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 Lim 인말새트 아태지역 마리타임 담당자(좌측), Peter Blackhurst 인말새트 해사안전 담당자 
Chris Lim 인말새트 아태지역 마리타임 담당자(좌측), Peter Blackhurst 인말새트 해사안전 담당자 
이 자료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후 신생조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나라 해운업 건설의 첫 삽을 뜬 김용주가 자기가 경험한 사실을 정리한 기록이다. 이 기록이 쓰여진 시기는 아마도 1978년 당시 해운행정을 담당하였던 해운항만청이 한국해사문제연구소에 의뢰하여 한국해운사를 편찬하였는데, 그때 편찬팀의 의뢰를 받아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의 대부분은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한국해운항만사에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필자가 이 기록을 정독한 결과  너무나 중요하고 값진 자료라고 생각되어 한국해운항만사의 원시사료 보존차원에서도 기록을 남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원본을 그대로 ‘해양한국’에 게재를 의뢰하였다. 다만 독자들이 유의할 것은 이 글이 이 분이 경험한 1945년에서 1950년대 초까지의 본인의 기억을 더듬어 30여년 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용어 등에서 어색한 점이 있는데 명백한 탈자나 오자를 제외하고는 원문을 그대로 살리도록 노력하였다.

필자가 아는 김용주씨의 해운과의 인연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김용주는 해방 전 포항에서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는데, 해운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국책해운회사의 하나였던 오사카쇼센(大阪商船)의 포항대리점을 경영하고, 창고업과 하역업, 그리고 연안화물운송업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해운업 경영에 대한 전문지식과 노하우를 가졌던 사람이다.
2. 그는 해방이 되자 신생조국 건설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경영하던 기업체들을 동생 등 친지들에게 맡기고 상경하였다(1945년 8월 25일).
3. 상경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곰곰히 생각한 결과 신생조국의 건설에 꼭 필요한 사업이면서, 전문가가 적은 해운업이 가장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몇 몇 해운인들을 결집시켜 해운건설연맹을 결성해 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4. 해운건설연맹은 그  첫 사업으로 일제강점기하에서 가장 대형 해운기업이었던 조선우선의 관리권을 인수하였다(이를 위해 조선우선관리위원회 결성, 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5. 조선우선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당시 화폐로 200만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이 돈을 관리위원들이 나누어 출연하기로 하였는데, 실제 돈을 내는 사람이 없어 김용주가 혼자서 200만원을 내고 조선우선의 경영을 정상화(당시 고장으로 계선되어 있던 2천톤급 부산호의 수리운항)하였다.

6. 그 결과 관리위원회가 자동 해산되고 김용주가 사장에 취임하고, 다음과 같이 선박을 확보하여 조선우선의 경영을 정상화하였다.(미군의 전표선 발틱호 등 무상임차 운영. 일본으로부터 조선우선 선박으로 일본항만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 5척을 돌려받음)
7. 정부수립 후, 해운발전 방향에 관하여 심사숙고 후, 원양항해가 가능한 대형선을 운영하는 선박회사는 자기 재력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사실상 자기 소유가 된 조선우선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정부출자와 민간자본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를 설립, 초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8. 일본이 불법으로 가지고 간 선박을 되돌려 받는 문제로 일본과 교섭을 진행하면서 당시 대통령 이승만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을 가진 채 주일특명전권공사(지금의 주일대사)로 발령받아 일본에서 근무 중 6. 25가 발발하여 6. 25 전쟁수행과 관련된 미군측(당시의 실질적인 한국전수행본부기능 수행)과의 외교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한국의 동란 극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9. 주일공사직을 후임인 신성모에게 인계하고, 1951년 귀국하여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으로 복귀, 해운발전에 전념하였다.
10. 1952년 초에 경무대가 외국에서 미국전표선인 시마비형 선박 두 척을 도입, 해공에 맡겨 운항하려 하였는데, 그 선가가 너무 비싸다고 직언하였다가 경무대의 미움을 사서 대한해운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1. 해운공사 사장직 사임 후 경제계로 돌아가, 자기사업을 전개하여 대성하여 전남방직 그룹으로 호칭되는 재벌급 대기업집단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김용주-
일제 강점기 해운업은 거의 일본인이 운영하였으며, 우리 한국 사람으로서 해운업에 종사하였던 예는 극히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사람으로 해운업을 했던 사람은 우선 인천과 강화도간에 여객선을 운항하였던 삼신(森信)기선주식회사 사장 김종섭씨와 부산과 여수 간에 여객선을 운항하였던 김석문(金錫汶)씨를 들 수 있겠다.

김석문씨는 일본인과의 극심한 경쟁에 견디다 못하여 결국 운항을 중단하고, 그 선박을 중국 상해에서 운항하다가 광복직전에 선박을 매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포항에서 오오싸까쇼센(大阪商船)의 대리점과 창고업 및 항만운송업을 겸하면서 연안화물선을 운항하고 있었다. 그 당시 오오싸까 쇼센은 세계적인 대선박회사였으므로 나는 기선을 많이 취급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내가 해운업과 인연을 맺게 된 연유였다.

이외에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우리 한국인으로서 해운업을 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해운업은 많은 자본을 요했으며, 기선 한 척만 해도 몇 백만불을 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의 자본으로 그와 같은 대자본을 요하는 선박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인 역시 해운업만은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어서 정부와 은행의 특별금융으로 경영할 수 있었지 개인이 손 댄 사람은 없었다. 8. 15 이전의 우리나라 해운상황을 대략 살펴보면, 해운은 일본인 위주로 경영되었으며 대자본을 가지고  경영하는 회사는 있었으나, 중간규모의 기업은 그 수가 극히 적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운회사로서는 조선우선주식회사를 들 수 있겠다. 이 회사는 니혼유센(日本郵船)과 오오싸까 쇼센이 각각 40%를 투자하고 총독부 산하의 식산은행이 20%를 투자하여 3자가 설립한 총독부 지정의 특수회사였다.

그리고 연안만을 운항했던 회사로서는 부산의 연안기선주식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 역시 조선우선과 오오싸까쇼센이 투자하여 정기선을 운항하고 있었고, 또 일본의 시마다니(嶋谷)기센이 중국의 대련과 북해도의 오타루간을 운항하였는데, 이 항로는 대련을 출항하여 인천, 부산, 포항을 거쳐, 쯔르가(敦賀)에 기항한 후 몇 개의 항구를 더 기항하고 오타루까지 운항하는 정기항로였다. 이 때 만주지역의 잡곡(좁쌀)이 인천으로 많이 수송되었다.

8. 15전 일제시대의 우리해운은 대략 이러한 정도였으며 2차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대형기선과 개인이 소유하였던 연안화물선, 그리고 부산의 조선기선의 쓸만한 배들까지도 거의 다 일본군부에 징발되었다. 그때 본인 소유였던 어선 두 척과 화물선 두 척도 징발되었다. 이리하여 해방직전의 우리나라 해운은 거의 마비상태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1943년 이후에는 바다가 완전히 막혀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해방당시에는 선박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유일하게 남아있던 것은 조선우선이 보유했던 2,000톤급의 ‘부산호’ 1척이 파손으로 수리차 인천에 입항해 있었던 것뿐이었다.
광복 직후 내가 생각한 것은 과거 일정시대에 사업을 경영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여 내 개인의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었으니 앞으로는 독립국가 건설에 무엇인가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처음에는 정계로 뜻을 세워 보았으나 정치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공인물들이  많이 있으니 그 분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다른 부문을 생각하여 보았다.
오늘날은 항공분야가 잘 발달하여 마치 항공기시대와도 같으나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모든 문화와 국제관계가 선박을 이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생국가인 우리나라의 문화교류와 산업발전, 그리고 제반분야의 발전이 해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더욱이 신생 독립국인 우리나라에 해운은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필요한 분야를 과연 앞으로 누가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생각하여 보았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해운분야에 직접 관여하여 지식이나 경험을 쌓은 사람으로 해기원이외의 운영자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다소의 지식과 경험일지라도 이 대열에 서야할 사람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해운건설에 착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25일부터 해운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하여, 우선 서울에서 과거에 고급해기원이었던 선장 기관장 등을 비롯하여 해운경영에 직접 참여하였던 인천의 김종섭씨 그리고 일인이 경영하였던 해운회사에 종사하였던 사람들을 모아서 명칭은 좀 우습지만 각사가 연합한다는 뜻에서 소위 해운건설연맹을 결성하였다.

당시의 해기원으로서는 박옥규, 이시형, 민흥기, 권태춘, 석두옥, 윤상송, 이재송씨 등이 있었고, 경영자측으로서는 김종섭씨를 비롯하여 각 해운회사에 근무하였던 분들이 있었으며 이들을 망라하여 해운건설연맹을 창립하고 내가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처음 시작했던 일은 우리나라 고급 해기원들의 규합과 해운건설에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해 9월 미군이 진주함과 동시에 제반문제 처리는 미 군정청이 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연료인 무연탄이 고갈상태였기 때문에 부득이 삼척에서 무연탄을 운반해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조선우선주식회사의 인수 운영
미 군정청에서는 조선우선의 선박으로 삼척에서 무연탄을 수송하라는 명령이 해운건설연맹 앞으로 하달되었다. 그러나 해운업 경영은 국내 자본만이 아니라, 외자를 포함하여 거대한 자본을 요하는 사업이고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외화자금이 극히 어려웠던 때였고, 뿐만 아니라 내 개인의 힘으로는 해운사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미 군정청 해사부장 이동근씨와 의론하여 동조자 몇 사람을 규합하여 조선우선을 인수하기 위한 관리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관리위원은 강일성, 김철호, 설경동, 김종섭씨와 본인 등 5인이었다.

당시 인천에 계류돼있던 조선우선 소속의 부산호를 수리하여 10월 27일(45년) 부산으로 출항시켜 삼척에서 인천으로 무연탄을 수송하게 되었다. 그때 군정청은 선박운항에 필요한 자금을 경영자 자신이 조달하라는 것이었는데, 조선우선에는 자금이 전혀 없어 급료도 못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우선의 부산호 수리에는 최소한 200만원의 자금이 필요하였다.

광복직후의 10월이라 당시의 200만원은 지금(70년대 말)의 2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 자금을 관리위원 5인이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금 염출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당시 관리위원인 강일성씨가 중국 상해에 대단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분을 믿고 이 일을 시작하였으나 전혀 돈을 내지 아니하였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여서 결국은 200만원을 단독(김용주 자신)으로 출자하게 되었으며, 관리위원회는 자동적으로 해산되었다.

그리하여 군정청으로부터 조선우선의 사장직을 정식으로 위임받고 조선우선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당시 간부로는 사장 김용주, 전무 박경직, 상무 석두옥, 이사 한개, 선박부장 윤상송씨 등이었다. 대략 이상의 분들로 조선우선을 운영하기 시작하여 해운건설의 기반을 서서히 굳혀가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배 한 척으로 운항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느껴 미군정청과 교섭한 결과 미국정부로부터 2,000톤급 발틱(Baltic)형 선박 6척과 FS형 6척을 대여받아 운항하였다. 그때 나는 일본군부에 징발되었던 선박이 전부 손실, 파손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만약 어딘가에 남아있다면 그것을 찾아와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과는 전혀 왕래가 두절된 상태였으나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종합 조사한 결과,  일본에 약 5~6척의 조선우선 선박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풍문으로 들었다. 이에 나는 조선우선회사의 주주는 일본법인과 조선식산은행이나 회사는 조선에 적을 둔 법인이고, 소유선박이 조선에 적을 둔 선박이니 전쟁이 종료된 이 마당에는 재적지인 조선으로 돌려주어야 함이 법리에 맞는 일이라고 주장하여, 1946년 3월에 미 군정청과 맥아더사령부에 조선우선의 선박리스트를 작성, 현재 일본에 잔류해있는 선박에 대한 반환청원서를 제출했다.

기선 5척 일본으로부터 반환
약 4~5개월 후에 내도한 회신의 내용은 김천호, 강원호, 함경호, 앵도호, 일진호 등 5척이 일본의 어느 항구에 있다는 사실과 이 배들을 반환할 터이니 선원을 보내 인수해가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정말로 기뻐서 환호성을 질렸고, 곧 선원들을 조직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배를 인수 운항하던 중, 1947년 초에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인수한 5척의 배를 다시 반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먼저 인수해왔던 5척 외에 나머지 배까지도 반환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터라 이는 어불성설이라고 한마디로 거부해버렸다.

한일 선박회담
그리고 계속하여 나머지 배에 대한 반환요청을 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나는 당시 초대 법무부장관이었던 이 인씨와 상의하여 일본에 잔류 중인 조선우선 소속 선박의 반환 교섭을 벌이기로 하고 맥아더 사령부에 갔더니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그 전에 반환하였던 5척을 도로 일본으로 반환하도록 할 심산으로 이 교섭회담을 받아주었다.

이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대일선박회담 사절단을 단장 김용주, 위원에 법무국장 홍진기(후에 중앙일보 사장 역임), 해운국장 황부길, 수산국장 대리 오진호, 영어담당 정인섭 등으로 구성해 1949년 4월초에 도일하였다. 일본측 주장은 종전후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 제2호에 의하여 일본의 해외재산은 1945년 8월 9일 현재에 소재한 지역에 귀속된다는 속지주의에 의하여야 할 것임으로 조선우선 선박도 일본에 소재하였으면 일본 귀속이 된다는 것이었다. 기히 조선에 반환한 5척도 일본귀속이니 도로 반환하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우리 측은 법인과 개인이 각기 다르며 조선우선은 지금 한국에 존속하고 있는 법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법인재산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하였다. 한편 저쪽은 8월 9일 이후 일본에 있었으니 귀속주의에 의하여 일본재산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5일 동안이나 팽팽히 맞서서 주장하였다.

사령부측 위원은 관재처장인 모 미군소장과 법률가 4~5명이었는데, 서로 법 이론으로 싸우다가 끝으로 미군측이 선박은 무기이므로 조선에는 이 이상 선박을 보낼 수 없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지령을 내세워 회담을 종결해버렸다. 그때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어 교섭의 대상을 미 국무성으로 돌리기로 하고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워싱톤으로 떠나고 다른 위원은 본국으로 귀환하게 하였다.

나는 위싱톤에서 1개월 동안 체류하며 당시의 주미대사 장면 박사와 더불어 미 국무성을 위시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보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미국무성 측은 연합군 사령관이 집행하는 일이어서 국무성소관 밖의 일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 당시 일인이 주도하던 법인은 모두 다 일인재산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산의 급수회사에서 8. 15 전후의 급수일지가 발견되어 1945년 8월 9일 이후에 몇 척이 급수받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를 근거로 8월 9일 이후에 조선지역에 많은 일본선박이 입항하였다는 증거를 삼아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와 재교섭하기로 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맥아더 사령부와 투쟁한 결과 20,000톤급 평안호 1척을 우선 반환받게 되었다.

대 이북 교역선의 납북

우리 해운사상 또 하나 기억해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1948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암모니아 비료가 전혀 없어서 농사에 많은 애로를 겪던 때였다. 이때 화신산업의 박흥식씨가 남한에서 여러 가지 잡화를 이북에 주고 북한으로부터 암모니아 비료와 교환하는 물물교환을 협상하였는데, 수송선박을 내어주도록 나에게 요청하였다.

그 당시 생각으로는 비록 남한과 북한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세계로 양단된 상태에 있기는 하나 우리 민족 간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교류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며, 더욱이 이남의 농민들을 위해서는 실로 하고픈 일이었다. 그래서 군정청에 이 사실을 보고했던 바 쾌히 승낙을 얻었는데 역시 미심쩍은 데가 남아 있었다.

즉 선박을 북한으로 보내려면 직접 북한과 교섭하여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보장받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당시 영업과에 근무하던 최현진씨를 평양으로 보내기로 하여 교섭한 결과, 판문점에서 대기 중이던 북한측 지프(Jeep)차 편으로 평양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때 북한측에서는 조선상사라고 하는 대행상사가 있었는데 이곳을 통해 그 곳 항만시설이 선박 입출항에 지장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하여 전선, 면사 등 여러 상품을 제1선인 앵도호에 선적하여 흥남항에 입항하였는데 북한 측에서는 우리 측의 화물만을 전부 양육하고 나서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본선을 압류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북한의 무법 무의리를 규탄하였으나 별도리가 없었고, 약 2개월 후에 선원들만은 돌아올 수 있었으나 앵도호는 영구히 빼앗기고 말았다.

대한해운공사의 설립
대한해운공사의 설립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일들을 더듬어 보면, 조선우선은 일본에서 찾아온 배와 발틱형 6척으로 국가해운사업을 잘해나갔고, 많은 선원을 양성하면서 크게 발전해나갔다. 그러던 중 정부수립후 대한해운공사의 창설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당시 군정청시대에 교통부에서 미국선박인 LST 10여척을 들여와 직영하고 있었는데, 1년에 30억원의 결손을 내게 됨으로써 이 문제가 그해 9월 국회에서 예산 편성시 큰 문제로 제기된 데서 비롯되었다.

국회에서 조선우선은 흑자경영을 하는데 무슨 이유로 교통부 직영선박은 이런 과도한 결손을 내고 있느냐고 추궁하였다. 허정 교통부장관의 면담요청에 따라 방문했더니 교통부 해운국에서 직영하고 있던 LST 선박을 조선우선에서 인수 운영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정부는 적산자산을 연고자에게 불하하고 있던 때였고, 조선우선도 적산자산이었으므로 나는 이에 대한 불하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불하를 받으려고 생각하고 있던 중, 교통부의 이 같은 요청을 받게 되었다.

해운사업은 본래 대자본을 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 몇 사람의 힘으로는 원만한 운영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장관에게 해운사업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며 지금과 같은 여건 하에서는 개인으로서 기천만불의 외화를 구할 수도 없어 개인 힘으로는 불가능한 사실이니 직영하고 있던 LST를 합하여 반관반민의 정부출자회사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더니, 허정 장관은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이로써 1949년 가을에 대한해운공사의 설립을 발기하여, 연말에는 창립을 보게 되었다.

그때는 자금사정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대한해운공사의 자본금을 5억원으로 하고 80%인 4억원을 정부출자로 하였으며, 나머지 20%인 1억원을 민간인이 출자하기로 하였다. 나와 당시 조선우선의 간부진은 일전의 보상도 없이 그대로 회사를 해운공사로 인계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한해운공사는 조선우선이 보유하였던 선박과 교통부해운국이 직영하였던 LST선박 6척을 합한 30여척의 선박을 보유한 상당한 규모의 해운회사로서 출범하였다. 초대사장은 본인이 맡았으며, 중역진에는 조선우선에서 근무하였던 분들이 그대로 취임하였다.   
      
홍콩에 정기선 배선
당시는 1947년부터 우리나라의 해운무역은 마카오 무역으로 출발하여 홍콩무역으로 이제 막 시작하던 때로서, 마카오, 홍콩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화를 수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해산물과 광산물, 인삼 등이 수출되어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 당시 나의 생각으로 해외무역은 자국기를 게양한 자국선으로 하는 것이 국위를 선양하고 우리 무역인들에게도 사기를 앙양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홍콩과 인천, 부산 간에 정기항로 개설을 구상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사내외에서 반대도 있었으나 나는 결행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1948년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는 국가 간의 통상협정이나 해운협정이 전혀 없던 때였으므로 상사가 직접 홍콩정청과 협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홍콩으로 가서 대리점을 설치하고 홍콩정청에서 조선우선 선박의 홍콩입항 허가를 얻어 1949년 1월에 운항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 홍콩항로는 우리나라 무역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이 항로가 약 1년 반 동안 계속되던 중 6. 25 동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 홍콩항로 개설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사실은 홍콩무역이 계속되고 있던 중, 일본과의 통상도 상당히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점이다. 역시 우리나라에는 일본과의 교역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일 간에도 정기선을 취항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때 일본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과 정식 해운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있으니 정부가 일본과 해운협정을 체결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1950년 1월에 일본과 해운회담이 개최되었는데, 대표위원에 김용주, 위원에 당시 해운과장이던 문덕주가 위원이 되어 도일, 약 1주일 간의 회담 끝에 한일간 해운협정이 체결되었다.

나는 해운회사 경영에 열심하던 중 1950년 3월에 갑자기 이 박사로부터  주일대표부 단장(전권공사)에 취임하라는 명을 받고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미 일본으로부터 외교관 아그레망이 내도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1년한으로 취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해운공사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해운공사 전 선박 6. 25 동란 수송에 제공

당시 해운공사는 해군에서 매월 지급하는 용선료에 의하여 운영되도록 돼있었으나 재무부에서는 용선료를 전혀 지급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당시 해운공사는 부채가 60여억 원이나 누적되어 선원급료나 식량대금의 미불 등으로 경영이 매우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시 재무부장관, 교통부장관이나 해군참모총장에게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간청해 보았으나 정부 지불 일체가 중지되어 있어 별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서 이 같은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비서를 시켜 즉시 미불된 용선료를 지급하도록 지시해 주어 3일만에 60억원을 받아내어 회사 경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재무부장관과 나 사이에 좋지 못한 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1951년 8월, 나는 주일공사 직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다시 해운공사 사장의 실무를 맞게 되었는데 1952년 4월 해운공사 선박에서 큰 밀수사건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군인이 일본 요코하마에서 당시 시가 10억원에 상당하는 보석과 시계를 해공선박으로 밀수입했던 사건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발견한 사건이었다. 당국은 이 밀수사건을 이 대통령에게 해운공사 배에서 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고하였으며, 이 대통령은 해운공사라면 김용주가 사장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고, 보고자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이 사건이 해운공사가 저지른 일로 인식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1952년 6월에 해공 사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이 이 사건에 기인하였던 것을 사임 당시에 나는 알지 못하였다. 밀수사건의 적발에 대하여는 해공이 오히려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이었는데 반대가 된 셈이다. 

시마비형(CI)선 두 척 외국에서 구입
내가 해운공사 사장으로 재임 시, 잊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일은 당시 경무대에 ‘미노코’라고 하는 영부인 비서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 사람이 나를 찾아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CI형선 2척이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주재 영사가 이 배를 수배하여 구입하려 하고 있는 바, 척당 120만 불로 결정되었으니 선박을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이를 거절해버렸다. 이유는 그 당시 그러한 형의 배는 일본에 많이 입항하고 있었으며, 부산항에서 인도하는 조건으로 척당 70만 달러면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도장소가 스톡홀름이라고 하면, 이 배를 한국까지 회항하는 비용을 포함하면 140만 달러가 된다는 계산이었으며, 그렇다면 반가격이면 충분히 일본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운공사를 그만두게 되었던 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밀수사건도 있지만 이 선박구입에의 반대가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후 이 2척의 선박은 해운공사의 선박담당 상무 윤상송씨를 대표로 한 인수요원이 현지에 가서 현지인 선장, 기관장을 승선시켜 부산항으로 회항시켰다. 그 당시 한국 최초의 5,000톤급 디젤선이 입항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위시한 다수 인사가 환영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해운공사 설립에 관하여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 당시 조선우선은 불하할 때 대표자가 전체의 2분의 1의 불하권을 갖도록 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2분의 1은 중역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적산불하의 일반적인 예였다. 만일 당시 나는 희생하더라도 이 불하권에는 거대한 이권이 있으니 나머지 중역분들 만이라도 그 권리를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이제 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 중역이었던 박경직씨, 석두옥씨, 윤상송씨, 한 개씨 등은 모두가 한결 같이 결백한 분들이어서 자신들의 이권을 포기하고 국책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좋다고 했던 일들이 기억난다.      

해양대학 설립에 협력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우리나라의 해양교육을 맨 처음 시작했던 이시형씨 생각이다. 이시형씨는 8. 15 해방직후 해운건설연맹의 동지였으며 조선우선 경영시 나는 이시형씨에게 입사를 권유한 바 있으나 사양하며, 자기는 우리나라의 해양교육에만 일념하겠다고 했다. 1946년에 들어 이시형씨가 해양교육을 시작할 때 나는 적극 후원하였다. 제1회 해양대학 신입생의 입학시험은 조선우선 사옥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훌륭한 해기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음은 모두가 이 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자라온 결과라고 생각하여 창설자 이시형씨에게 경의를 표한다.
끝으로 내가 처음 해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앞에서도 술회했듯이 독립국가로서 꼭 필요한 부문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뜻을 같이한 여러 동지들의 협력으로 대한해운공사가 순조롭게 되었음을 술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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