수준에서 투자하도록 유도하였다. 유럽도 비슷한 방식으로 정기선사끼리 소위 컨소시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공동으로 투자하고 운영하는 체제를 개발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소위 정기선운임동맹(또는 해운동맹이라고도 함)의 독점력에 의하여 원양정기선을 개설하고 싶어도 개설하지 못하던 아시아 선사들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불과 4~5년 사이에 세계 원양정기선 운영체제가 재래정기선체제에서 컨테이너전용선에 의한 운영체제로 코페르닉스적인 전환을 해나갔다. 이 시기는 대한해운공사로서는 세계적인 대 해운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으나 너무나 큰 규모의 투자에 겁을 내고 미루다가 투자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아시아 선사들은 이때 적기에 투자함으로써 세계적인 선사로 성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선사는 대만(에버그린 및 양밍라인) 홍콩(OOCL), 싱가포르(NOL) 이스라엘(짐라인)등이다. 이들은 투자 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우리나라 대표선사인 대한해운공사만이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실기하면서 3류 회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정보기관(아마도 중앙정보부 아니었나 생각한다)에서 대통령에게 정보보고하였고 그것을 읽어 본 박대통령이 전술한 대통령의 사신이 나오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정황을 감안할 때 대한해운공사가 뒤 늦게나마 정부에 의하여 대단위해운회사의 정기선 담당 부분의 주력선사로 선정된 이상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원양컨테이너 항로를 어떻게든 개설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2) 대한해운공사의 소극적인 투자자세
대한해운공사는 대단위 해운기업으로 지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열심히 로비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막상 지정을 받고나서는 관계기관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지연만 시켰다. 컨테이너 전용선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나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정부가 대한해운공사의 대주주에게 최후통첩과 같은 투자촉구를 하고 나서야 겨우 움직이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간단히 기술한다.

1975년초의 어느 날이었다. 장관실에서 해운국장과 필자를 오라고 불러서 가보니 장관이 각서라는 이름의 정서된 문서를 하나 내밀면서 자세한 설명도 없이 이것을 대한해운공사의 대주주에게 가지고 가서 대단위해운회사로서 하여야 할 대형원양컨테이너 항로를 비롯한 대한해운공사가 하여야할 해운업에 대한 투자를 확실히 할 것을 약속받고, 이 각서에 대주주가 두 사람(해운국장과 필자) 앞에서 직접 자필서명하도록 해서 가지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관이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 각서 안은 박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비서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한해운공사에 찾아가겠다고 연락하니 대주주가 입원중이라고 한다. 아마도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피신 겸해서 입원한듯하였다.  입원중이라도 찾아가겠다고 해서 그 대주주가 실질적인 오너인 대학의 부속병원 특실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대주주와 대한해운공사의 대주주의 최측근인 전무와 면담하면서 예의 각서를 제시하고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그 오너라는 사람 왈 “정부가 나보고 자꾸 투자하라고 하는데 우선 정부가 무엇을 해 줄 것인가부터 설명하라. 그래야만 그 내용에 따라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투자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입씨름이 한참 계속되었다. 그 오너라는 사람은 주로 어디 땅 몇만평을 평당 얼마에 샀는데 1년만에 얼마가 되었다고 땅 투기 이야기만 하면서 돈 있으면 땅 사지 수지도 안 맞는 해운업을 할 생각이 없다는 식이고 꼭 나 보고 하라고 한다면 먼저 정부가 무엇을 해줄 것이라고 지원 약속을 먼저 제시하라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정부가 무엇을 해 달라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정부가 하라는 투자를 할 경우 손해가 나면 정부가 보상해주겠다는 각서를 먼저 써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더 이상 해 보아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필자가 앞에 놓은 티 데이블을 힘차게 내리치면서 거절한 것으로 판단하고 돌아가 그대로 보고하겠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 방을 나와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동석하였던 해공의 전무가 뛰어와서 오너가 서명하겠다고 하니 다시 들어가자고 사정해서 다시 들어 갔더니 오너는 별말 없이 각서에 자필서명하고 각서를 건네주었다. 
   
3) OOCL과의 공동운항 협정과 정부의 지급보증 요구
1975년 대한해운공사는 홍콩의 OOCL(Orient Overseas Container Line)과 컨소시엄에 의한 공동운항을 전제로 OOCL이 운항하던 대형 원양 컨테이너 전용선 한 척(Oriental Leader, 1,200teu)을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대한해운공사는 이 도입계약에 대한 승인을 신청하면서 선박 확보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借款)에 대한 지급보증을 위한 담보가 본선 담보 밖에 없다고 하면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컨테이너선을 도입하는 것이니 정부가 지급보증 하라고 요구하였다. 민간 기업의 차관도입에 정부가 급보증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러나 사안이 대통령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 문제를 경제장관협의회에 상정하게 되었다. 상정하겠다고 교통부장관에게 보고하였더니 말도 안되는 일이니 올리지 말라는 것이 장관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대통령의 관심사업이니 일단 경제장관협의회에는 상정하고 그 곳에서 부결된 후 거절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하여 상정하였다.  

경제장관 협의회에서 안건을 필자가 설명하고 나자 의장인 남덕우 부총리가 이 사업을 해서 흑자가 나면 누구수입이 됩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질문의 의도를 알지만 할 수 없이 필자가 그야 당연히 이 회사 수입이 됩니다고 답변하니 부총리가 이어서 이익이 나면 자기 수입이고 믿지면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장사가 자본주의에서 허용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물론 그 말씀의 뜻은 알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KAL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항공사인데 단순히 적자가 예상된다고 투자기피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원양컨테이너사업도 KAL과 유사한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업체의 요구가 있어 일단 장관님들의 의견을 듣고자 상정하였습니다. 라고 변명하였다. 그때 재무부 장관인 김용환 장관이 “이 업무는 제가 잘 아는 업무이니 제가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서두를 시작하고, ”제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있을 때 각하께서 이 문제에 관하여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기를 열망하신 사업입니다.

각하께서 하라고 해도 잘 안 되니 여러번 화도 내셨습니다. 각하께서 너무 집념을 가지고 몰두 하셨으므로 해운이 무엇인가하고, 외국서적을 몇 권 구해서 읽어도 보았습니다 만 실무자가 설명한대로 KAL이 믿지더라도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좋은 것 같이 컨테이너 원양정기항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장관님들이 반대만 안 하신다면 이 업무는 제 소관 업무이니 제가 책임지고 지급보증을 해서라도 되게 했으면 하니 의견을 말씀 해 주십시오. 주무부처 장관인 김용환 장관이 이렇게 말하니  다른 장관들은 침묵하였고 안전은 통과되었다. 회의가 끝나서 나가면서 재무부장관이 필자를 불러서 내가 사무실에 가서 바로 지시할 테니 필요한 공문을  이재국 외환과장에게 접수시키라고 하였고, 그렇게 처리하자 일사천리로 문제가 해결되어 우리나라에 원양 풀 컨테이너선 코리안 리더호가 도입되었다. 이후 이 사업은 잘 진행되었으나, 일본선사들이 미국연방해사위원회(Federal Maritime Commission; FMC)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약 1년간 항로의 개설이 지연되었다.
 

8.석유파동의 여파와 해운업에의 영향
1) 석유파동의 충격

1973년의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원유 운송시장이 붕괴되었다. 이 석유파동의 여파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바로 원유 운송시장을 중심으로 한 액체화물 운송시장의 붕괴였고, 다른 하나는 그간 VLCC 건조 위주로 확장된 조선시설들이 원유 운송시장이 붕괴됨으로써 VLCC 일감이 없어져 위기에 처하게 된 점이다. 우리나라 해운업은 원유 운송 시장의 붕괴의 영향을 심하게 받지는 아니하였다. 범양전용선과 삼화운조가 원유운반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대한석유공사의 합작투자 상대인 Gulf Oil에 장기 정기 용선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아니하였고, 호남정유의 원유 운송은 인더스트리얼 캐리어 형태였기 때문에 역시 영향이 없었다. 경인에너지는 당시 100% 외국 해운사가 운송 중이었기 때문에 역시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업체들이 받은 타격은 대단히 심각하였다. 우선 그 영향을 조선회사별로 약술한다. ① 현대조선이 외국 선주로부터 발주 받아 건조하여 막 인도하려던 VLCC 3척의 인수가 뚜렷한 이유 없이 거부되었다. 이들 3척의 선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큰 문제였다. ② VLCC의 건조 수요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현대조선이 다른 일감을 구할 수 없어 조선소의 가동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현대조선 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은 대한조선공사였다. 당시 대한조선공사는 현대조선이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여 크게 각광을 받자, 이에 자극되어 거제도 옥포에 100만 중량톤급 대형선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를 건설 중이었다. VLCC 붐이 갑자기 사라지고 세계 조선업 전체가 심각한 불황의 늪 속으로 빠지자 건설 중인 조선소에 대한 외국의 융자 등이 취소되어 공사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될 사태에 직면하였다.
 

2) 현대조선의 위기
현대조선은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사주였던 정주영 회장이 1967년의 수에즈운하 폐쇄 후의 VLCC 붐을 보고 바로 대형 조선소의 건설에 착공하였고, 선거(船渠)의 건설 착공과 동시에 VLCC의 건조를 수주 받아 선박의 건조와 도크의 건조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신화를 만들어 나갔으며, 몇 척을 이미 인도한 상태였고 많은 VLCC가 건조 중이거나 도크가 비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석유파동으로 원유 가격이 몇 배로 폭등하면서 원유운송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자, VLCC를 중심으로 한 원유 운송시장이 완전히 붕괴되어 운임은 바닥을 모르고 폭락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주문한 VLCC의 건조계약의 취소사태와 완공된 VLCC의 인수를 이유 없이 거부하는 사태가 잇달아 일어났다. 현대조선의 경우에도 완공하여 인도하려던 VLCC 3척이 선주 측의 인수거부로 오갈 데 없게 되었다. 착공 이전의 계약도 잇달아 취소되었다. 이렇게 되자 잘 나가던 현대조선이 갑자기 위기국면을 맞게 되었다.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는 인수 거부된 VLCC 3척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3척은 공히 외국선주들이 발주하였지만 건조자금은 우리나라 수출입은행의 융자와 현대조선의 지급보증으로 건조되었으므로 만약 이 3척의 건조자금의 회수가 불가능 해질 경우 우리나라 수출입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VLCC의 건조주문이 백지화된 상태에서 거대한 현대조선의 조선시설을 유지할 수 있는 업무량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운 난제였다. 이 문제가 현실화된 1975년의 현대그룹은 그리 탄탄한 회사가 아니었다. 현대조선은 더욱 그렇다. 거대한 조선소를 건설하고 겨우 2~3년간만 정상조업을 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3) 박대통령에게 SOS를 보낸 정주영
이하의 글은 필자가 경제관료들 간에 입 소문으로 떠돌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므로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술한다. 위기에 처한 현대조선의 오너인 정주영씨가 박 대통령을 면회하였다. 그는 큰 서류보따리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정주영씨가 박대통령에게 잘 해 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라면 해결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왔습니다. 이 보따리 속에 제 사업과 관련된 문서가 다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정부가 처리해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간청하였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박대통령이 그 서류 보따리를 받고 당장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검토해 보고 알릴 것이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십시오. 이렇게 두 사람의 면담은 끝났고, 정주영씨가 돌아가자 박 대통령은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부총리)이던 남 부총리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를 검토하여 보고해 달라고 하였다.

남 부총리는 이 문제를 잘 아는 관계자들을 불러 상의하고 검토한 후 문제 처리 방향을 정하였다. 결론은 정부가 하나 현대그룹이 하나 결과는 같다고 보고 현대가 처리 하도록 하되 정부가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해결 방향은 두 방향으로 잡았다.
 

4) 인수 거부된 VLCC 3척으로 아세아 상선 설립
우선 VLCC 3척의 처리방안으로 일단 이러한 선박의 수요가 있는 대한석유공사의 소요 원유를 국적선 운송체제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원유는 합작선인 Gulf 석유의 자회사가 장기계약으로 운송 중이었다. 정부(당시 상공부)가 나서서 Gulf 측으로 하여금 이들 선박을 수용하도록 종용하였으나, Gulf 측도 위기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였지만, 정부의 강력한 권고로 Gulf 측이 한 발 물러섰다. 어떤 조건으로 그들이 물러섰는지 자세한 내용이 전해지지는 아니하나, 이 협상을 계기로 Gulf 측은 대한석유공사에 대한 지분 전체를 정부에 매각하고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아마도 Gulf 자체가 석유파동으로 자금 계획상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정부 측과 협상하여 좋은 가격 조건으로 지분 전량을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당초 정부의 구상은 그때까지 해 온바와 같이 일단 이들 선박 3척을 범양전용선으로 하여금 인수하도록 하고, Gulf가 원가보상 수준으로 이 VLCC 3척을 정기용선 하여 유공의 원유운송에 투입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타협을 할 경우, 1977년 무렵에 종료되는 원유운송 계약을 연장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Gulf가 지분을 매각하고 철수해 버리자 구태여 범양전용선에게 이 3척을 인수시킬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현대그룹이 아세아상선(현 현대상선)을 설립하여 대한석유공사의 수입 원유 수송에 직접 참여하도록 방침을 선회하게 되었다.
 

5) 계획조선제도의 태동
현대조선이 직면하였던 또 하나의 문제는 폭주하였던 VLCC의 수주 물량이 연쇄적으로 취소되는 사태를 맞은데 더하여,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해운시장이 불황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다른 일감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에서 선박건조 수요를 창출해 주기 위하여 계획조선 제도가 고안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될 시점에 남덕우 경제부총리로부터 필자를 자기 방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 왔다. 약속된 시간에 방문하였는데  부총리와 필자의 대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부총리 : 왜 우리나라는 해운업을 하면서 필요한 선박을 외국으로부터 도입만 합니까?
필자 : 선박이 고가인데 국내에서 건조하고 싶어도 조선에 알 맞은 장기저리자금을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총리 : 그렇다면 적정한 조건으로 자금만 공급해 준다면 국내에서 선박을 건조할 의향이 있는 해운업체들은 있습니까?
필자 : 있을것으로 확신합니다.
부총리 : 그렇다면 자금은 내가 마련해 줄 테니 선박을 건조할 계획을 교통부가 수립하여 빨리 그 계획을 나에게 직접 보고해 주시요.
필자 : 알겠습니다. 서둘러 계획을 수립하여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에 만들어진 국민투자기금이라는 장기저리자금의 일부가 계획조선자금으로 배정되고 대형상선을 우리나라 국내에서 건조하는 계획조선제도가 태동되었다. 이하는 그 개요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현대조선은 국내선 건조 수요는 생각하지도 아니하였으나, 급하게 되니 정부에 대책을 호소하게 된 결과였다. 정부로서는 해외 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내수요를 창출하는 문제를 검토하게 되었다. 검토 결과는 국내건조는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국내건조수요를 유효 수요로 만들어 주는데 필수적인 금융제도의 뒷 받침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다.

그래서 국내 해운업계가 필요로 하는 선박을 국내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하는 금융제도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당시 경제정책을 총괄하던 경제기획원과 선박수요부처인 교통부가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 낸 것이 당시 경제개발에 필요한 정책금융자금의 공급원이던 국민투자기금을 활용한 선박의 국내건조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실무자들이 일본의 예를 모방하여 계획조선이라고 명명하였다.
위와 같은 경위로 현대조선과 대단위 해운회사인 대한해운공사 및 범양전용선의 의견을 들어 우선 2만 3,000중량톤급 벌크선 4척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건조대상 선박을 2만 3,000톤급 벌크선박으로 한 것은 당시 이란으로부터 현대조선이 동형의 선박 몇 척을 이미 수주하였기 때문에, 동일한 설계(specification)로 여러 척을 시리즈로 건조할 경우 원가를 훨씬 낮출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해운업체 양사가 이를 수락하였기 때문이다. 건조에 대한 자금조건은 국민투자기금 50%, 외자 40%, 자기자금 10%로 하였다.
당초에 이 계획조선의 실수요자로 대한해운공사와 범양전용선을 선정하여 각각 2척씩 건조하도록 결정하였으나, 시황이 악화되자 대한해운공사가 포기하여 4척 전부를 범양전용선이 건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계획조선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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