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재일교포 이철씨 작사 작곡한 ‘하마베에이꼬’가 원곡
1969년 남성 보컬 키보이스가 번역 곡 취입해 대히트

원작자 이씨, 소송 통해 39년 만에 저작권 찾아 ‘화제’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국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불타는 그 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국 끝없이 남기며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파도가 치고 있는 주문진항
파도가 치고 있는 주문진항
대중가요 ‘해변으로 가요’는 언제 들어도 시원하다. 파도가 가까이서 밀려오고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해변의 연인들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다. 노랫말에서처럼 백사장에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지난 7월 12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여름특집 2탄에서 가수 딕펑스가 ‘해변으로 가요’를 흥겹게 불러 눈길을 모았다.
한여름 뜨거운 젊음의 찬가 ‘해변으로 가요’는 음반발표일 기준으로 국내 최초 남성 록그룹인 키보이스(Key Boys)가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다. 4분의 4박자, 고고풍의 이 곡은 1970년 음반으로 발표됐으나 처음엔 대중적 사랑을 크게 받지 못하고 5년 뒤에 히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창단멤버가 다 빠지고 없는 상태에서 후기 키 보이스가 1975년에 다시 불러 빅 히트한게 이채롭다.
 

해변으로 가요 노래가 담긴 키보이스 음반
해변으로 가요 노래가 담긴 키보이스 음반
일본 곡으로 가사 우리말로 번역
‘해변으로 가요’는 원래 일본 곡으로 나중에 우리말 가사로 번역됐다. 노래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불리게 된 사연은 4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그룹사운드페스티벌에서였다. 우리나라 키보이스와 미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그룹사운드팀들이 5일간 공연을 펼쳤다. 그들 중엔 재일교포 이철(李徹, 일본명 아베 데스)씨를 포함한 8명의 일본 그룹사운드 ‘더 아스트로 제트’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우리나라에선 일본노래를 부를 수 없게 돼있었다. ‘더 아스트로 제트’의 리더 이철 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작사·작곡한 ‘하마베에이꼬’(浜邊へ 行こう)를 국제관계 평론가인 형(이건)에게 한국말로 가사번역을 맡겼다. 이건 씨는 이를 다시 친분 있는 소설가 이호철 씨에게 가사번역을 부탁, 시민회관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불린 노래가 바로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로 나가는 ‘해변으로 가요’다. 

인기절정의 남성보컬그룹 키보이스가 ‘해변으로 가요’를 부른 것은 그 이듬해(1969년)부터였다. 시민회관 공연이 끝난 뒤 키보이스가 이철 씨에게 “그 노래를 부르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 씨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해변으로 가요’를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씨는 ‘주간조선’과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음악가로서 호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등록 전에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와 관련된 기록들을 보면 여러 사람 이름이 나온다. 1970년 유니버설레코드사가 만든 앨범 ‘보칼 NO.1 키보이스 특선 2집’엔 작사·작곡자 표시 없이 키보이스 가요그룹의 노래라고만 표기돼 있다.

이어 1976년 유니버샬레코드사가 만든 ‘키보이스 골드’란 레코드판엔 키보이스 작사·작곡으로 돼있다. 그러던 게 1983년 4월 서울음반에서 만든 ‘키보이스 골드’ 레코드판엔 김희갑 작사·작곡으로 나와 있다. 1998년 1월 장용 씨가 별세함에 따라 그의 딸인 장실비아 씨가 그 명의를 이어 받았다.
하지만 이 노래 원작자 이 씨가 소송으로 저작권을 되찾으면서 일본노래란 사실이 밝혀졌다. ‘해변으로 가요’ 작사·작곡자가 김희갑 씨도, 키보이스 멤버인 장용 씨도 아닌 재일교포 이철 씨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씨가 ‘해변으로 가요’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돼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은 1980년대였다. 그는 “당시는 한일 음악교류가 거의 없는데다 저작권협정마저 없어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언론보도 나간 뒤 저작권 확인소송
일본 곡 ‘해변으로 가요’가 우리말로 번역, 시민회관에서 소개됐고 키보이스가 이철 씨 허락을 받아 취입하기까지의 스토리를 밝혀낸 언론매체는 ‘주간조선’(2002년 8월1일자)이었다. 이 씨는 ‘주간조선’ 보도가 나간 뒤 2003년 저작권 확인소송을 냈다.

이에 따라 부산지방법원 민사7부(재판장 윤근수 판사)는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이철)가 피고(장실비아)를 상대로 낸 저작권 확인소송에서 사단법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해변으로 가요’가 원고의 저작물임과 그 저작권이 원고에게 있음을 확인한다고 2005년 7월 13일 판결을 내린 것이다. 윤근수 재판장은 판결 이유에서 “당시 이호철이 한국말로 번역한 ‘하마베에이꼬’ 가사와 이 사건의 노래가사가 같고 페스티벌공연 때 연주하거나 페스티벌공연을 위해 연습한 ‘하마베에이꼬’ 악보와 이 사건의 노래악보가 대부분 같다는 사실, 키보이스가 위 페스티벌에 참여한 1968년 전에 이 노래를 공연하거나 키보이스 가요앨범에 실린 흔적이 없는 점 등을 들어 ‘해변으로 가요’ 저작권은 원고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피고인 장 씨는 이에 불복, 상급법원까지 올라갔으나 결국 졌다. 대법원 1부(주심 고현철 대법관)는 부산고법 판결에 대한 장 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키보이스 멤버였던 장용 씨의 유족인 피고 장모 씨는 1998년 6월부터 저작권료로 받은 8000여만원을 원고 이 씨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이 씨는 “서울시민회관에서 일본팀 ‘더 아스트 제트’로 공연했을 때 ‘히비토타쓰노 하마베’(해변의 연인)를 불렀다”며 “그때 참가한 키보이스에게 우리 노래를 부르도록 빌려줬다”고 주장했다. 이후 ‘해변으로 가요’가 히트했지만 키보이스는 작사·작곡가를 명시하지 않았다. 또 1976년부터 작품자가 키보이스로, 1993년부터는 김희갑으로, 또 1996년엔 장모씨 이름으로 둔갑했다고 주장했다.
1970년 국내 첫 음반이 나온 대중가요 ‘해변으로 가요’는 이렇게 해서 2007년에야 원래 주인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 번안곡 ‘해변으로 가요’를 부른 노래그룹 키보이스는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1호로 기록된다. 미8군 무대에서 락앤키(Rock & Key)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밴드가 막 청년이 된 소년들을 스카우트해 만든 이름이 키보이스였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군 하사관으로부터 기타를 배우고 일찌감치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기타의 신동’으로 소문났던 대학새내기 김홍탁과 오리지널멤버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상빈이 활동했다.
‘해변으로 가요’가 국제적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곡목과 같은 드라마도 나와 눈길을 모았다. 2005년 7월 30일~9월 11일 SBS-TV가 ‘해변으로 가요’(14부작, 이장수 제작, 이승렬 연출, 문희정, 조윤영 극본)란 드라마를 방영해 인기를 끌었다. 이청아, 이완, 전진, 강정화 등이 출연한 청춘멜로물로 젊은 시청자들 사랑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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