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나에게 두 가지 얼굴로 다가온다.
바다는 나에게 있어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긍정의 대상이었다. 바다는 우리 가족들의 생활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고기는 우리 집 대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비옥한 농토의 곡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만선滿船을 하고도 그 다음 날 또 만선의 기회를 제공하는 바다는 무한한 보고와도 같았다. 또한 바다는 다양한 색깔과 분위기를 제공하는 변신의 천재였다. 봄날의 바다는 잔잔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여름날의 바다는 홍수가 난 하천의 황토색을 받아 포용해 주면서 황토색이 푸른 바다색에 더하여진다. 태풍이 올라오면 바다는 크게 요동치게 되고 천방 둑으로 큰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가을의 바다는 높은 하늘에 맞추어 푸른색을 더 짙게 하였다. 겨울철 바다는 항상 거칠었다. 나의 집은 모래사장에서 15미터 거리에 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3000톤 규모의 상선과 조우하였다. 석영을 싣기 위하여 온 일본 선박이 모래사장 앞바다에 닻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때 나는 선박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맛있는 일본식 장어 덮밥을 먹어보았다. 모두 바다가 나의 주위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동네의 주업은 오징어 건조였다. 바다에서 나는 오징어를 건조하여 건어물을 팔아서 이문을 남기는 일들에 우리는 투입되었다. 한여름이면 백사장에 나가서 자맥질을 하며 바닷가 모래에 반 정도 묻어 두었던 맛있는 수박을 먹으면서 여름을 지냈다. 겨울바다는 우리에게 눈먼 고기를 주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찍 일어나 바닷가 모래사장에 가면 방향을 잃은 큰 고기들이 얹혀있었다.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상선에 근무하면서 집으로 가는 봉급이 집안의 살림살이에, 동생들의 대학공부에 보탬이 되어 살아가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하여준 것도 바로 바다였다. 바다는 나에게 또 많은 지혜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태풍은 만나기까지가 힘들지 지나가면 바다는 금방 잔잔해진다.

 

태풍의 진행방향으로 보아 우반원에 들어가면 큰 파도와 센 바람에 고생을 하니까 태풍이 지나가는 좌반원에 있도록 선박의 항로를 미리미리 변경하여야 한다. 같은 태평양 횡단을 할 때라도 대권항로를 이용하여 알류산 열도로 올라가면 3일이 단축되어 경제적인 항해를 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태평양횡단을 할 때에는 연속해서 발생하는 저기압을 위에 두고 같이 가게 되면 대체로 순풍(順風, 뒷바람)을 받게 되어 이익이다. 항해술을 익히고 이를 잘 활용하면 편하게 바다생활을 할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저기압을 만나서 큰 파도와 바람을 만나면 이에 순응하여야 한다. 큰 에너지와 맞붙어서 이길 수 없다. 1시 방향에서 파도와 바람을 맞으면서 파도가 잔잔해 지기를 2-3일 기다려야 한다. 3시 방향에서 이를 맞으면 배는 전복되고 만다. 사정이 어려울 때에는 현상유지만을 하면서 때로는 약간의 후퇴도 감수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바다는 나로 하여금 하루하루가 아니라 멀리 앞을 내다보도록 하여주었다. 항해하여 도착하는 항구의 수심水深에 맞추어서 짐을 실어야 한다. 예상 흘수(선박이 물에 잠기는 깊이)를 미리 계산한 다음 출항할 때에는 항해 중에 소비될 선박연료유와 청수의 양을 더 추가해서 흘수가 조금 깊어도 좋다. 항상 1달 뒤 2달 뒤의 일을 예상하고 오늘의 수치를 계산하였다. 미리미리 준비하고 장래를 예상하여 치밀하게 기획하는 법을 바다는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의 바다는 한편 나에게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하였다. 나는 운동신경이 둔하여 수영을 늦게 배웠다. 바다로 나가기는 커녕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3번이나 허우적거리는 것을 이웃집 친구어머님이 건져주셨다. 다른 아이들이 바다로 헤엄쳐 나아가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할머니는 물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아버지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수영대회에 나가도 나는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수영을 하지 못했으니까.


울진삼척공비사건이 났다. 파도소리는 간첩이 걸어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오는 소리로 들렸다. 몇 번이나 가위에 눌렸다. 쏴아 하는 파도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나는 두 번의 좌초사고를 체험하게 된다. 좌초란 바다 밑에 보이지 않는 바위에 선박이 얹히는 것을 말한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에 대경호 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우리 어선이 항구의 입구에 좌초한 것이다. 한 달 내내 물을 퍼 올렸다.

 

그 악인연이 15년 뒤 또 나에게 일어났다. 난 사고당일 바다를 떠나리라 결심하였다. 이날은 내가 바다를 배척하고 두려워하는 최극점에 도달한 날이기도 하였다. 바다는 나에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맞게 한 위험천만의 기피의 대상이었다. 갱웨이에서 발을 통선에 디디려는 순간 통선이 빠져나가 물에 빠지기 직전 구조된 일, 선박의 뱃전에 묶어둔 원목위에 내려갔다가 미끄러져 바다에 빠졌고 물로 다시 올라온 순간 두 후배가 양쪽 손을 잡아주어서 살아난 일들, 선장으로 책임을 맡았던 선박이 좌초하여 포기하고 탈출하면서 나의 선박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려 하였던 절체절명의 순간의 바다. 영원히 바다를 떠나리라 결심했던 33세의 초라한 선장의 성급한 결정을 불러왔던 바다. 이들은 모두 나에게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바다로 나의 뇌리에 박혀있다. 이렇듯, 바다는 나에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았다. 유년시절 축산항 집 앞의 바위에 올라 눈을 들어 시야를 멀리하면 바다는 끝이 없이 펼쳐져있었다. 남쪽으로 펼쳐진 산들의 마지막은 포항에 이르고 또 북쪽으로 가면 후포에 이르게 된다고 어른들은 말하였다. 포항과 후포에 이르는 가상의 선을 긋고 이를 나의 좌우에 두면 가없는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어른들은 배질을 며칠하면 일본근처에 대화태라는 좋은 어장이 있다고 하였다.

 

끝까지 끝까지 배를 타고 지평선까지 가면 무엇이 있을까? 무언가가 있을 듯 한 바다. 내 손에 무언가 잡힐 듯 한 바다.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 줄듯 하면서도 말하여주지 않는 바다. 그 바다가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35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그리고 이제 50대의 장년이 된 지금 나는 바다와 나의 관계는 운명적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를 계기로 바다를 배경으로 항해하는 선박과 관련된 법률관계를 전공하고자 목표를 세웠고 34세에 만학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5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결국 해상법 교수가 되었다. 나에게 두 얼굴로 다가왔던 바다, 즐거움을 제공하기도 하고 한편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바다는 이제 즐겁다고 하여 무한히 즐거워할 수도 없고 두렵다고 하여 피하여 갈수도 없는, 즐겁다면 넘치지 않도록 즐기고 두렵다면 그 두려움을 극복하여야 하는 운명의 바다, 나아가 숙명의 바다가 되었다. 내가 진정바다를 좋아하게 된 것은 부산대학에 근무하면서 부터이다.

 

 
 
나는 바다에서 자라났고 20대에는 바다를 항해하였고 30대와 40대에는 바다와 관련된 법학을 공부하였다. 교수가 되어서도 바다에 접한 학교의 연구실에 있었기 때문에 바다의 존재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의 연구실은 높은 산을 나에게 주었다. 연구실 창가는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푸름 그 자체였다. 나는 또 다른 푸름을 즐겼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나는 무언가 내 주위에 없는 것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바다였다. 지나친 일로 과로가 되어 쉬고 싶을 때, 복잡한 심경일 때, 무언가 깊이 있는 생각을 하여야 할 때, 논문의 결론 부분이 잘 잡히지 않을 때, 나는 택시를 타고 해운대 백사장으로 달렸다. 마치 바다가 나를 부르는 듯 나는 바다로 달렸다. 그리고 30여분을 머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기도하고, 피로를 풀어보았다. 기분전환도 되었고 답도 구하여졌다. 몇 차례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어 좋았지만, 아쉽게도 2년이 채 되지도 못하여 부산을 떠나서 서울로 올라왔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고 싶으면 아름다운 부산 해운대의 바다, 고향 축산항의 바다가 항상 생각났다. 바다 곁을 떠나고서야 비로소 진정 바다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바다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학회가 열리는 센텀 호텔이라는 곳에 여정을 풀었다. 해운대와 상당한 거리에 있는 것을 알고 상당히 실망하였다. 아침식사를 일찍 하고 택시를 타고 동백섬을 향하였다. 30분 산보를 하였다. 역시 좋았다. 파도소리, 백사장, 굽이치는 파도, 사람들의 부산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다가 좋았다. 난 돌아오는 택시에서 생각하였다. 과연 바다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현재는 어떤 존재인가? 난 50여년을 바다와 같이 하여왔다. 그 바다는 나이가 들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과 숙명이라는 끈에 의하여 바다와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년의 바다는 나에게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바다였다면, 20대의 바다는 나의 직업을 존재하게 하는 은혜의 바다였다. 30대부터의 바다는 나의 평생의 천직이 된 해상법을 존재하게 하는 객관으로서의 바다였다. 34살에 시작한 해상법공부를 마치고 해상법 교수가 되어 목포해양대학에 부임하여 목포해양대 동인지에 ‘나와 바다의 인연’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나는 나보다 바다와 깊은 인연을 가진 해상법교수도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제 해상법 공부를 시작하여 30년이 된 지금 바다는 더 이상 기쁨의 대상도 아니고 고마움의 대상도 아니며 더구나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고 배척의 대상도 아니다. 바다는 해상법 연구의 대상인 선박이 존재하게 하는 터전으로서 나에게 존재한다. 바다는 하늘과 다르고 육상과 다른 선박이 항해하게끔 하여주는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나에게 부여한다. 바다는 이제 나에게 필연이요 숙명이 되었다.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던 바다, 그 긍정과 부정을 승화시켜 객관적 의미로 재탄생한 바다는 이제 그 객관화된 존재로서 나를 끌어주고 있다.


다른 학문과 해상법을 구별하게 하도록 결정지어주는 객관으로서의 바다는 슬픔과 기쁨, 긍정과 부정을 언제나 포용하기도 하고, 또 이것들이 표출되도록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도록 나에게 냉철함을 강요하기도 한다. 법학자인 나에게 있어 바다에서 일어나는 법현상은 더 이상 슬픔만을 표창하는 것도 아니고, 기쁨만을 표창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슬픔과 기쁨을 제3자의 입장에서 또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한다. 한편, 법학자의 관점에서의 바다의 객관성은 나에게 기쁨을 단순하게 수용하고 슬픔을 배척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서 기쁨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의 기쁨을 극대화하고 슬픔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의 슬픔은 최소화하는 법제도를 만들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객관으로서의 바다는 한계를 알 수 없는 무게와 크기를 지니기 때문에 해상법학자인 나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연구테마를 제공하기도 한다.


유년시절 고향 집 앞의 바위에 올라가 보면 지평선 저 너머에 무언가 있었는데 바다가 나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던 그것은 바로 해상법 학자의 길이었음을 이제 깨닫게 된다. 조부님이 일본에서 귀국하시면서 어선을 구입하여 축산항에 정착하신 것부터 시작하여, 내가 해양대학에 입학한 것도, 그리고 운명의 해상사고도 모두 바다와 관련되었고 나를 해상법으로 이끌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얼굴을 가졌던 바다는 50대 중반의 장년의 나에게는 이렇듯 객관의 바다가 되었다. 객관으로서의 바다는 나에게는 일정한 방향성을 유지하여 주고 언제나 제자리에 돌아오게 하는 회전축의 역할을 한다. 나아가 나에게 무한의 에너지를 공급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바다가 좋다. 바다는 긍정도 부정도 모두 품어주고 언제나 객관성을 담보하는 그런 큰 그릇으로 나에게 존재하고 나는 그런 바다를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학회가 시작되기 전 아침에 시간을 내어 택시를 타고 해운대의 동백섬으로 와서 30분정도 바다를 느끼고 눈에 담으며 한 학기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바다로부터 무한한 객관의 에너지를 얻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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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교수는 경북 영덕군 축산항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부산에서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한 다음, 항해사 및 선장으로 10년간 선박에 근무하였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법학공부를 시작하여 김&장 법률사무소, 목포해양대 교수, 부산대학교 교수를 거쳤고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해상법을 강의한다. 그는 현재 중진 해상법 학자로 성장하였다
(연락처 captainihkim@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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