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길목에서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 5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순과 새싹들이 마냥 싱그럽다. 생명력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는 연초록 이파리들이 대지와 가지에서 고개를 쳐든다. 저 여린 몸으로 한 여름 폭염을 견딜 수 있을까? 봄의 햇살로 단련하여 잘 이겨내길 빈다. 꽃보다 아름다운 5월의 신부, 도심의 명동성당에선 결혼식이 한창이다. 인생의 황금기 청춘, 꽃 중의 꽃인 신랑과 신부...... 5월을 예찬하는 이유이다. 짧은 주례사가 인상적이었다. 신랑신부가 사랑과 행복을 만드는 비법 ABC는 Accept(수용), Believe(신뢰), Care(돌봄)인데,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상 누구보다 믿어주며, 자신처럼 보살피라는 것. 신혼부부만 아니라 모든 부부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가정의 달 5월, 화목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14년간 기르던 우리 집 강아지. 추위를 몹시 타던 녀석, 꽃 피는 따뜻한 봄날, 사르르 눈을 감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 참 힘들었지? 아파트로 옮긴 뒤 맘껏 짖지도 못하고. 이젠 밝은 세상에서 눈을 뜨고 크게 짖어라. 왈왈!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더니, 그동안 정들었던 것들과 이별하는 시간이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짐이 이미 정해져 있다지만, 이별에는 회한의 눈물이 따른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야말로 그 얼마나 가슴 아픈 슬픔이겠는가!

봉호금일상분피(蓬蒿今日想紛披)
총상추풍우일취(冢上秋風又一吹)
진적가련수수진(陳迹可憐隨手盡)
욕환무부사당시(欲歡無復似當時)

오늘쯤 쑥대가 가득 덮고 있을 테고
무덤 위엔 가을바람이 또 불겠지
지난날 자취 가련하게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
또 다시 즐거운 일 찾으려 해도 예전 같지 않겠지.

송대의 왕안석이 요절한 매제를 추억하며, 그의 묘 앞에서 쓴 글이다. 재주가 아까워 자신의 여동생을 주었으나 28세의 한창 나이에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매제. 그의 무덤 앞에 하염없이 흐느끼는 누이를 보며, 그는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해운인생 57년’-김종길
경해(耕海) 김종길의 해양수필 ‘저녁노을 바라보며’가 출간됐다. 아호처럼 해운행정과 더불어 평생을 보낸 저자는 ‘내가 누구일까’ 라는 회의가 들어 지나온 삶을 한번쯤 성찰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자신을 부풀릴 것 같아 수필로 정해 막사발이 속살을 드러내듯 소탈하게 쓰고 싶었다고 한다. “저녁노을! 바라볼수록 참 아름답네요.”라고 경탄한 저자의 외침이 희수를 맞은 그의 인생 고백이 아니었을까?

5월의 콤파스 강사로 김종길 전 부산해운항만청장이 나와 엉뚱한 주제라고 자평한 그의 해운인생 57년을 소개했다. 그는 은퇴를 앞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성 나자로 마을에서 나환우들을 만난 뒤 그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들의 애환을 기록하기 위해 소록도와 만주 월남 인도 네팔 등지를 방문하여 나환우들과 생활하며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나환자들을 보살폈고 자신의 두 아들을 처형한 공산주의자 청년을 양아들로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와 나환자 집단격리처인 몰로카이 섬에서 나환자들을 보살피다가 자신도 나환자가 된 다미엔 신부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김 청장은 일본 공무원이 자신에게 준 책을 읽고 해운의 역사를 쓰고 싶어 ‘되돌아본 해운의 사실(史實)’을 썼다고 한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해운강국 영국은 장미전쟁에서 승리하여 튜더 왕조를 일으킨 영국의 헨리7세와 그의 아들 헨리8세에 의해 해운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명나라 영락제는 정화에게 317척의 선단을 주어 남방항로를 개척하게 하여 위세를 떨쳤다. 우리나라 상고사를 보면, 삼국시대에는 조공무역으로 해운이 이루어졌고, 통일신라 때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동북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해운 말살정책으로 인해 조선인은 해상접근이 불가능했으나 해운선각자들에 의해 불모지와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해운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영예로운 해운인들’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100명을 쓰려 했으나 역부족으로 우선 50인을 선정하여 썼다. 그후 한국해기사협회가 ‘해기사 명예의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기록들이 인용되어 보람을 느낀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는 현재 신성모, 이시형, 박옥규, 황부길, 유항렬, 신순성이 헌정되었고, 올해 바다의 날을 맞아 이재송과 윤상송 두 분이 모셔졌다. 또한 선원선박 행정을 맡은 경험을 살려 ‘선박행정의 변천사’를 박경현 전 해운항만청 선박과장과 함께 집필하였다.

해양수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를 올해 만들었다.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다. 인생은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자신의 배역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30년 전인 1983년 8월 29일 IMO 한국대표로 소련에 다녀왔다. 그 당시엔 미수교국 소련에 다녀왔다는 것만 해도 요시찰 대상이었다. 김포공항에서의 출국도 어려웠고, 모스크바 공항에서의 입국심사도 곤욕을 치르며 공식 입국 1호가 되었다. 소련에 머물 때 KAL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객 269명이 몰살하였다. 그때가 러시아호텔에 숙박한 9월 1일 새벽 6시24분이었다. 다음날 세미나 장소에 가보니 참가국 국기 가운데 태극기가 빠져 있어 소련의 외무성 국장에게 항의하여 어렵게 구해와 태극기를 감격 중에 게양하였다. 2차 소련 방문시에는 항만안전관리에 관해 협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IMO의 해상안전’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국방대학원에선 국제관계를 전공하였다. 그때 쓴 논문제목이 ‘소련의 개방정책을 통해본 한/소 해운교류 예측’으로, 이 논문에서 1991년에는 개방될 것으로 보았는데, 나의 예측이 정확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 얘기를 KMI의 조찬회에서 발표하였더니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꿈꾸고 있네” 하였으나 나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1991년 7월 9일 부산~나홋카 직항로 취항 축하식에서 치사를 하였다. 정말 감회가 깊었다.

부산항 인공섬 건립을 반대한 적이 있다. 불가사유는 부산항에 대한 애착심 때문이었고, 지금도 옳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인공섬이 건설되면, 수질이 오염되고 정박지가 없어지며, 전쟁시 교각이 폭격을 받으면 부산항이 마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베항의 로코 아일랜드 얘기를 하는데, 부산항은 내해인 고베항과 달리 공해이고 수심이 25미터나 되어 방파제 건설비가 엄청나다. 그 보다는 신선대 쪽에 8선석을 짓는 것이 효율적이라 주장하여 그렇게 시행되었다. 나는 어느 상보다 모교가 주는 ‘자랑스런 해대인상’을 더 높게 평가한다. 국가가 주는 훈장보다 더 영광으로 생각하는데, 고맙게도 이 상을 수상하였다. 극작가 신봉승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얘기하면서 세종대왕이 없었으면 조선왕조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감이다. 당시의 석학인 최만리는 한글을 오랑캐 글이라고 폄하하였고 심지어 집현전 학사들까지 반대하였으나 세종대왕은 오직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였다. 조선조 제일의 영의정이라는 이원익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목을 요구하였으나 서슬이 시퍼런 반정주모자들을 설득하여 광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하였다. 공무원은 돈과 명예보다 명예를 먹고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오려고 노력했다.
그의 수필집 중에 실려 있는 ‘수채화 한 폭’을 담아본다.

진달래가
수줍은 듯 한들거린다.
묘지 엄동설한 견디고
봄바람에 실려 왔나 봄 안개 타고 왔나

너는 봄이면 오는데
내 님은 아니 오신다.

 해양전문인력 양성 확대를 위한 정책토론회
우리의 미래가 바다에 있기에 해양전문인력을 키워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 해양전문인력 양성 확대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5월 8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해양수산부의 출범과 함께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를 반영하듯 참석자들이 회의실을 가득 메워 열기가 대단했다. 모두가 해양산업은 국가경제의 기여도가 매우 높고 미래 성장동력이자 블루오션이기에 육성 발전시켜야 할 당위성이 충분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아야 할 전문인력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 현실적인 한계이다. 따라서 해양전문인력의 수급조정은 시급한 당면과제이며 이를 관련업계와 국회가 앞장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이 중론이다. 해운입국 해양강국으로 가는 밑거름이 바로 인재요 전문인력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이의 양성 육성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현행 양대 해양대학의 해기사 배출인원은 800명이 채 안된다. 이를 1,000명, 2,000명 나아가 3,000명까지 확대시켜야 할 것이라고 발표자들은 주장했다. 해운선진국 일본은 현재 해기인력 부족으로 자국선박의 승선인력을 외국선원으로 메우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80%이고 운송수단의 99.7%를 해운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유사시 제4군의 역할을 해야 하기에 해운산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만일 우리나라가 이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해사클러스터가 일본의 국가경쟁력이지만, 해기전문인력을 제대로 양성하지 않아 일본의 국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일본 관계자의 한탄을 우리도 하게 될 것이다.

해법학회와 해운물류학회 학술발표회

4월 26일부터 27일까지 부산대학교에서 열린 한국해법학회 2013년 정기총회 및 학술발표회에 참가했다. 신설된 해법학회 부산지회장 서영화 변호사를 비롯한 회원들의 열과 성을 다한 준비에 고마웠다. 요즘 회자되는 갑을 논쟁을 반영하듯, “우리 부산 사람들은 서울에서 오신 분들 모두가 갑입니다.” 이럴 때 쓰는 말, “우리가 남이가?” 어찌 서울에서 내려 왔다고 갑이겠는가, 손님이라서 갑이라면 몰라도. 우스갯소리겠지만, 송구스럽고 계면쩍다. 얼마전 포스코 임원이 승무원에게 한 막말과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대리점주에 대한 폭언으로 야기된 갑을 논쟁이 장안의 화두가 됐다. 포스코와 남양유업의 이미지 실추는 말할 나위가 없다. 임직원 한 사람의 잘못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지금까지의 관행인 갑을관계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직원채용시 인성평가 점수를 높게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 SNS의 위력도 실감했다. 어쩜 SNS가 갑을의 위치를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얘기가 빗나갔다. 우리나라 제1의 항도 부산, 이젠 이에 걸맞게 위상도 높아지고 해법 연구와 발전에도 큰 기여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 법학전문대학원 중에 부산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만 해상법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여타 대학들은 변호사시험에 해상법 문제가 거의 출제되지 않아 개설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해양강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로선 안타까운 일이다. 차라리 선택과목으로라도 남아 해상 쪽에 뜻이 있는 학생들은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부조직에 해양수산부가 부활한 것은 그 만큼 해사분야가 중요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도출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해상법 분야에 대한 재인식도 필요하다. 요즘 유행인 해사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해상법 분야의 전문가들도 더 많이 필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법학회의 학술발표회를 마치고 부산지회 회원들의 안내로 동백섬과 해운대 달맞이길을 산책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싱그러운 풀냄새 나는 산책로를 걷노라니 가슴이 탁 트인 듯 시원하다.

해운물류학회 학술대회가 5월 3일 인천대 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가보는 송도 신도시, 그동안 많이도 변했다. 인천대교의 웅장한 모습과 함께 고층건물들이 큰 키를 뽐낸다. 광활한 대지 위에 설립된 인천대 캠퍼스. 인천의 면모가 첨단 혁신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인천은 항만, 공항, 육로 모두 잘 갖추어 있어 해륙공 복합운송의 적지로서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 거기에다가 교육 문화 컨벤션까지 새 정부의 창조경제 메카로 발돋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느꼈다. 이날 학술대회의 주제는 경인 아라뱃길의 경제성 검토와 발전방안이었는데, 심도있는 주제발표와 문제점 검토와 함께 개선방안이 학술적으로 제시되었다. 특이한 것은 많은 중국 학생들이 해운물류분야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날도 여러 편의 논문을 중국 대학원생들이 발표하였고, 우수논문상을 타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의 한국어 실력도 대단하여 발표와 토론을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운관련 양 학회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우리 해운물류산업의 저변이 넓어지고 내실도 그만큼 더 갖추어질 것이다.

선상세미나와 일본기행
2013년 선상세미나를 잘 마쳤다. 바다의 날 기념으로 해운가족 156명이 고려훼리 카멜리아호를 타고 일본에 다녀왔다.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단위로 참석한 사람들이 많아 공식 행사보다는 사적과 경승지를 찾는 역사탐방과 문화행사 위주로 진행하였다. 조선 도공의 아픔이 서려있는 심수관 도예촌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가라쿠니다케(韓國岳),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일본왕실의 뿌리를 확인한 우도(鵜戶)신궁과 다카치호(高千穗) 협곡을 둘러보는 한편, 큐슈의 빼곡한 나무와 맑은 물 시원한 공기의 대자연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버렸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일본인들의 환경보호 정신과 먼 훗날의 다음 세대를 배려하는 모습은 최근의 악화된 한일관계를 감안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장점이었다. 기리시마(霧島)와 기쿠치(菊池)의 온천은 지진과 화산의 위험 속에서도 산하(山河)를 지켜가는 일본인들에게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다. 일본의 장인정신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578년에 도래한 백제인 후손 유중광(柳重光)이 세운 금강조 곤고구미(金剛組)로, 일본의 시텐노지(四天王寺)와 호류지(法隆寺)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들을 건립하였는데, 이 회사의 경영지침은 ‘첫째 낮에는 술을 마시지 말라, 둘째 현장을 떠나지 말라, 셋째 서둘지 말라’라고 한다. 이 회사가 시공한 건축물들이 우수함은 지난 효고대지진때 검증이 되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파손되었으나 유독 금강조가 시공한 건축물들은 견고하여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요즘 아파트의 층간소음으로 인해 이웃 간의 다툼이 심각하다. 아울러 부실시공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대형 건설회사가 시공한 아파트까지도 기초공사와 마무리공사 불량으로 입주자들의 원성과 빈축을 사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으로 초청받아 국가적인 건축물을 시공하고 가르칠 정도로 그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오늘날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 곳은 성의 없이 대충하여 크고 작은 하자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물론 고도성장기의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장인정신을 일본인들이 물려받고 정작 우리는 지키지 못했나 하는 자괴심이 든다. “대기만성(大器晩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무리 뛰어난 자도 오래 기다리는 자는 이기지 못한다.” 천년의 기업은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본에 충실하고 사람과 기술을 키우는 기업이 오래간다는 사실을 우리 선조가 만든 기업 금강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일본여행에서 배운 교훈이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showloa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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